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문학인의 방

신경림 시인

은빛강 2010. 4. 10. 16:39

신경림 시인


신경림 시인

△충북 충주 출생(1935)
△동국대 영문과 졸업
△《문학예술》등단(1956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예총 공동상임위원장 역임
△동국대 석좌교수
△시집『농무』,『쓰러진 자의 꿈』,『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외 다수
△스웨덴 시카다상과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문학부문),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오늘의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신경림]

독자들로부터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시들이 너무 많다는 불평을 자주 듣는다. 또 젊은 시인들의 시가 서로 비슷비슷하다는 불평을 듣기도 한

▲ 신경림 시인
다.

한 평론가는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시”라고 폄훼하고 “이 사람이 저 사람 따라 하고 저 사람이 이 사람 따라 한다.”고 혹평한 바 있지만, 이 두 서로 다른 불평의 내용은 어찌 보면 뿌리가 같다.

앞의 경우 좋게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오늘의 정신세계를 표현하자니까 부득이 그런 결과로 나타난 것일 테고 험담을 하자면 말장난이 지나쳐 그런 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뒤의 경우 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결과니까 말이다. 어쨌든 요즈음 시가 읽기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다.

대체로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너무 시를 만드는 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가 씌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이란 개념이 생긴 것은 이미 백 년이 넘은 일이다. 하지만 이 만든다는 것이 아무런 시적 영감이 없는데도 억지로 앞뒤를 짜맞추어 시를 만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그 나름의 당위도 있고, 또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일 터이다. 이 자연스러움이 없을 때 시는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재미없는 시가 된다는 소리요 자칫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말을 중언부언하게 된다는 소리인데, 독자들의 이 두 불평이 다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이 책임의 상당 부분이 그릇된 시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중고교의 시 교육부터가 그렇다. 제도적으로 학생들에게 시를 시로 읽게 가르치게 되어 있지 않은 점이 문제다. 시란 총체적으로 읽어야 제맛이 나는 법인데, 저명한 교수의 이론서에 의지해서 가닥가닥 작살을 내어 알레고리가 어떻고 노마디즘이 어떻고 상징이 어떻고 하다 보니 정작 시는 본체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수능시험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변명에는 할 말이 없고 전반적인 교육문제로 담론이 커질 수밖에 없겠지만, 여기에는 수능시험 문제의 모범이 되고 있는 이른바 저명교수들의 상투적 상식적 시 해설 또는 시 분석도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거기 바탕해서 가르치는 시를 배운 학생들이 시를 재미있고 곰곰이 읽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렇게라도 시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 시를 읽힐 기회는 더욱 줄어들 것이요 또 저명교수들의 해설이나 분석에 따르지 않는다면 수능시험 제일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니까 이런 시교육이 어쩔 수 없다는 일선 교사들의 변명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이렇게 시를 배운 청소년들이 읽고 쓰는 시가 정말로 바람직한 시가 될 수는 없을 터이다.

대학의 시 교육은 더 문제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겪은 경우 일차적인 표현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학생들은 학점을 따야 하니 억지로라도 시를 쓸 수밖에 없고, 선생은 가르칠 의무가 있으니 억지로 시를 쓰게 한다. 이 과정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게 표현의 기술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배운 학생이 시인이 되어 시는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 아래 자연스럽지 못한 억지 시를 쓰게 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말장난에 빠져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시, 내가 너를 닮고 네가 나를 닮은 개성 없는 시를 만들면서 이것이 시의 전부라고 안다. 어려서 어느 저명한 외국 시인의 시인학교 얘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그가 만든 시인학교에서 시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시만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채소를 키우는 법도 가르치고 나무 기르는 법도 가르치고 물고기 잡는 법도 가르쳤다. 시란 인생을 폭넓게 이해하고 곰곰이 들여다보는 데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란 골방에 들어앉아 시만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의 지론에서 나는 이런 뉘앙스를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내 생각도 같다.

비록 그와 같이는 못할망정 대학의 시 교육에서 적어도 시를 곰곰이 읽는 습관만은 길러 줘야 할 것이다. 곰곰이 읽지 않고는 좋은 시를 찾아내지 못한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경험으로 얻은 진실이다. 젊은이들을 대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젊은이들이 너무 좋은 시를 읽는 눈이 없어 좋은 시를 찾아 읽지 못하고 결국 좋은 시를 쓸 동력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바로 대학의 시 교육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은가 싶다.

시문학 사상 정말 좋은 시를 찾으려는 노력은 포기한 채 당장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킬 동시대의 문제작만을 중심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만, 마침내 서로 비슷비슷한 닮은꼴의 시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시, 서로 비슷비슷한 시가 결국 모두 잘못된 대학의 문예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나는 요즈음 시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 자유분방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구사와 세련된 표현에 무릎을 칠 때도 많다. 우리 시가 참으로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우리 1940, 50년대의 시와 비교해도 그렇지만, 성장이 멈춰 있는 북한의 동시대의 시와 비교해 읽을 때(이데올로기의 반생명성은 제외하고) 그 점은 더욱 뚜렷하다.

더욱이 언어구사나 표현의 세련은 눈부실 정도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경우 읽고 나면 한 점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 현란한 언어와 표현이 오늘의 우리 삶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을까 의문이 들어서이다. 삶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언어가 그 시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진실한 언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진실한 언어의 시만이 가장 훌륭한 것이 되고 오랫동안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가령 두보(杜甫)의 시가 그 시대의 삶을 담아낸 진실한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1,300년이 지난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등으로 대표되는 삼리삼별(三吏三別)을 시문학 사상 가장 빼어난 사회적 상상력의 시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의 시는 사생활의 기록이면서도 그 시대의 기록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삶을 그의 언어 속에 치열하게 수용한 결과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세월이 지난만큼 시에 대한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연과학이 아닌 시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일 수는 없을 것이다.

《논어(論語)》의 〈양화(陽貨)〉 편에 보면 시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물으며 시의 기능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가이흥(可以興)’과 ‘가이군(可以群)’이다. 조금 변형시켜 해석한다면 ‘가이흥’은 시가 삶을 활기 있게 만들어준다는 뜻일 터이며 ‘가이군’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불어 살게 한다는 뜻일 터로, 시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아포리즘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내가 요즘의 우리 시를 읽으면서 그 세련됨과 눈부심에도 불구하고 한 점 아쉬움을 느낀다면 바로 이런 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리라. 물론 나는 오늘의 우리 시가 1970, 80년대의 참여시, 체제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시대로 회귀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또 그것이 시의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시가 삶의 현실 혹은 현장에서 너무 동떨어질 때 그 시의 언어가 공허해지며 시는 활기를 잃고, 일부 난해시는 여기에 젖줄을 대고 있는 측면도 부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시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서로 비슷비슷하다는 불평에 대한 대답을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에서만 찾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T.S. 엘리엇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시는 죽음과 똑같이 모르는 사이 우리를 엄습한다.
 쉿! 시와 죽음은 의미의 틈새의 침묵에 의해서 잉태되는 것
 비로소 꽃이 피고 고기가 헤엄치고 짐승이 어슬렁대고 사람들은 진정된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T.S. 엘리엇 〈시를 쓰는 법〉 끝 연

■ 신경림
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격월간《유심》2010년 3/4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