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로마에서 열린 제17회 올림픽부터 TV 중계차와 앰뷸런스가 스타디움에 등장하기 시작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때 처음으로 마라톤 선도와 보도차로 처음 무공해 전기 자동차를 사용하였고, 1984년 23회 미국 L.A. 올림픽때도 당시 매연공해 왕도로 유명했던 LA의 올림픽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 번째로 전기 자동차를 사용했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때는 마라톤 선도 및 전광판 차량, 비디오 모니터 차, 공기오염 측정 차, 구조차량을 기아자동차가 개발한 밴형 베스타 전기차를 투입 사용했다. 세계 두 번째의 자동차 탄생 -1-
* 리어엔진 자동차의 시조를 탄생시킨 광산 기술자 영국인 윌리엄 머독(William Murdck, 1754~1839)은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광산의 배수펌프용 증기엔진을 만들던 제임스 와트 엔진회사의 젊은 기술자이면서 와트의 조수였다. 머독은 1780년경 프랑스 파리로 여행 갔다가 퀴뇨가 발명한 자동차 보고 돌아와 와트 사장 몰래 자기 회사에서 만들고 있던 증기엔진을 작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미니 증기엔진을 뒷바퀴 후부엔 설치한 머독은 차체 맨 앞쪽에 긴 지주를 세우고 이 지주의 위쪽 끝에 피봇(Pivot)식으로 연결되어 뒤의 엔진 쪽으로 뻗어 나간 지렛대의 끝과 파스턴의 커네팅 로드를 연결했다. 피스턴이 상하로 작동하면 지랫대와 연결된 커네팅 로드의 바로 앞쪽에 뒷바퀴 차축과 크랭크로 연결시켜 지렛대의 상하운동을 뒷바퀴에 전달해 달리는 미니 증기차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인 퀴뇨의 증기차보다 훨씬 진보된 설계였지만, 이차 역시 사람이 탈 수 없는 원시적인 자동수레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미니 증기 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리어엔진(후부 엔진)차의 시조였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군인 퀴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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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군인 퀴노 -4-
* 추방당해 객사한 위대한 발명가
시험운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서운 기계로 보고 받은 육군대신은 기대를 버렸다. 퀴뇨는 스와슬 공작에게 한 번 만 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하자 한껏 부풀었던 포부가 물거품이 되자 퀴뇨는 커다란 실망과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미련을 떨칠 수 없어 혹시나 스폰서를 구할 수 있을 까 하고 부서진 차를 다시 고쳐 파리 시내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괴상한 수레가 증기와 불을 뿜으며 매일 돌아다니자 파리시민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녀자들이 무서워 집안으로 숨고 강아지들이 짖어 대는가 하면 말이 놀라 ‘힝힝’거리며 앞발을 들어 하늘로 치솟다가 달아나는 사건이 빈발했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드디어 파리 경찰에다가 ‘저 괴물을 단속해 달라’는 빗발 같은 항의를 했다. 결국 이 최초의 자동차는 창고에, 퀴뇨대위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1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는 불운을 맞고 말았다.
1년 후 감옥에서 풀려난 퀴뇨는 집념을 버릴 수 없어 한 대를 더 만들어 타고 다녔으나 역시 시민들과 관청의 푸대접으로 자동차는 압수당하고 퀴뇨는 국외로 추방당했다. 퀴뇨는 그 후 깊은 좌절감 속에서 유럽을 방황하다가 1804년 이 위대한 발명가는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그 후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보나파르 나폴레옹이 부르봉왕조를 밀어내고 권세를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 던 때 창고 속에 묻혀 있던 퀴뇨의 자동차를 나포래옹 군대의 한 병사가 발견해 나폴레옹에게 바쳤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 차를 다시 개발해 세계 정복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 했으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산업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완전 자동동력원인 증기엔진이 발명된 4년 후에 이 엔진을 이용한 자동차가 탄생되어 엔진과 자동차는 같은 시대 같은 맥락을 이은 셈이다. 현재 퀴뇨의 자동차는 복원되어 파리공예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초기 올림픽 종목에는 카 레이스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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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올림픽 종목에는 카 레이스도 -1-
* 여흥게임으로 전락한 초기 올림픽에 끼인 카레이스
올림픽은 1890년대 초 프랑스의 귀족 피에르 드 구배르땅이 창설했다. 이후 매4년마다 각국을 돌며 순번으로 열리는 올림픽은 스포츠를 통한 세계 최대의 지구촌 잔치로 발전했다. 흔히들 세계 3대 지구촌 스포츠 잔치로는 올림픽, 월드 컵,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를 든다.
오늘날의 자동차가 1886년에 발명되어 10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실용기로 접어들던 1896년경부터 자동차경주가 유럽과 미국에서 불같이 일어나 인간들은 스피드에 매혹됐다. 때를 같이 하여 제1회 올림픽이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다음 제2회부터 제7회까지 카 레이스가 올림픽종목으로 선택됐다. 재1회부터 7회까지는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입김이 약해 주체 국의 강권으로 올림픽 종목을 마음데로 결정했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은 만국 박람회가 열렸을 때 박람회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여흥경기로 열려 올림픽사상 최저질 게임으로 전락했다. 상품 따먹기 등 경품경기에 불과했던 제2회 올림픽 종목 중 낙시 대회, 국민 학생 경주대회, 소방 경기 이외에 자동차 경주가 끼어 있었다.
제2회 올림픽 카레이스에는 총 20대의 차가 출전하여 스타디움 트랙을 하늘이 무너질듯한 엔진 굉음과 먼지구름을 일으키면 달리는 통에 관중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특히 당시 프랑스의 입이라던 르 쁘띠 신문이 사상 최초로 취재에 자동차를 이용해 인기를 모았다. 마라톤을 시작할 때 르 쯔띠의 한 기자가 자신의 자가용인 소형 증기차 ‘드 디옹 뿌통’을 운전하여 마라톤을 따라가면 취재를 한 것이 마라톤 취재 자동차의 시작이었다.
런던의 명물 오스틴 택시 ‘블랙 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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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명물 오스틴 택시 ‘블랙 캡’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내리면 우선 빨간색의 이층버스와 상자 모양의 커다란 검은색 구닥다리 택시들이 줄이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 중에서 승객실과 칸막이로 둘러싸인 운전석에 앉은 검은 옷에 검은 모자 ․ 검은 넥타이를 맨 운전사가 모는 이 구닥다리 택시는 런던의 명물인 블랙 캡이다.
요금이 비싼 게 흠이지만 손님을 귀족처럼 모시고 승차거부나 합승 ․ 바기지 요금 없는 것이 블랙 캡의 오랜 전통이다. 또 런던에는 장애자를 위한 승강기와 편의 장치를 갖춘 블랙 캡이 세계에서 가장 많기로 유명하다.
최초로 런던에 등장한 택시도 미국처럼 전기자동차 택시였다. 런던의 전기 기술자였던 월터 버지가 1897년 여름에 전기차로 택시영업을 시작하여 그해 말에 7대 전기택시로 런던 전기 캡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월터의 전기택시는 40개나 되는 무거운 배터리와 1회충전으로 갈 수 있는 주행거리가 짧고 최고시속 16km라는 느린 속도에다가 마차 택시보다 요금이 비쌌기 때문에 손님이 없어 1900년 봄에 문을 닫고 말았다.
런던에 휘발유 자동차 택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3년이었다. 이 해에제너럴 캡 회사가 등장하면서 택시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후 계속 발전하는 휘발유 자동차의 실용성을 런던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택시에 요금을 계산하는 택시미터기까지 달려 나와 합리성을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택시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런던의 명물인 블랙 캡이 생겨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였다. 당시 런던의 택시영업을 장악했던 런던택시회사는 영국 자동차의 보수주의 전통을 이으면서 영국신사 풍조에 맞는 점잖은 스타일의 새 모델을 찾았다 때마침 중형 세단을 생산하던 오스틴(Austin)자동차가 적자 경영으로 영국정부에 의해 모리스(Morris) 자동차와 1952년 힙병할 때 오스틴에 차체를 만들어 납품하던 카 보디즈(Car bodies)라는 차체 전문 제조업체가 독립하여 xr시 전용 승용차를 만들기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곧 런던 택시는 이 회사와 손을 잡고 런던택시 전문생산업체로 만든 다음 1958년부터 지금의 블랙 캡 모델인 4기통, 2500cc 배기량에 58마력의 엔진을 얹은 리무진 타입의 오스틴 FX-4를 생산하여 런던택시를 세대바꿈했다. 처음부터 검은 색깔을 칠하고 나와 블랙(black cab)이라는 애칭으로 영국 사람들이 부르다가 80년대 이후부터는 런던 캡으로 애칭을 바꾸었고 그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런던 캡에는 다른 택시가 가지고 있지 않은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58년 이후 오늘까지 차의 모양이 변함없다는 것과, 승객이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철저하게 손님위주로 편리하게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택시면허시험에0 합격해야 블랙 캡의 운전사로 취직할 수 있다는 것과 손님을 귀족처럼 최고의 서비스로 모신다는 점이다.
미국산 올드카 천국, 쿠바 '아바나'의 이색교통문화





쿠바는 북한, 중국, 베트남과 함께 세계에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스페인, 미국의 식민 지배 이후 다른 중남미 국가들처럼 미국 자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1959년에 카스트로의 공산 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반미 국가가 됐다.
1961년 미국의 금수조치가 쿠바인들의 생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중 하나가 극심한 교통 문제다. 대중교통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바나 시가지는 관광객 등의 영향으로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도 '이동의 불편'이 금새 느껴진다. 어렵사리 올라탄 만큼 버스 안의 혼잡함도 감수해야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럴 땐 쿠바인들의 느긋함과 유머 감각을 배울 필요가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트럭 버스 속에서도 짜증내기보단 서로서로 농담을 건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쿠바 서북쪽에 위치한 수도 아바나는 인구 220만의 카리브해 최대의 항구도시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고풍스러움과 극치의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스페인이 점령한 이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높은 가치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쟁패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지만 혼란스러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바나는 전쟁과 혁명에 의해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10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자동차 수리와 재생에 도사급인 아바나인들:
올드 카를 가진 쿠바인들은 자동차 수리에도 도사 급이다. 40∼50년대의 골동퓸 자동차를 달리도록 오랫동안 유지하가 위해서는 자동차 수리와 개조기술이 필요했다. 50∼60년대 우리나라에서 미군용 폐차의 엔진과 뼈대를 사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버스를 만들던 때와 같이 손수 고치고 만들면서 각자 나름대로 오랫동안 익혀온 기술이 올드 카들의 수명을 연장 시킬 수 있었다.
과거 폐쇄정치로 부품을 수입할 수 없어 전기부품을 제외하고는 쇠만 있으면 웬만한 부속은 손수 만들어 사용한다. 최근에는 관광붐이 활개를 치자 고물차 재생공장이 성업이다. 이런 공장들은 자동차 반쪽만 있어도 차 원래의 모습 그대로 만들어 내리 만큼 손재주가 비상하다.
택시는 국영택시와 개인택시가 있다. 외국인들은 개인택시를 탈 수 없고 국영택시만 타야하는데 요금은 필히 달러로 지불하도록 돼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노년 관광객들이 50년대의 향수에 젖은 이들 미국제 올드 카들을 타보기 위해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처음에는 정부의 금지로 낮에는 탈 수 없어 밤에만 몰래 타는 올드 카 튜어가 호탤마다 인기상품으로 유행하다가 최근에는 쏠쏠한 관광수입 때문에 정부에서도 눈을 감아주고 있다는 것.
* 관광 상품으로 변신한 미국의 올드 카들
캐딜락, 뷰익, 다지 등 타보고 싶은 차를 호탤에 부탁하면 요청하는 차를 가진 소유주에게 연락 즉시 모여든다. 이렇게 적으면 4, 5대 많으면 10여대씩 카 페레이드를 만들어 아바나의 야경 드라이빙을 즐긴다. 정부는 이것만은 눈을 감아준다는 것이다. 요즘은 낮에 올드 카 타고 사진 찍기도 인기를 끈다는 것. 주간에는 원하는 올드카를 타고 드라이빙을 즐길 수 없어 시내에 서 있는 차를 찾아가서 차안에 탄체로 사진 찍는 미국 노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낮에는 합승택시로, 밤에는 미국인들의 향수가 젖은 올드카로 재미를 보자 소유자들은 적당히 짜깁기 했던 차를 원형대로 재생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이런 올드카 튜어 바람 때문에 차가 없는 아바나의 젊은이들은 가장 큰 소원이 50년대의 미국차를 한 대 갖는 것 이라고 한다.
이래서 요즘은 30~40년대의 차들 중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 버려진 폐차들도 다시 태어나는데, 차체만 원형대로 재생하고 엔진과 구동부품은 다른 것을 사용하는 튀기 올드카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50년대 전후의 미국차를 가장 많이 가진 아바나인들은 구관을 명관으로 만든 셈인데, 가난한 아바나 서민들에게는 이런 고물차 한 대는 밥을 먹여주는 제산 제1호라 가족의 건강보다 더 애지중지 보살핀다. 90년대 중엽부터 주변국이 수입한 우리 국산 승용차도 조금씩 흘러 들어가 튼튼하고 잔 고장 잘 안 나는 한국산 자동차로 인정받아 인기도 만만찮다고 한다.
1리터로 1000km 달린 벤츠 디젤차

1리터로 1000km 달린 벤츠 디젤차
1970∼1980년대에 미국, 일본, 서유럽에서 붐울 일으켰던 마일리지 마라톤 대회를 타고 벤츠 자동차도 휘발유가 아닌 디젤유 부문 최저 연료절약형 차를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제트전투기 모양의 날렵한 디자인에 가벼운 고강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1인승인 이 3륜 자동차는 디젤유 1리터로 1000km를 달려 디젤유부문에서 90년도 최고 기록을 세운 마일리지 마라톤 카다.
이 차의 최고시속은 63km였다.
최초의 자동차 세계 일주자 그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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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자동차 세계 일주 여행자 그리든
1900년대의 원시적인 자동차로 4년 동안 지구촌 39개국을 방문하여 1만 여km를 달린 자동차 여행가 자스퍼 그리든. 그는 자동차로 지구 반 바퀴여행을 한 최초의 사람이다.
미국 전화조직의 6분의 1을 장악할 만큼 전화사업의 거목으로 출세한 그리든은 오랜 꿈인 자동차 지구 일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영국에서 가장 훌륭했던 16마력 엔진의 네피어 차를 구입해 1901년 런던을 출발해 스웨덴으로 건너가 북극을 건넜다. 알라스카와 카나다, 미국 시카고를 거처 산프란시스코까지 총 6천775마일(1만840km)을 주파했다. 이것이 그리든의 첫 자동차 탐사 여행이었다.
1905년에 집으로 돌아온 그리든은 자동차 애호가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할 수 있는 ‘그리든 자동차 여행 트로피’를 창설했다.
자동차의 안전성을 테스트하는 성격을 지닌 이 대회는 1910년대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장거리 자동차 경주로서 랠리의 시작이었다. 미 대륙의 동서남북을 잇는 장거리에서 수많은 타이어를 교환해가며 안정성을 테스트하던 시절이었다.
그리든 트로피 경주는 이때부터 먼저 생겨난 경기인 반더빌트컵과 쌍벽을 이루며 미국 자동차산업 발달에 큰 자극제가 됐다. 밴더빌트 컵이 스피드 경기를 통해 미국 자동차를 개발, 존속시키는 데 있었다면 그리든 트로피는 여행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자동차의 실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자동차 여행을 생활화시키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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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공중, 물을 마음대로 누비는 만능자동차 호버 크레프트 땅과 강, 바다를 모두 달릴 수 있는 차가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기부양선으로 ‘호버 크래프트’라 부른다. 이 차의 원리는 땅이나 물에서 20cm 뜨게 한 후 프로펠러의 힘으로 달린다. 차를 땅에서 띄우는 것도 프로펠러가 담당한다. 미국인 메트 굳윈이 개발한 이 호버 크래프트는 35마력 경비행기 엔진을 얹어 프로펠러를 돌린다. 프로펠러가 만든 바람의 1/3은 호버 크래프트의 아래로 흘러 들어 차를 땅이나 물에서 20,cm 뜨게 하고, 나머지 2/3의 힘으로 뒤쪽의 공기를 박차 차를 앞으로 달리게 한다. 이 차의 최고시속은 50km. 기억에 남는 건 '성룡'이 나오는 '홍번구'인가 하는 영화에서 본 것 같다. 맥라렌의 우상 '잭 브라밤(Jack Brabham)'
자동차 역사잭 브라밤(Jack Brabham)은 1926년 4월 2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터스포츠의 팬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부터 운전을 배웠으며, 레이서가 되기 위해 15살에는 학업을 포기하고 기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1955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쿠퍼(Cooper)를 타고 F1 데뷔 경기를 갖는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59년에는 월드 챔피언쉽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 기세를 이어가 다음 해인 1960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한 팀이었던 선수로는 전설적인 레이서 '맥라렌'이 있다. 그는 잭 브라밤을 자신의 영웅으로 여겼으며 1959년에 잭 브라밤이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을 당시 미국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22세의 나이로 우승함으로써 '최연소 F1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1961년에는 쿠퍼팀에서 나와 론 토라낙크(Ron Tauranac)와 브라밤팀을 결성해 오너 및 엔지니어, 드라이버로 직접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1,500cc 엔진 시대였던 당시, 잭 브라밤은 1965년까지 7~10위를 오갔을 뿐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64년 드라이버 '댄 가니'가 브라밤팀에서 첫 승리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브라밤팀의 머신 귀국 후에도 엔진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등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며 모터스포츠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또한 자신의 세 아들은 모두 자신이 세운 '브라밤팀'에 입단하여 활약했지만 높은 성적을 기록하진 못했고, 1992년에는 팀이 문을 닫게 되어 모터스포츠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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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블럼은 `자동차 신분증`…안전위해 점점 작아져
입력: 2011-02-16 15:51 / 수정: 2011-02-16 15:51
자동차에 로고나 엠블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만들었고,어떤 이름을 가진 차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엠블럼은 일종의 신분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초창기 신분증은 예술성보다 제조사의 자동차 개발 방향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됐다.
엠블럼에 예술성이 가미된 시기는 1960년대부터다. 수많은 자동차 회사가 경쟁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미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브랜드'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자동차 구매에 영향을 미치면서 엠블럼과 로고 등도 중요한 요소로 부각됐다.
자동차 엠블럼을 보면 유독 동물을 형상화 한 게 많다. 특히 말(馬)은 페라리와 포르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동물이다.
페라리 엘블럼은 1차 대전 이탈리아 최고 파일럿이었던 '프란체스카 바라카'의 전투기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 원조다. 그의 아버지인 '엔리코 바라카'가 페라리 자동차 경주를 관람하던 중 감명을 받아 말 그림을 쓰도록 허락하면서 페라리의 상징으로 대두됐다.
이와 달리 포르쉐는 말 사육으로 유명한 독일 슈투트가르트시의 문장에서 가져왔다. 이른바 슈투트가르트를 대표하는 자동차회사 이미지를 형상화한 셈이다. 또 람보르기니는 황소를 사용하고,애스톤마틴은 풍뎅이의 한 종류인 스카라베라의 날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스카라베라는 태양신의 상징이다. 재규어는 말 그대로 재규어를 문양으로 삼고,사브는 스웨덴 남쪽 지방을 대표하는 전설의 동물 그리핀을 사용하되 사브와 스카니아를 원형으로 나타냈다.
유럽 제조사들이 동물을 문양으로 주로 삼은 데 반해 일본과 한국 등은 글자를 통해 회사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 주력했다. 일본 도요타의 경우 도요타(TOYOTA)의 앞 글자 'T'를 이미지화한 것이고,혼다(HONDA)와 현대(HYUNDAI)도 'H'를 기본 이미지로 삼았다.
사람의 이름에서 문양을 차용한 경우도 있다. GM 산하의 캐딜락은 1701년 디트로이트를 개척한 모스 캐딜락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의 엠블럼은 유명한 예술가였던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형을 엠블럼으로 사용하는 메르세데스벤츠는 다임러의 삼각형과 벤츠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삼각형 엠블럼은 고틀리프 다임러가 아내에게 엽서를 보내면서 별을 그려 넣었던 데서 유래했다.
엠블럼에선 롤스로이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회사를 창업한 찰스 롤스와 헨리 로이스의 앞 글자 'R'을 겹쳐 로고를 만들었다. 차 앞에 부착돼 있는 '날개 달린 여인'은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 찰스 사이크스가 디자인해 1911년 처음 선을 보였다. 이후 1930년 롤스로이스가 무릎 꿇은 여인상을 등장시켰는데,당시 로고를 가지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다는 얘기가 돌면서 엠블럼을 떼 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치 국내에서 대학 입시 때 명문대 입성을 위해 로고 글자를 떼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롤스로이스는 억지로 엠블렘을 뜯어내려 하면 자동으로 보닛 안에 들어가도록 설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 첨탑처럼 우뚝 솟았던 엠블럼은 1990년 이후 작아지다 지금은 보닛 위에 평면으로 부착되는 게 일반적이다. 보행자가 차와 부딪쳤을 때 뾰족한 엠블럼이 머리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 있어서다. 멋도 좋지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이른바 고급차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보닛 위의 엠블럼은 홀로그램 영상으로 늘 자동차에 따라다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권용주 오토타임즈 기자 soo4195@autotimes.co.kr
영국과 호주는 차 왼쪽으로 통행하는 이유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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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호주는 자동차가 왼쪽으로 통행하는 이유 1탄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의 자동차는 핸들이 왼쪽에 있으며 도로의 중앙선 오른쪽으로 달린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 등지의 자동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달려 있으며 왼쪽으로 달린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와 인기를 끈 ‘흑기사’, ‘원탁의 기사’, ‘벤허’ 등을 보면 통행법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은 말을 타고 결투할 때 오른손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 오른쪽으로 달려오는 적을 무찔렀다.
따라서 말은 왼쪽으로 몰아야 했다. 이 영향을 받아 중세 유럽의 마차들은 좌측통행을 하게 됐고 특히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이 관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동차도 좌측통행을 한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들여온 일본 역시 영국의 습관을 따르고 있다.
무기가 창과 말에서 총과 대포로 바뀐 뒤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공격하는 전투방법이 그대로 유지되어 오다가 18세기 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유럽정복전쟁을 일으키면서 구시대의 전법을 깨기에 이르렀다. 즉,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격을 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 전술은 보수적인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에 영향을 끼쳐 마차들까지 우측통행을 하게 됐고 자동차시대를 맞으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영국과 영연방이었던 홍콩, 호주, 뉴질랜드 등이 아직도 좌측통행을 고수하고 있다.
최초의 자동차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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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자동차 노래
1901년 미국의 올즈모빌 자동차회사는 '커브드 대시'라는 값 싸고 운전하기 쉬운 소형차를 선보여 크게 히트했다. 포드 T형이 나와 미국에 자동차붐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커브드 대시가 히트를 하자 '신나는 나의 올즈모빌을 타고(In My Merry Oldmobile)'라는 최초의 노래가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자동차 노래인 이 곡은 빈센트 P. 브라이언 작사하고 거스 에드워드가 작곡으로 올즈모빌의 첫 미국 대륙 횡단 성공을 기념하여 발표한 노래다.
100만장 이상의 악보가 팔릴 만큼 공전의 히트를 친 이 곡의 영향으로 커브드 대시는 '신나는 올즈모빌'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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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임금님 자동차
1910년 치욕적인 한일 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찌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며 자랑하고 싶었으나 자기 혼자만 타기가 미안했던지 고종의 어차도 같이 들여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겨 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을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회사에 고종의 어차를 웨슬리회사에 총독용을 각각 주문해 도입했다. 이 중에서 고종의 다임러 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돼 오다가 2005년에 문화재로 등록됐다.
한국 첫 국산자동차 시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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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국산자동차 시발의 탄생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불하받은 지프의 변속기, 차축 등 뼈대만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의 첫 국산차 `시발`을 1955년에 내놓았다.
비록 지프를 닮았지만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엔진을 얹은 첫 국산차는 부속품의 국산효율이 50%나 돼 긍지가 대단했다.
처음에는 한 대 만드는 데 4개월이 걸렸던 시발의 차량 가격은 8만환이었으나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던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인기를 끌며 뜻하지 않게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돼 대통령상을 받아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시발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공장 앞에는 시발을 서로 먼저 사가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최초의 국산차는 1963년까지 총 2000여대를 만들어 내고는 문을 닫았으나 전후 황폐했던 우리 자동차교통 재건과 자동차산업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최초의 카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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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카레이스는 프랑스 자동차공업의 개척자였던 귀족 출신인 알베르 드 디옹이 벌였다.
그는 당시 증기엔진 기술자였던 조지 부통과 손 잡고 자동차를 만들어 팔기위해 ‘드 디옹 부통’ 자동차회사를 파리에 새우고 1885년부터 소형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드 디용은 자기의 자동차를 선전하는 방법을 찾다가 자동차 경주를 열어 자기 차의 속도와 성능 그리고 편리함을 과시하려 했다.
드 디옹은 증기자동차를 가진 4명의 친구들과 1887년 파리 상제리제와 베르사이유 궁 사이 30km에서 레이스를 벌였다.
이때 드디옹은 자기가 만든 증기엔진 3륜 차로 최고시속 45km로 1등하여 파리지앵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가솔린 자동차 최초의 속도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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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자동차로 최초의 속도위반
가솔린 자동차로 최초로 속도를 위반한 사람은 바로 자동차 발명가 칼 벤츠다.
가솔린 자동차를 발명한 칼 벤츠가 1885년 10월 마을에서 주행시험을 하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괴상한 수레를 본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만하임시 반덴주의 내무 장관은 시내에서는 시속 6km, 시외에서는 시속 11km 이하로 속도를 제한했다.
그러던 어느날, 벤츠는 내무장관을 자동차 시승에 초청했다. 얼마 안가 벤츠와 미리 비밀 약속을 한 우유배달 마차가 벤츠의 차를 앞서 달렸다. 저만큼 앞서 달리던 우유배달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그런 느림보 차는 당장 갖다 버리쇼!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겠소"
우유 배달꾼에게 뒤지자 화가 난 내무장관은 옆에서 운전하는 벤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자동차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거요."
벤츠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주에서 정한 속도제한 때문에 더이상 속도를 낼 수 없다고 말했고 내무장관은 속도제한법을 해제시켰다.
최초의 사냥용 스포츠카 롤스로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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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냥용 스포츠카 롤스로이스
1911년 영국왕 조지 4세가 인도를 처음 방문할 때 인도정부는 영국의 롤스로이스 8대를 귀빈용으로 주문, 인도에 자동차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를 계기로 각 성의 태수들이 대영제국의 왕이 탔던 영광스러운 롤스로이스를 앞다투어 사들였다. 어떤 태수는 금은 장식에 시트커버를 중국산 비단으로 감싸고 차 바닥을 터키산 융단으로 깐 최고급 롤스로이스를 10여대씩 주문하기도 했다.
1925년에 인도북부 비커너성의 태수 강가는 사방 400km의 광활한 영토에서 사냥을 즐기기 위해 운전사와 사냥한 짐승 및 총을 운반하는 하인을 태울 수 있는 3인승 사냥용 롤스로이스 스포츠카를 특별 주문했다.
이 차는 세계 최초의 헌팅카로 비카너 성의 자랑거리였다. 8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128km를 냈으며 왼쪽 발판 앞에 사냥총 두 자루를 꽂을 수 있는 건 홀더가 오른쪽 발판 앞에는 공구함과 탄약상자가 비치되어 있는 오픈카였다.
어느 초가을 숲속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는 강가 태수는 사냥 코스에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냥을 방해했다고 노발대발 이들을 밧줄로 묶은 다음 차 뒤에 매달고 끌고 다녔다.
연약한 여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목숨을 잃었고, 청년은 태수의 종신 하인이 되었다. 그 이후부터 태수의 사냥차는 처녀가 죽은 곳을 지날 때마다 큰 나무나 바위에 부딪치거나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연발하여 태수는 이 차를 팔아버렸다. 그런데도 원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 차를 산 사람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10살에 운전면허 딴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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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소년 운전사
가솔린자동차가 실용성을 인정받아 보급되기 시작하던 1900년 전후 미국에는 자동차가 귀하고 비싸서 주로 돈 많은 상류층에서 장난감으로 인식되어 소년들에게 생일선물이나 기념품으로 부모들이 사 주는 풍속이 유행했다.
이런 경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당시의 자동차들은 덩치가 유모차처럼 작은데다가 아무리 빨라야 도로시속 30km 이상을 낼 수 없었고 자동차도 귀해 사고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10세 전후가 되면 당시 유행하던 조용하고 깨끗한 전기 자동차는 딸에게, 힘세고 시끄러운 가솔린 자동차는 아들에게 사주고는 넓은 정원에서 운전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자동차 메이커들도 어린이용차를, 아니면 소년 전용 자동차 메이커들도 많이 등장하여 각종 어린이용 자동차를 만들어 선전했다.
이러한 어린이 자동차 시절 세계최초의 가장 나이 어린 소년 운전사는 미국에서 나왔다. 1903년 미국 마사츄세츠주 북 에텔보로시에 살던 당년 10세 난 테론 커티스(Theron Curtis)는 아버지의 자동차를 8살 때부터 운전하기 시작하여 10살 때는 어른 뺨 칠정도로 운전솜씨가 뛰어나 여자친구나 부모를 태우고 시내를 사고 한번 안 내고 거침없이 돌아다녀 이 도시의 소년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커티스의 운전솜씨는 결국 고향 도시의 경찰서장을 감복시켜 이 해 10월 커티스에게 세계최초로 소년 운전면허증을 발급했다. 이 때는 아직 운전면허 연령제한법이 생나지 않은 때여서 어린이에게도 운전면허증 발급이 가능했다.
경찰서장은 여기에 더하여 커티스 소년에게 당시 유행하던 기마장교복 같은 운전복과 부츠, 모자까지 선사하여 그야말로 미국의 최초 최연소 운전자로 명성을 떨쳤다.
최초의 자동차 극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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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드라이브 인 시네마와 뱅크
자동차를 탄 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드라이브 인 시네마(Drive in Cinema)는 1934년 미국 뉴저지주의 칼덴시에 처음으로 생겼다.
또한 1937년 미국 LA에는 차 안에서 입출금을 할 수 있는 드리이브 인 뱅크가 나타났다.
최초로 자동차를 구매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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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산 사람
파리에 살던 벨지움의 기술자 에떠앙르 르노와르가 1865년 세계 최초로 석탄가스 엔진을 단 자동차를 1863년 2행정 엔진을 단 세바퀴 아를 발명했다.
평균시속 6km로 달리는 이 가스차의 소문을 들은 러시아 알랙산더 2세가 크게 흥미를 갖고 주문해 사간 것이 최초의 자동차 판매였다.
'여자와 노인'을 위해 탄생한 자동변속기

자동차 운전 테크닉 중에서 어려운 것이 도로의 조간에 따라 적당한 속도로 바꾸어 주는 기어변속이다.
특히 초보자나 여성 또는 노인운전자들에게 어렵고 힘 드는 매뉴얼 트랜스미션(Manual Transmission; 수동변속기) 대신 오토매틱 트랜스미션(Automatic Transmission; 자동변속기)이 나오면서 이런 수고를 덜어 주고 있다.
변속하기가 힘든 옛날의 수동변속 자동차들을 특히 연약한 여자들이나 노인들이 힘들이지 않고 쉽게 변속할 수 있는 자동차로 만들기 위해 여러 자동차기술자들이 갖가지 형태로 연구해 왔지만 완전한 자동변속기가 나올 때까지 클러치페달이 달려 있는 반자동식 변속기를 개발해 달았다.
1937년 클러치페달이 없는 완전자동식 변속기가 미국 GM의 뷰익 차에 달려 나왔으나 기능상 문제점이 남아 있어 널리 보급되지 못하다가, 1940년 GM의 올즈모빌 차에 완벽한 자동변속기를 달고 나오면서 비로소 실용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