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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정사(正史)의 대중화와 조선왕조의 장인(匠人)

은빛강 2010. 4. 10. 08:29

신봉승 작가-정사(正史)의 대중화와 조선왕조의 장인(匠人)

[《아시아문예》2009년 겨울호 특집 대담]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나의 감시자였고, 나는 그 역사의 섭리 안에서 살아왔지요. 역사와 벗하며 살아온 지난 40년은 나의

▲ 신봉승 작가
존재이유인 사극을 쓰기 위한 지적 몸부림의 세월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거인이신 신봉승 작가의 지론이다.

지난 9월 11일 오전 8시, 강릉시 경포동 속칭 핸다리 마을 현지에서 거행된 권혁승(76) 씨의 고향과 모정에 대한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사모정(思母亭)> 준공 및 헌정식에서 축사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준, 한국예술원 회원으로 문단의 원로이신 신봉승(관동문학회 명예회장) 작가와 자리를 함께 하였다. 

초당의 <동아가든>에서 ‘항시 선생님 자신이 자신의 핏줄과 같다’고 지적하는 관동문학회(심재교 회장을 비롯하여 조영수, 김찬윤, 박성규, 이구재, 김인기, 이복재 등) 회원들과 정겨운 아침식사를 마친 후, 푸른 역파(逆波)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정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포현대호텔의 한식당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모처럼 나누게 되었다. 1년 중 130여 차례의 특강과 강의로 시간에 쫓기는 선생님의 일상이라 이날도 예외는 아니지만 전날인 10일 오전에 법제처 특강을 마친 직후, 오후에 직접 운전을 하여 강릉에 오신 선생님의 건강이 내심 우려 되었지만 크게 피로를 느끼지 않으시는 밝은 표정이어서 대담자의 심사는 비교적 편한 상태였다. 

엄창섭(계간《아시아문예》주간) : 사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 큰 스승이신 신봉승 선생님께서는, 줄곧 자신의 신념으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고 역설해 오시면서 오로지 이 땅의 정사(正史)의 대중화(大衆化)에 앞장서 오셨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오늘이 있기까지 문학에 가르침을 주신 스승으로는 어떤 분이 계시는지요? 아울러 문단에 몸담아 오신 오랜 날, 문학발전을 위해서 함께 고뇌하면서도 각별히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교유하신 선후배 문인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봉승 : 우리의 소중한 삶에 있어 좋은 스승과 선배, 그리고 동료와의 만남은 필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게는 세 가지 충족이라 할까? 행운처럼 문학의 길을 걷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현실적 문제와 직면할 때마다 운명처럼 산모롱이를 휘돌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좋은 스승과 선배와 친구들이 함께 어려움을 감내하며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큰 힘이 되었지요. 지금도 항시 감사하고 존경하는 스승에는 한국문단의 큰 어른이셨던 황금찬, 최인희, 황순원, 조병화 선생님이, 그리고 정말 좋은 문단의 선배로는 차범석, 이근삼, 한운사,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문학의 길을 걸으며 격려와 힘이 되어준 절친한 문단의 동력자로는 강민, 구인환, 이성교, 윤병로 등을 거론할 수 있어요.  

엄창섭 : 선생님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시는 글에서 “나는 1933년 5월 23일,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 현내리에서 중농의 집안에서 종손(宗孫)으로 태어났다. 나직한 산자락이 흘러내리다가 멈춘 곳에 울창한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남향받이 기와집에서였다. 유학을 숭상하시던 할아버지에게는 무척도 귀한 존재여서 아랫도리도 감추지 않았던 네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고 다녔다니 소작인들은 또 얼마나 떠받들었을까?”라고 기술하셨는데, 다시 한 번 유년시절의 성장 환경과 특히 창작활동 중 기억 흔적에 담아두신 일화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봉승 : 먼저 저 자신이 교육학자는 아니지만, 사람의 성장에 있어 가정환경 가끔 저는 문화 환경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문화 환경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농 정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당시의 사정을 되뇌어 볼 때 비교적 문화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등학교 시절 손쉽게 접하고 읽을 말한 것이라고는 고작 교과서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절친한 친구들 중에는 놀랍게도 유치원 시절에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었거나, 심지어 중학교 2학년 때 백석의 시를 읽었다는 이들이 있어요. 사실 저는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하였으니까 어떤 점에서는 문학하고 무관한 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에 8쪽 짜리 그림을 펴놓고 스토리텔링을 즐겨 이끈 어린 시절의 나의 경험을 되살려 볼 때, 동갑 내기의 반 친구들에게 들려줄 새로운 스토리를 끙끙 거리며 계획했던 종이 연극 활동은 힘겨운 작가적 도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고교 2학년 시절, 강릉농업고등학교에서 강릉사범학교로 전학을 하였는데, 바로 사범학교에 작고하신 최인희 선생님과 지금도 건재하신 황금찬 선생님이 계셨어요. 

특히 시인이셨던 황금찬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을 많이 소개해 주셨어요. 실존주의 문학에 관한 책은 물론,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같은 서양문학을 정독하도록 권고하셨어요. 또 당시 황금찬 선생님은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으셔서 “드보르작의 신세계 2악장을 모르면서 무슨 시를 쓰느냐?”고 종종 책망도 하셨지요, 당시는 SP 레코드 시대라 심포니 한 곡이 레코드 7장이었어요. 앞뒤로 14번 들어야 하는데 ‘2악장이 어디에 있는지, Going Home’이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바로 그 같은 시절이 저로 하여금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고, 시의 개념이나 시창작(詩創作) 행위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당시의 저였지만, 다행히 두 분의 첨삭지도를 받으면서 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게 되어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지요.

▲ 신봉승 작가(우)와 엄창섭《아시아문예》주간(좌)

엄창섭 : 극작가와 시나리오 작가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선생님은, 이미 1957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청마(유치환)에 의해 시 <이슬>로 추천을 받으셨고, 또 1960년에는 문학평론으로도 등단을 하였는데, 이후 다양한 문학 장르에 종사하신 선생님의 문학사적 족적(足跡)에 관해서도 조금 더 입장을 정리하여 주세요.

신봉승 : 아, 그래요. 강릉사범학교 졸업 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1957년에는 당시 경주고등학교 교장이던 청마 유치환 시인에 의해 12월호『현대문학』 지에 시 <이슬>로 초회 추천을 받았어요. 마침내 공식적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셈이지요. 그러던 차에 「현대문학」의 주간인 조연현 교수의 추천에 힘입어 1960년에는 평론으로도 등단을 하였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 자신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중요한 결단을 할밖에 없었어요. 그 같은 상황에서도 제 자신이 시와 시나리오 사이에는 이미지가 있다는 유사점을 접하고 영상예술과 멀티미디어 시대가 장차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나리오를 써야한다 판단하고 마침내 결단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줄창 3년간 응모하였으나 낙방을 하게 되었고, 상심하던 중에 운명적으로 국방부에 현상 응모한 시나리오 <두고 온 산하>(1961)가 당선되었고 300만환의 상금을 타면서 영화계로 전향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내게 있어 시의 형상화는 평생 작업인 반면, 시나리오 작업은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자신도 오늘날까지 문제작으로 거론하는 각색 시나리오 <갯마을>(1965)은, 1960년대에 만연한 우리 영화의 “청춘물 시대”에서 “문예영화 시대”로 변전되는 전기적 계기를 만들었기에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엄창섭 : 그간에 선생님은 애착이 가는 사극 작품으로는 1995년에 KBS-TV를 통해 방영됐던 <찬란한 여명(이녹영 연출)>을 종종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작가 신봉승하면 식자층에서는 “걸어 다니는 조선왕조 오백년”이라고 지칭하는데,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 관해서도 한 마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신봉승 : 그래요. 일단, 본격적인 역사극 시나리오로 1982년에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된 <풍운(황은진 연출)>으로 서막을 열었어요. 당시 지천명에 이른 내게 있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바로 이 도전은 「조선왕조실록」의 정복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도 있어요. 물론 내 자신이 방대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한 국내 유일의 작가라는 자긍심은 대단하였지만, 드라마 집필에 한 때나마 비애를 절감하기도 하였어요. 그러나 역사인식의 문제를 재발견하면서 순수한 학문의 연구보다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데 매력을 지니게 되었어요. 그러다 마침내 ‘조선 근대화의 불꽃’을 눈부시게 꽃 피운 지식인들이 바로 중인 출신의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을 한 시대의 주역인 새로운 지적 인물로 형상화 시킨 <찬란한 여명>을 어렵게 탈고하게 되었지요. 같은 맥락에서 역사소설 <이동인의 나라(전3권)> 출간은 바로 그 같은 예증입니다. 반복되는 점이 없지 않지만, 우리의 역사소설에는 국가의 정체성을 매개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문학작품을  참으로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저는 오랜 날, 이 땅의 청소년들이 역사소설을 읽으면서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꿈을 키워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 관점에서 <이동인의 나라>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한 까닭에 학계로부터 “비어 있는 근대사의 복원이라”는 과찬을 받았기에 못내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느꼈어요.  

한편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쓰면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일은 당시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國譯)되지 않았던 때라 한문으로 된 원전을 완독한다는 그 고통의 감내는 정말 힘겨웠을 뿐 아니라, 초서(草書)로 된 문건을 만나는 날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도 비일비재였지요. 다소 암담했던 당시를 회고하면 그 같은 어려운 시간대는 진솔한 고백이자 아름다운 회상에 해당하지요. 참으로 역사인식의 빈곤 속에서 역사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정립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파악하는 정신작업의 교훈이라면  ‘역사는 행간을 읽으라.’는 가르침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자신의 창작 체험을 통해서 얻은 큰 깨우침이란, “역사를 관장하는 신(神)이 있다는 역사인식에 의한 파사현정(破邪顯正),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진리를 지키면서 흘러간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엄창섭 : 강직한 성품의 선생님께서는 평생의 집필과 창작 활동을 통해 ‘서슬 푸른 역사인식의 소중함과 국가의 정체성’을 역설해 오셨는데 오랜 날의 체험에 비추어 나름대로 ‘좋은 사극을 위한 조건’에 관한 선생님의 작가 정신이랄까? 또는 신조에 관해서도 피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봉승 : 일단, 작가 정신이란 국가 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지적하고 싶어요. 저는 삶의 일상에서 이 땅의 많은 공직자 앞에서 ‘조국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1/3을 헌신하라’고 역설하여 왔어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항시 기여하고 봉사한다는 역사인식을 지녀야 함은 지식인의 시대적 소임이지만, 문인의 기본 여건으로는 국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의 방편으로 ‘모국어의 탁마(좋은 어휘, 문장의 구조)’에 열중하라는 것을 경고하고 싶어요. 특히 TV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에서 검색되는 비어(卑語)의 무분별한 사용은 금기 사항이지요. 저는 문인에게 주어진 첫 번째 덕목은 모국어를 탁마(琢磨)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모국어를 갈고 다듬는 것은 응당 문인들의 책무일뿐더러 그래야 국어가 아름다워지지요. 

사실 방화(邦畵)를 보면 음담패설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적어도 영화를 예술로 의식한다면 당연히 삼가야 합니다. 텔레비전의 드라마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은 안 썼으면 싶어요. 텔레비전은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까닭에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품격 있는 우리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작가 스스로 저급한 말을 쓰면서 자기의 분신인 작품에 비속어를 남발하는 것은 인격에 대한 모독이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지요. 국어를 사랑하지 않는 작가는 정말 붓을 꺾어야 해요. 작가는 반드시 독자를 의식하여야 할 뿐더러 모범의 길(正道)을 걸어야 하기에 내 자신의 작가적 양심이랄까? 신조라면 “욕설은 내 문학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엄연히 결부되는 점이지요. 아울러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이 시대의 작가들에게 소양이 부족한 현상은 실로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그나마 청소년들에게 국가의 새로운 인식과 역사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일깨워 줄 것만은 결단코 기대하고 싶어요. 
 
엄창섭 : 지난 2009년 2월 27일 서울신문의 인터뷰에서도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사극의 임무임”을 강조하셨는데, 정통 역사물을 애써 강조하는 점에 있어 선생님의 ‘의지의 표명’이랄까? 생각의 일면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봉승 : 그래요. 역사의식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작가와 사회, 작가와 국가, 작가의 정체성을 작가가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소양 즉, 양식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저의 경우는 냉철할 정도로 사극이든 역사소설이든 철저한 독서와 고증을 통한 정통 역사물의 보편성이 사극의 역할·분담이라고 강조하는 편이지요. 그 하나의 실례로 근자에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된 <임금님의 첫사랑>은 강화도령인 철종을 더 이상 바보 도령이 아닌 사뭇 똑똑한, 갈등하는 임금으로 형상화한 점이지요.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암(心庵) 조두순이 철종 행장기에서 ‘성군의 자질이 보였다.’라는 대목을 참고하면서 극적 재미도 가중시켜 보았어요. 저는 사극이든 역사소설이든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것은 대중에게 역사의식을 불어 넣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것이 역사작가의 몫이며 역할 분담이니까요. 

그 같은 맥락에서 일본이 시바료타로 같은 역사소설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는 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확고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심어줬어요. <료마가 간다>라는 그의 소설 한 권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결코 아닐 거예요. 그가 소설을 통해 부각시킨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요. 우리에게도 그런 의식 있는 역사작가가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내 자신의 소박한 독백이라면, 인생의 뒤안길에서 지난날을 뒤돌아 볼 때, 누군가의 등불이 되어 주었던 기쁨과 나에게 등불이 되어 주었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하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다고 확신하며 살아왔어요. 그래서 최근에 간행한 삶의 문신(文身)과 같은 <청사초롱에 불 밝히고>는 희수(喜壽)를 맞이하면서 교유했던 친구들과 나눈 진솔한 삶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을 있게 한 스승들 또 선배들과의 교감을 가슴 따뜻하게 엮어본 사연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엄창섭 : 선생님은 한국예술원 회원이시며 한국문단의 원로이신데도 왕성한 작품 및 집필활동을 하고 계신데, 다시 한 번 작가의 시대적 소임과 특히 지역에 몸담고 있는 이 시대의 후배 문인들에게 들려주실 각별한 당부가 계시다면 차제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봉승 : 거창한 답변은 아니더라도 어디까지나 검증된 공인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들의 생산적인 정신활동은 사회의 공기로서 시대적 역할의 엄숙한 수행, 투지를 지니고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되 절박한 결의로 소중한 시간을 도전적으로 투자하라고 요청하고 싶어요.

엄창섭 : 근간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문단의 우려에 제 자신도 다소 신경이 쓰이지만, 모쪼록 이 땅의 많은 문인들에게 천년 생명의 큰 나무로, 또는 피곤에 지친 등을 스스럼없이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으로의 영원한 멘토(MENTOR)로서의 역할을 하여 주실 것을 거듭 강청하면서, 좋은 말씀 들려주심에 그저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 신봉승(辛奉承) 약력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역사의 대하(大河)에 빠져 평생을 살아오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초당(草堂) 선생의 약력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933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릉사범·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대종상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한국방송대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 ▲저서:「조선왕조 5백년」,「한명회」,「왕건」,「이동인의 나라」등 소설과 「직언」,「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조선의 마음」, 「청사초롱에 불 밝히고」등 역사에세이 외 다수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예술대 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 한국역사문학연구소장 등.

[대담정리 : 이진모(《아시아문예》편집위원) / 일시 : 2009. 9. 11. (금) 10:00 / 장소 : 경포대현대호텔 레스토랑 ‘해금강’]

[계간《아시아문예》2009년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