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속 외침

(오솔길통신1168호) 편작(扁鵲)의 살인/김남철

은빛강 2011. 9. 27. 04:04

 

편작(扁鵲)의 살인 / 김남철


오래전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유증으로 장 유착이 자주 와서 한참이나 고생을 했다.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니 매년 그 고통을 연례행사처럼 겪을 때였다.

병원에 가면 유착된 부분을 잘라내야 한단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유착을 불러온다니....

그로 인해 8번이나 수술을 받았다는 사람이 절대 병원에서 유착된 장 부위를 잘라내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 30년 전만 해도 장 유착에 대한 의학적인 치료법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해 여름에 또 유착이 왔다.

밤새 온 방을 뒹굴다 아침에 급히 병원에 실려 갔다.

검사를 마친 그 외과의사 당장 수술하잔다.

그러나 임시방편이란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두면 장이 상해 들어가니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겁을 준다.

거부하니 수술 말고는 치료방법이 없으니 퇴원하란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다른 환자가 영도에 가면 편작한의원이란 곳이 있는데, 용하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거기 가면 혹 치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권한다.


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그 한의원을 수소문 해보니, 사람이 너무 밀려 줄을 서 있다고 한다.

진료 받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아야 그날 진료를 받을 수 있단다.

아픈 중에도 대단한 한의라 생각되었고, 혹 유착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되었다.

다행히 처제가 그 동네 살고 있어 다음날 새벽같이 줄을 서서 빠른 번호를 받아놓았으니 시간에 맞춰 오라고 연락해왔다.


나이가 상당히 되어 보이는 무뚝뚝한 그 한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을 짚는다.

보통 병원에 가면 의사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문진부터 하는데, 이분은 그런 것 생략하고 바로 내 손의 맥을 짚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이 상해 들어가니 이 상황에서는 한방으로 치료가 불가하다고, 큰 병원에 가란다.

놀라운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을 짚어 내 장의 상태를 알아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의성(醫聖)으로 추대되고 있는 편작의 이름을 붙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의(韓醫) 들이 허준 선생과 아울러 신비한 의술을 행한 전설 속의 의자(醫者) 편작을 닮아가려 애쓰는 것 같으나 그의 의술은 아마 영원히 흉내 내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신농씨는 온갖 풀의 맛을 보고 약성(藥性)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기백(岐伯)은 황제 헌원씨의 명의로 유명한 내경을 남긴 분이다.

인류 역사상 아직 기백을 능가하는 의술의 소유자는 나오지 않은 상의(上醫)이다.

편작(扁鵲)은 앞으로 있을 병에 대한 미연 방지용 약을 사용한 중의(中醫)라 하겠다.

화타(華陀)는 삼국 시의 명의로 그의 의술은 동오의 명장 감녕의 장(腸) 수술을 하였으니 해부의 첫 기술자라 해야 하겠다.

그는 관운장의 팔에 독시(毒矢)를 파는 수술도 하였고, 조조의 뇌수술을 권하다 조(曹)의 의심을 사는 바 되어 그의 손에 죽고 만다.


이상 인물들의 약 처방을 보면 기백은 황제에게 수명을 연장하는 법을 가르쳐 장수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본 체질을 향상시킨 상의(上醫)이고,

편작은 3년 후에 발병할 것을 미리 알고 전국시대 여러 제후에게 권하여 예방약을 발병 3년 전에 투약했으니 건강유지의 약 즉 중약(中藥)을 사용한 의자(醫者)요,

화타는 병의 치료를 위주로 하였으니 하약(下藥)을 사용한 의라 하겠다.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재를 사용한 기백의 기술은 눈에 띄기 어렵다.

사전에 병의 예방약을 쓴 편작의 기술도 범인(凡人)의 눈에는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우리라.

그러나 화타의 당시 장 수술을 본 사람은 그의 묘술을 신기(神技)에다 비하였기에 “신의 화타(神醫華陀)”라 하였다.


여기에 우리는 사람들이 의자(醫者)를 보는 눈이 모자람을 깨닫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양에서는 의학이 발달 되어온 것이 아니라 퇴보되어온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양의학의 발달과정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춘추전국시대 편작은 제환공에게 약 한 첩을 지어주면서 이 약은 3년 후에 발병하는 병에 대한 예방약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건강한 상태였으니 예사로 생각하고 안 먹을 것 같아 다시 6첩을 더 지어주며 3년 후에 발병하면 1첩으로는 안 되니 7첩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3년이 지나자 발병(發病)하였는데 7첩을 먹고 나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이야기에서 편작은 미래 발병할 병을 사전에 알고 그에 대한 처방도 내었으니, 현재의 의료인으로는 편작을 능가할 자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편작이 살인을....

그가 한창 의(醫)로 명성을 떨칠 때, 그의 아들이 폐병에 걸렸다.

그 당시 폐병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병이었다.

소문이 자자한 명의가 아들의 폐병도 고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그 아들을 내 쫓아 버렸다.

몇 년 후 아들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니 어떻게 된 것인지 의자(醫者)로서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산을 헤매며 각종 열매와 나뭇잎을 따먹고 살았다는 아들의 말에 그 안에 분명히 폐병을 치료하는 식물이 있다는 확신을 얻고 밤에 잠자는 아들의 배를 갈라 위 속의 내용물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다.

그 위 속에서 오미자를 발견한 그는 오미자가 폐병 치료에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아들을 죽여 병의 치료물질을 알아낸 편작을 살인자라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