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 때 의병 소집, 김산의병의 참모장으로 활동

선생이 구국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1896년의 전기의병 때부터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항일의병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을미의병이 바로 그것이다. 재야유생들의 주도 아래 을미의병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구국대의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도 이때 전국적 봉기상황에 자극을 받고 서둘러 의병을 규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에 있던 선생은 이기찬과 이은찬, 그리고 조동호 및 이기하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896년 3월 26일 장날에 맞추어 김천 읍내에 들어가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선생의 나이 42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때 선생은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의진은 김산의병이라 불렸다. 이처럼 거의한 의병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갖춘 뒤 김산과 성주 두 곳에다 진을 쳐놓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하여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지역 군수가 이 의병을 격파하기 위하여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을 소집하는 한편, 의병 봉기 사실을 대구관찰사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김산의병은 지례의 자위군은 쉽게 격파하였으나, 이어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을 맞아서는 고전 끝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거병 직후여서 아직 진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의 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선생은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즈음 근신 전경운이 해산하라는 임금의 밀지를 전하여 의진을 해산하였다.
성균관 박사를 거쳐 평리원 서리재판장에 임명

선생은 의진 해산 후 진보에 있던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진력하며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선생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되는 것은 1899년 신기선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이후 선생은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두루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평리원서리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선생은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이 중앙 관직에 진출해 있던 기간에 주목되는 사실은 유명한 항일 언론가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 과 교유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은 그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기반으로 삼아 처신해 왔지만, 장지연과의 교유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1904년 8월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정부에 건의한 10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

한편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함으로써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선생은 이상천, 박규병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의 배일통문 속에는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시 일제침략에 대해 정부관료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주동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변하였던 것이다. 러일전쟁 중인 1905년 1월 선생은 그간의 항일활동이 빌미가 되어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며칠 뒤 선생은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약 2개월간 집에서 시국을 개탄하고 지내던 중, 3월 2일 비서원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의 전력을 두려워하여 최익현, 김학진 등과 함께 3월 11일 다시 구금하였다. 구금되기 전에 일제로부터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선생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일언지하에 이를 반박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최익현과 김학진을 석방한 뒤에도 선생을 4개월 동안이나 구금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조금도 굴함이 없었으므로 일제는 하는 수 없이 7월 13일 선생을 헌병의 감호 아래 강제로 귀향 조치하였던 것이다.
이인영과 함께 연합의병부대 창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지리산 삼도봉 밑의 지례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경상, 전라, 강원, 경기도 각지를 돌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만났던 인물들로는 곽종석과 이학균, 그리고 유인석 등이 있다. 또한 선생은 이 즈음 영천의 유명한 의병장 정환직에게 2만 냥을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선생은 1907년 9월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선생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친일매국분자들을 소탕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또한 선생은 대한제국의 해산군인들을 다수 받아들여 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강화분견대 소속으로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봉기하여 항일전을 벌이던 연기우 의병부대를 포섭한 것과 강원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약하던 김규식 의병부대를 포섭한 것은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각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의병부대는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대일항전에 보조를 같이하였다. 선생은 이인영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하였으며, 철원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의병부대를 통하여 황해도 장단의 김수민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선생과 상의한 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부대를 통일하여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선생은 또한 연합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의병전쟁을 광무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일제 헌병의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인영 명의로 된 이 선언문의 한 부는 영국 정부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격문 외에도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도 이 때 발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