문학의 길잡이/이승하 시인님 방

[스크랩] 시를 이루는 것들/ 이승하

은빛강 2010. 4. 10. 19:09
시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누가 써온 것인가? 그 기원을 찾아서.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


시인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

시인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의사소통을 위한 말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말의 탑을 세우는 자,
그의 이름은 시인입니다. 시인을 빨리 말하면 신이 되지만 신은 시인을 좋아지지 않을 겁니다.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족속이기 때문이니까요.
다른 세상은 이데아입니다. 이상향에 대한 꿈은 낭만주의자들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주의자도 상징주의자도 초현실주의자도 새롭게 만들보고자 하는 어떤 세상이 있습니다.
꿈을 현실과 연결시키려는 이가 소설가라면 꿈을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는 자가 시인입니다.
제가 애송하는 시 2편의 한 부분씩을 인용합니다.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나의 방에서 어둠은 떠나지 않는다
나의 눈이 폐허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나의 눈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유일한 자유의 공간은 내 마음 속 깊은 곳
그것은 죽음과 친숙한 공간
혹은 도피의 공간
(이곳에 살기 위하여)부분 오생근역

귀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위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바다)제1연

앞의 것은 초현실주의 시를 쓴 폴 엘뤼아르의 작품인데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쓴 그의 대표작입니다. 벽이 피를 흘릴
수는 없으므로 이 시에서 벽은 바람벽이나 장애물이 아니겠지요.
관계의 단절일 수도 있지만 전쟁의 참화를 겪은 도시의 벽,
핏자국이 남아 있는 벽, 단절의 벽, 닫힌 내면의 벽...
다중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람의 눈이 어둠 속을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폐허에 부딪칠 수는 없는데 시인은 그것을 가능케합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이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었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여 죽음과 친숙한 공간, 혹은 도피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시인은 사전적인 뜻을 무시하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하지요.
뒤의 것은 (화사집)에 실려 있는 서정주의 작품입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다다랐을 때 쉬어진(바다)이니 만큼 제 1연의 마지막 행을 저는 시인이 내뱉은 비분강개한 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몇편의 친일 작품으로 말미암아 시인은 친일 문인의 대표자로
매도 되기도 했지만 좋은 작품까지 비판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길은 참으로 많지만
식민지 치하인 이 땅에서는 길이 길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므로 시인은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이겠지요.

아-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듸 깊이 위에
네 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알래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바다)부분

"청년아"하고 부른뒤에 그대와 관계가 있는 모든 이와 결별하고
먼 곳으로 탈출하라고 하더니 침몰하락 마구 외칩니다.
가는 도중에 침몰할지라도 일단 떠나라 외치는
정신나간 자- 바로 시인입니다. 이런 외침이 시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정신 나간자로 보지 않고 시인으로 봅니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잊어버려"라고 했다면 참 무미건조했을 터인데
먼저 네 애비와 에미를,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마지각 네 계집을 잊어버려"라고 권유합니다.
시인은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습니다. 말로써 말입니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카프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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