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자동차

자동차 이야기-1

은빛강 2007. 11. 10. 01:19




리어엔진 자동차의 시조를 탄생시킨 광산 기술자-4-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2회 올림픽에서는 나치 독일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의 독무대였다. 세계를 정복하려던 히틀러의 야욕은 공교롭게도 히틀러의 선전무대가 됐다. 그는 오륜기 대신 나치기를 올리고 정치 선전용으로 최대 이용하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대회 준비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아울러 히틀러는 과거 올림픽의 모든 규칙은 물론 자동차 출입 금기라는 금기까지 깨고 스타디움에서 그의 애차인 벤츠 540k 그로서 리무진 오픈카를 타고 나치당과 독일 국민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 사열했다.


1939년 독일고속도로 아우토반 1단계 1,600km의 완공 기념으로 동지인 이탈리아의 무소리니와 이 아우토반에서 유럽의 자동차 올림픽을 구상했다. 히틀러는 이의 사전 이벤트로 독일의 벤츠와 이탈리아의 피아트 마라톤을 열자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2차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중단했다.

  1960년, 로마에서 열린 제17회 올림픽부터 TV 중계차와 앰뷸런스가 스타디움에 등장하기 시작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때 처음으로 마라톤 선도와 보도차로 처음 무공해 전기 자동차를 사용하였고, 1984년 23회 미국 L.A. 올림픽때도 당시 매연공해 왕도로 유명했던 LA의 올림픽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 번째로 전기 자동차를 사용했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때는 마라톤 선도 및 전광판 차량, 비디오 모니터 차, 공기오염 측정 차, 구조차량을 기아자동차가 개발한 밴형 베스타 전기차를 투입 사용했다.

세계 두 번째의 자동차 탄생 -1-




세계 두 번째의 자동차 탄생 -1-

  * 리어엔진 자동차의 시조를 탄생시킨 광산 기술자

세계 최초의 자동차 발명가였던 니콜라 조세프 퀴뇨의 증기 자동차는 스폰서를 찾지 못해 그 이상 발전할 수 없었지만 증기의 힘으로 수레를 달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자동차는 프랑스에서 탄생했으나 1760년대 중엽까지 계속된 프랑스와 영국, 독일간의 식민지 쟁탈전인 7년 전쟁에서 패한 후유증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고향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증기엔진의 탄생지인 이웃 영국으로 건너가 발전하게 된다.

영국인 윌리엄 머독(William Murdck, 1754~1839)은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광산의 배수펌프용 증기엔진을 만들던 제임스 와트 엔진회사의 젊은 기술자이면서 와트의 조수였다. 머독은 1780년경 프랑스 파리로 여행 갔다가 퀴뇨가 발명한 자동차 보고 돌아와 와트 사장 몰래 자기 회사에서 만들고 있던 증기엔진을 작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미니 증기엔진을 뒷바퀴 후부엔 설치한 머독은 차체 맨 앞쪽에 긴 지주를 세우고 이 지주의 위쪽 끝에 피봇(Pivot)식으로 연결되어 뒤의 엔진 쪽으로 뻗어 나간 지렛대의 끝과 파스턴의 커네팅 로드를 연결했다. 피스턴이 상하로 작동하면 지랫대와 연결된 커네팅 로드의 바로 앞쪽에 뒷바퀴 차축과 크랭크로 연결시켜 지렛대의 상하운동을 뒷바퀴에 전달해 달리는 미니 증기차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인 퀴뇨의 증기차보다 훨씬 진보된 설계였지만, 이차 역시 사람이 탈 수 없는 원시적인 자동수레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미니 증기 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리어엔진(후부 엔진)차의 시조였다.


차를 완성한 머독은 집안에서 최초의 시험운전에 성공했다. 머독은 집밖에서도 떳떳하게 시험하고 싶었지만 위험한 모험이었다. 더구나 소문이 나 와트 사장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게 뻔했다.


고심하던 어느 날 저녁 공장에서 귀가한 머독은 밤중에 사람들 몰래 길에서 시험하기로 결심하고 미니 증기차를 집 앞 길에다가 끌어냈다. 마침 집에서 1.6km떨어진 교회까지 거의 직선도로여서 주행시험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군인 퀴노 -4-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군인 퀴노 -4-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발명한 군인 퀴노 -4-

 * 추방당해 객사한 위대한 발명가 

  시험운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서운 기계로 보고 받은 육군대신은 기대를 버렸다. 퀴뇨는 스와슬 공작에게 한 번 만 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하자 한껏 부풀었던 포부가 물거품이 되자 퀴뇨는 커다란 실망과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미련을 떨칠 수 없어 혹시나 스폰서를 구할 수 있을 까 하고 부서진 차를 다시 고쳐 파리 시내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괴상한 수레가 증기와 불을 뿜으며 매일 돌아다니자 파리시민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녀자들이 무서워 집안으로 숨고 강아지들이 짖어 대는가 하면 말이 놀라 ‘힝힝’거리며 앞발을 들어 하늘로 치솟다가 달아나는 사건이 빈발했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드디어 파리 경찰에다가 ‘저 괴물을 단속해 달라’는 빗발 같은 항의를 했다. 결국 이 최초의 자동차는 창고에, 퀴뇨대위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1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는 불운을 맞고 말았다. 

 1년 후 감옥에서 풀려난 퀴뇨는 집념을 버릴 수 없어 한 대를 더 만들어 타고 다녔으나 역시 시민들과 관청의 푸대접으로 자동차는 압수당하고 퀴뇨는 국외로 추방당했다. 퀴뇨는 그 후 깊은 좌절감 속에서 유럽을 방황하다가 1804년 이 위대한 발명가는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그 후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보나파르 나폴레옹이 부르봉왕조를 밀어내고 권세를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 던 때 창고 속에 묻혀 있던 퀴뇨의 자동차를 나포래옹 군대의 한 병사가 발견해 나폴레옹에게 바쳤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 차를 다시 개발해 세계 정복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 했으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산업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완전 자동동력원인 증기엔진이 발명된 4년 후에 이 엔진을 이용한 자동차가 탄생되어 엔진과 자동차는 같은 시대 같은 맥락을 이은 셈이다. 현재 퀴뇨의 자동차는 복원되어 파리공예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초기 올림픽 종목에는 카 레이스도 -1-



초기 올림픽 종목에는 카 레이스도 -1-

* 여흥게임으로 전락한 초기 올림픽에 끼인 카레이스

  올림픽은 1890년대 초 프랑스의 귀족 피에르 드 구배르땅이 창설했다. 이후 매4년마다 각국을 돌며 순번으로 열리는 올림픽은 스포츠를 통한 세계 최대의 지구촌 잔치로 발전했다. 흔히들 세계 3대 지구촌 스포츠 잔치로는 올림픽, 월드 컵,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를 든다. 

  오늘날의 자동차가 1886년에 발명되어 10년간의 시험기를 거쳐  실용기로 접어들던 1896년경부터 자동차경주가 유럽과 미국에서 불같이 일어나 인간들은 스피드에 매혹됐다. 때를 같이 하여 제1회 올림픽이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다음 제2회부터 제7회까지 카 레이스가 올림픽종목으로 선택됐다. 재1회부터 7회까지는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입김이 약해 주체 국의 강권으로 올림픽 종목을 마음데로 결정했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은 만국 박람회가 열렸을 때 박람회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여흥경기로 열려 올림픽사상 최저질 게임으로 전락했다. 상품 따먹기 등 경품경기에 불과했던 제2회 올림픽 종목 중 낙시 대회, 국민 학생 경주대회, 소방 경기 이외에 자동차 경주가 끼어 있었다. 

 제2회 올림픽 카레이스에는 총 20대의 차가 출전하여 스타디움 트랙을 하늘이 무너질듯한 엔진 굉음과 먼지구름을 일으키면 달리는 통에 관중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특히 당시 프랑스의 입이라던 르 쁘띠 신문이 사상 최초로 취재에 자동차를 이용해 인기를 모았다. 마라톤을 시작할 때 르 쯔띠의 한 기자가 자신의 자가용인 소형 증기차 ‘드 디옹 뿌통’을 운전하여 마라톤을 따라가면 취재를 한 것이 마라톤 취재 자동차의 시작이었다.

런던의 명물 오스틴 택시 ‘블랙 캡’





런던의 명물 오스틴 택시 ‘블랙 캡’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내리면 우선 빨간색의 이층버스와 상자 모양의 커다란 검은색 구닥다리 택시들이 줄이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 중에서 승객실과 칸막이로 둘러싸인 운전석에 앉은 검은 옷에 검은 모자 ․ 검은 넥타이를 맨 운전사가 모는 이 구닥다리 택시는 런던의 명물인 블랙 캡이다.
 요금이 비싼 게 흠이지만 손님을 귀족처럼 모시고 승차거부나 합승 ․ 바기지 요금 없는 것이 블랙 캡의 오랜 전통이다. 또 런던에는 장애자를 위한 승강기와 편의 장치를 갖춘 블랙 캡이 세계에서 가장  많기로 유명하다.
 최초로 런던에 등장한 택시도 미국처럼 전기자동차 택시였다. 런던의 전기 기술자였던 월터 버지가 1897년 여름에 전기차로 택시영업을 시작하여 그해 말에 7대 전기택시로 런던 전기 캡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월터의 전기택시는 40개나 되는 무거운 배터리와 1회충전으로 갈 수 있는 주행거리가 짧고 최고시속 16km라는 느린 속도에다가 마차 택시보다 요금이 비쌌기 때문에 손님이 없어 1900년 봄에 문을 닫고 말았다.

 런던에 휘발유 자동차 택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3년이었다. 이 해에제너럴 캡 회사가 등장하면서 택시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후 계속 발전하는 휘발유 자동차의 실용성을 런던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택시에 요금을 계산하는 택시미터기까지 달려 나와 합리성을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택시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런던의 명물인 블랙 캡이 생겨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였다. 당시 런던의 택시영업을 장악했던 런던택시회사는 영국 자동차의 보수주의 전통을 이으면서 영국신사 풍조에 맞는 점잖은 스타일의 새 모델을 찾았다 때마침 중형 세단을 생산하던 오스틴(Austin)자동차가 적자 경영으로 영국정부에 의해 모리스(Morris) 자동차와 1952년 힙병할 때 오스틴에 차체를 만들어 납품하던 카 보디즈(Car bodies)라는 차체 전문 제조업체가 독립하여 xr시 전용 승용차를 만들기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곧 런던 택시는 이 회사와 손을 잡고 런던택시 전문생산업체로 만든 다음 1958년부터 지금의 블랙 캡 모델인 4기통, 2500cc 배기량에 58마력의 엔진을 얹은 리무진 타입의 오스틴 FX-4를 생산하여 런던택시를 세대바꿈했다. 처음부터 검은 색깔을 칠하고 나와 블랙(black cab)이라는 애칭으로 영국 사람들이 부르다가 80년대  이후부터는 런던 캡으로 애칭을 바꾸었고 그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런던 캡에는 다른 택시가 가지고 있지 않은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58년 이후 오늘까지 차의 모양이 변함없다는 것과, 승객이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철저하게 손님위주로 편리하게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택시면허시험에0 합격해야 블랙 캡의 운전사로 취직할 수 있다는 것과 손님을 귀족처럼 최고의 서비스로 모신다는 점이다.

미국산 올드카 천국, 쿠바 '아바나'의 이색교통문화








쿠바는 북한, 중국, 베트남과 함께 세계에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스페인, 미국의 식민 지배 이후 다른 중남미 국가들처럼 미국 자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1959년에 카스트로의 공산 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반미 국가가 됐다. 

 
1961년 미국의 금수조치가 쿠바인들의 생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중 하나가 극심한 교통 문제다. 대중교통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바나 시가지는 관광객 등의 영향으로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도 '이동의 불편'이 금새 느껴진다. 어렵사리 올라탄 만큼  버스 안의 혼잡함도 감수해야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럴 땐 쿠바인들의 느긋함과 유머 감각을 배울 필요가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트럭 버스 속에서도 짜증내기보단 서로서로 농담을 건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쿠바 서북쪽에 위치한 수도 아바나는 인구 220만의 카리브해 최대의 항구도시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고풍스러움과 극치의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스페인이 점령한 이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높은 가치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쟁패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지만 혼란스러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바나는 전쟁과 혁명에 의해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10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자동차 수리와 재생에 도사급인 아바나인들:

올드 카를 가진 쿠바인들은 자동차 수리에도 도사 급이다. 40∼50년대의 골동퓸 자동차를 달리도록 오랫동안 유지하가 위해서는 자동차 수리와 개조기술이 필요했다. 50∼60년대 우리나라에서 미군용 폐차의 엔진과 뼈대를 사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버스를 만들던 때와 같이 손수 고치고 만들면서 각자 나름대로 오랫동안 익혀온 기술이 올드 카들의 수명을 연장 시킬 수 있었다.

과거 폐쇄정치로 부품을 수입할 수 없어 전기부품을 제외하고는  쇠만 있으면 웬만한 부속은 손수 만들어 사용한다. 최근에는 관광붐이 활개를 치자 고물차 재생공장이 성업이다. 이런 공장들은 자동차 반쪽만 있어도 차 원래의 모습 그대로 만들어 내리 만큼 손재주가 비상하다.

 
택시는 국영택시와 개인택시가 있다. 외국인들은 개인택시를 탈 수 없고 국영택시만 타야하는데 요금은 필히 달러로 지불하도록 돼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노년 관광객들이 50년대의 향수에 젖은 이들 미국제 올드 카들을 타보기 위해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처음에는 정부의 금지로 낮에는 탈 수 없어 밤에만 몰래 타는 올드 카 튜어가 호탤마다 인기상품으로 유행하다가 최근에는 쏠쏠한 관광수입 때문에 정부에서도 눈을 감아주고 있다는 것.

 


* 관광 상품으로 변신한 미국의 올드 카들

캐딜락, 뷰익, 다지 등 타보고 싶은 차를 호탤에 부탁하면 요청하는 차를 가진 소유주에게  연락 즉시 모여든다. 이렇게 적으면 4, 5대 많으면 10여대씩 카 페레이드를 만들어 아바나의 야경 드라이빙을 즐긴다. 정부는 이것만은 눈을 감아준다는 것이다. 요즘은 낮에 올드 카 타고 사진 찍기도 인기를 끈다는 것. 주간에는 원하는 올드카를 타고 드라이빙을 즐길 수 없어 시내에 서 있는 차를 찾아가서 차안에 탄체로 사진 찍는 미국 노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낮에는 합승택시로, 밤에는 미국인들의 향수가 젖은 올드카로 재미를 보자 소유자들은 적당히 짜깁기 했던 차를 원형대로 재생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이런 올드카 튜어 바람 때문에 차가 없는 아바나의 젊은이들은 가장 큰 소원이 50년대의 미국차를 한 대 갖는 것 이라고 한다.

 
이래서 요즘은 30~40년대의 차들 중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 버려진 폐차들도 다시 태어나는데, 차체만 원형대로 재생하고 엔진과 구동부품은 다른 것을 사용하는 튀기 올드카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50년대 전후의 미국차를 가장 많이 가진 아바나인들은 구관을 명관으로 만든 셈인데, 가난한 아바나 서민들에게는 이런 고물차 한 대는 밥을 먹여주는 제산 제1호라 가족의 건강보다 더 애지중지 보살핀다. 90년대 중엽부터 주변국이 수입한 우리 국산 승용차도 조금씩 흘러 들어가 튼튼하고 잔 고장 잘 안 나는 한국산 자동차로 인정받아 인기도 만만찮다고 한다.

1리터로 1000km 달린 벤츠 디젤차



1리터로 1000km 달린 벤츠 디젤차

1970∼1980년대에 미국, 일본, 서유럽에서 붐울 일으켰던 마일리지 마라톤 대회를 타고 벤츠 자동차도 휘발유가 아닌 디젤유 부문 최저 연료절약형 차를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제트전투기 모양의 날렵한 디자인에 가벼운 고강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1인승인 이 3륜 자동차는 디젤유 1리터로 1000km를 달려 디젤유부문에서 90년도 최고 기록을 세운 마일리지 마라톤 카다.

이 차의 최고시속은 63km였다. 

 최초의 자동차 세계 일주자 그리든





최초의 자동차 세계 일주 여행자  그리든

1900년대의 원시적인 자동차로 4년 동안 지구촌 39개국을 방문하여 1만 여km를 달린 자동차 여행가 자스퍼 그리든. 그는 자동차로 지구 반 바퀴여행을 한 최초의 사람이다.

미국 전화조직의 6분의 1을 장악할 만큼 전화사업의 거목으로 출세한 그리든은 오랜 꿈인 자동차 지구 일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영국에서 가장 훌륭했던 16마력 엔진의 네피어 차를 구입해 1901년 런던을 출발해 스웨덴으로 건너가 북극을 건넜다. 알라스카와 카나다, 미국 시카고를 거처 산프란시스코까지 총 6천775마일(1만840km)을 주파했다. 이것이 그리든의 첫 자동차 탐사 여행이었다.

1905년에 집으로 돌아온 그리든은  자동차 애호가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할 수 있는 ‘그리든 자동차 여행 트로피’를 창설했다.


자동차의 안전성을 테스트하는 성격을 지닌 이 대회는 1910년대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장거리 자동차 경주로서 랠리의 시작이었다. 미 대륙의 동서남북을 잇는 장거리에서 수많은 타이어를 교환해가며 안정성을 테스트하던 시절이었다.

그리든 트로피 경주는 이때부터 먼저 생겨난 경기인 반더빌트컵과 쌍벽을 이루며 미국 자동차산업 발달에 큰 자극제가 됐다. 밴더빌트 컵이 스피드 경기를 통해 미국 자동차를 개발, 존속시키는 데 있었다면 그리든 트로피는 여행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자동차의 실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자동차 여행을 생활화시키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만능자동차 호버 크레프트

땅, 공중, 물을 마음대로 누비는 만능자동차 호버 크레프트

땅과 강, 바다를 모두 달릴 수 있는 차가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공기부양선으로 ‘호버 크래프트’라 부른다.

이 차의 원리는 땅이나 물에서 20cm 뜨게 한 후 프로펠러의 힘으로 달린다. 차를 땅에서 띄우는 것도 프로펠러가 담당한다.

미국인 메트 굳윈이 개발한 이 호버 크래프트는 35마력 경비행기 엔진을 얹어 프로펠러를 돌린다.

프로펠러가 만든 바람의 1/3은 호버 크래프트의 아래로 흘러 들어 차를 땅이나 물에서 20,cm 뜨게 하고, 나머지 2/3의 힘으로 뒤쪽의 공기를 박차 차를 앞으로 달리게 한다. 이 차의 최고시속은 50km.

기억에 남는 건 '성룡'이 나오는 '홍번구'인가 하는 영화에서 본 것 같다. 

맥라렌의 우상 '잭 브라밤(Jack Brabham)'

자동차 역사

잭 브라밤(Jack Brabham)은 1926년 4월 2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터스포츠의 팬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부터 운전을 배웠으며, 레이서가 되기 위해 15살에는 학업을 포기하고 기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1955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쿠퍼(Cooper)를 타고 F1 데뷔 경기를 갖는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59년에는 월드 챔피언쉽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 기세를 이어가 다음 해인 1960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한 팀이었던 선수로는 전설적인 레이서 '맥라렌'이 있다. 그는 잭 브라밤을 자신의 영웅으로 여겼으며 1959년에 잭 브라밤이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을 당시 미국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22세의 나이로 우승함으로써 '최연소 F1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1961년에는 쿠퍼팀에서 나와 론 토라낙크(Ron Tauranac)와 브라밤팀을 결성해 오너 및 엔지니어, 드라이버로 직접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1,500cc 엔진 시대였던 당시, 잭 브라밤은 1965년까지 7~10위를 오갔을 뿐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64년 드라이버 '댄 가니'가 브라밤팀에서 첫 승리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이후 1966년 F1 엔진 규정이 3,000cc로 상향 조정되면서 브라밤은 오스트레일리아 렙코(Repco) V8 엔진을 탑재한 머신을 제작하게 된다. 이 머신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에서 따와 '브라밤'이라고 명명했으며 그해 열린 월드 챔피언십에 참전해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게 된다. 본인으로써는 3번째 월드 챔피언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한 머신을 타고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7년에는 본인은 2위를 기록했지만 팀 메이트인 데니스가 챔피언에 올라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1968년에는 24위로 밀려나고 다음해 부상을 계기로 은퇴를 고려하게 된다. 이후 1970년 시즌을 5위로 마감한 후 팀을 토라낙크에 매각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귀국한다.

 브라밤팀의 머신

귀국 후에도 엔진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등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며 모터스포츠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또한 자신의 세 아들은 모두 자신이 세운 '브라밤팀'에 입단하여 활약했지만 높은 성적을 기록하진 못했고, 1992년에는 팀이 문을 닫게 되어 모터스포츠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입력: 2011-02-16 15:51 / 수정: 2011-02-1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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