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마당/여행의 향기

선암사

은빛강 2010. 5. 29. 03:24

선암사 푸르고 무소유 향기 가득한데…스님 어디 계 십니까

한국경제 | 입력 2010.05.28 18:31 |

 

[전남 순천] 선암사와 순천만 갈대길

봄볕을 받으며 송광사로 가는 길.해탈교를 건너 편백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편백나무 숲이 대나무 숲과 교대하더니 금세 사라진다. 대숲 사이로 가르마 같은 길이 열린다. 이런 길엔 영혼이 있을 것 같다. 길이 안겨주는 환희심에 젖다보니 어느새 불일암이다. 암자의 소박한 면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암자 마당가에 올라서자 만 가닥 감회가 물도리동 같은 내 가슴 속을 휘감는다.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꼬박 25년이 걸렸다. 막 30대로 접어들던 시기,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먼지처럼 세상을 부유하던 때 이곳에 왔었다. 5월이었지만 한 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찜통 날씨였다. 가파른 산길을 뛰다시피 올라갔다. 산문집 《무소유》를 읽은 이래 스님을 얼마나 만나 뵙고 싶었던가.

◆해탈교 건너 송광사 가는 길

불일암 쪽마루에 잘 생긴 스님 한 분이 선정인을 한 채 앉아계셨다. 허리가 꼿꼿했다. 스님이 축대 아래 수각(水閣)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가서 얼굴과 목부터 깨끗이 씻고 오너라."

이어 스님께서 차를 내오셨다. 양은 주전자에 끓인 찻물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단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저 차만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이나 흘렀을까. 방안으로 들어가신 스님께서 책 몇 권을 꺼내오셨다. 그 가운데는 사형이자 송광사 방장을 지낸 구산 스님의 유고문집 《돌사자》도 끼어 있었다. 마침내 스님께서 말문을 열었다.

"큰일을 하려거든 먼저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한다. "

스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른다. 당시의 난 큰일을 도모하기는커녕 자학에 익숙해 있던 터였는데 말이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스님께서 말길을 이으셨다.

"내가 기별해놓을 터이니,송광사에서 며칠 쉬었다 가거라.삼일암 현호 스님도 한번 만나 보고…."

스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불일암을 떠났다. 스님이 베푸신 무설법의 공양으로 빈약한 영혼이 오랜만에 홀로 배불렀다. 법정 스님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얼마 전 스님께서 머나 먼 적멸 속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당가 후박나무(실제 수종은 목련이다) 아래 30㎝도 안 되는 나지막한 높이로 쳐진 대나무 울.그곳이 스님의 사대육신을 거둔 산골처였다. 이제 스님께선 때로는 자신이 손수 만든 텅 빈 나무의자에 한 줄기 바람으로 와 앉아 계시기도 하고 봄이면 하얗고 정갈한 목련 꽃봉오리로도 나투시리라.

◆600년 넘은 선암매 향기에 취하고

이제 법정 스님의 후생이 된 후박나무에 작별을 고하고 불일암을 떠났다. 한때 효봉 스님 회상에서 스님과 한 법형제로 지냈던 고은 시인이 쓴 < 법정 > 이라는 시 몇 구절을 떠올리면서.

'시를 쓰려다가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으레 그의 혼은/방금 새옷으로 갈아입은 소녀였다//사과도 먹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다/그렇게 아름다운 수필을 써서/사과는 말라갔다'( < 만인보 > 11권에서)

선암사로 들어가는 숲길엔 현세의 구복을 기원하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있다. 지난 3월 말 선암매 향기가 너울거릴 때 이곳에 다녀갔었지.600여년이나 된 선암매 향기가 어찌나 진한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해마다 선암사의 봄은 그렇게 도발적인 선암매 향기로 움트기 시작한다.

선암사 경내는 어느덧 초여름이었다. 꽃이 진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선암매의 매실이 제법 굵어졌으며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축 늘어진 종무소 앞 올벚나무는 나른한지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선암사 봄의 대미를 장엄하는 꽃은 수령 300년이 넘은 아홉 그루의 영산홍이다. 그러나 영산홍은 이미 절정을 지나있었다. 아마도 올해 영산홍의 낙화가 빨랐던 것은 유난히 변덕스러웠던 날씨 때문일 게다. 영산홍 대신 주먹만한 크기의 탐스런 불두화 꽃송이들이 이 오래된 난야(蘭若 · 절)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선암사는 늙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측간이라는 선암사 뒷간도,젊었을 적 내가 잠시 머물렀던 심검당도 요 몇 년 사이 쳐다보기 안쓰러울 만큼 쇠락해버렸다. 그래도 선암사는 여전히 그 흔한 '불사'도 마다한 채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기특한가. 부디 이 생태주의 절이 오래도록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지켜내기를….

안병기 여행작가

● 찾아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지방도 857호선→선암사 입구나 호남고속도로 주암 나들목→국도 27호선→송광사 입구로 향하면 된다. 기차는 서울 용산역에서 순천까지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다닌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순천까지 간 뒤 순천에서 선암사,송광사행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김포~여수 항공기를 이용할 땐 리무진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해 순천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흑두루미 찾아오는 생명의 보고

순천만 대대포로 향한다. 순천만 갯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습지 경관과 다양한 생물군이 존재하는 곳으로 람사르 습지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약 15만평의 갈대밭이 펼쳐져 있는 이곳은 희귀 철새들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겨울이면 흑두루미와 황두루미,저어새,검은머리물떼새 등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키 작은 갈대숲 사이로 지네가 기어가듯 이어지는 나무다릿길을 천천히 걸었다. 갯벌에선 노방게와 짱뚱어가 사이좋게 놀고 있고,조금 떨어진 곳에선 민물도요새가 홀로 먹이 사냥에 한창이다.

산길을 타고 용산 전망대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지는 순천만 갯벌을 내려다 본다. 용의 몸뚱이를 한 갯골이 순천만으로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다. 여인의 굴곡보다 더 황홀한 'S라인'이었다. 저 광활한 갯벌에 서서히 번져갈 일몰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후 3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 앞에 인간이 품은 희망이나 기대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맛집과 숙박

점심식사는 송광사 앞에서 하면 된다. 송광사 앞 상가단지에 식당이 즐비한데 대부분 산채백반이나 산채비빔밥이 주메뉴다. 굳이 추천한다면 광신식당(061-755-2213)을 꼽고 싶다. 특히 선암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온 여행객은 이 집 주인의 개인택시를 이용해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순천만 대대포에서 일몰을 감상한 뒤에는 갈대회관(061-741-8431)의 짱뚱어탕이 제맛이다. 일몰의 경치가 아름다워 여러 시인들의 작품 무대가 된 와온에서는 바닷가에 인접한 코리아 나폴리(061-723-6601)에서 맛깔스런 해물정식을 즐기고,숙박을 청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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