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승하 시인님 방

[스크랩] 시는 묘사이어야 하나 진술이어야 하나 /이승하

은빛강 2010. 4. 10. 18:55

 시는 묘사여야 하나 진술이어야 하나

                      이승하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가 구체적인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자유시로 일컬어지는 주요한의 [불놀이]는 저녁노을에 대한 묘사가 잘 된
시입니다만 죽은 연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기에 서사적인
구조, 즉 이야기성을 지닌 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근대시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는 [불놀이]부터 시가 묘사인지 진술인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이야기시의 대가는 백석이며, 80년대에 백석의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이
야기시론을 전개한 시인은 [대꽃]과 [성에꽃]을 낸 최두석입니다.  80년대
에 이른바 ‘민중시인’으로 불려진 이들은 거의 다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
사보다는 이야기성을 강조한 시를 썼습니다. 최근에 나온 김진완의 시집
[기찬 딸](천년의 시작)을 보고 이야기시의 전통이 훌륭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묘사와 진술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볼까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전문

  유치환의 이 작품은 바위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대신 단단하고 비정한
바위의 본질을 잘 파악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이야기시
가 아니라 묘사의 시입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줄거리가 있는 법인데 이 시
는 나의 희망과 결심을 피력한 관념 편향의 시입니다.  시인은 단단하고 비
정한 바위의 본질을 생각하고는 바위를 본받고 싶어하지요.  또한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안타까워하면서 삶의 가치를 바위처럼 견고하게 추구하겠
노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묘사의 효과는 시인이 사물을 얼마나 구
체적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구체적인 묘사’란 존재와 깊은 관
련을 맺고 있는데, 존재란 것은 인식의 문제로 연결되지요. 전통이나 관습
의 힘 보다는 사물이나 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림으로써 시가 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사물 혹은 대상에 대한 적절
한 묘사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술, 즉 이야기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왜 하는 것입니까? 내 주장을 펴기 위하여, 결국은 내가
무엇을 주장하여 타인을 설득하고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한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을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늘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네거리의 순이’ 제 2연

  흡사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 같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듯이 전개되는
이 시는 카프문학의 맹장 임화가 노동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쓴 것입
니다.  비장하고 처절하지만 당대적 의미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
다.  시 자체는 무척 쉽지만말입니다.  ‘이야기시의 대가’라고 한 백석이 풍
경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볼까요.  현대식 표기로 고칩니다.

흙꽃 이는 이른봄에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가假 정차장도 없는 들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광원曠原’전문

  제목은 ‘넓은 들판’이지요. 협궤열차가 정거장도 없는 어느 들판에 멈춰
섰는데 내리는 사람은 단 둘, 젊은 색시입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합니
다.  이 시는 비록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시인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지 않고 보따리째로 독자에게 내민 것이지요.

신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먼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딴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   ‘寂境’전문

이것 역시 백석의 작품입니다.  제목은 ‘고요한 경계’나 ‘고요한 상태’를
뜻하겠지요.  나이 어린 며느리의 출산을 기뻐하며 미역국을 끓이는 이는
홀아비인 시아버지입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부재하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웃집 어린 아낙의 출산 소식에 마을의 외딴집에서도 축
하의 뜻을 전하고자 산국을 끓입니다.  고즈넉한 산골마을, 어느 일가의 고
요한 외로움을 가족 간의 정, 이웃 간의 정이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독자의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집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시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는 주의. 주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백석 시의 생명력이 여기에
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중요하고 시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성도 중요합니다.  시인에 따라서, 또 시인이 쓰는 각각의
작품에 따라서 비중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시의 언어와 일
상의 언어는 같은가 다른가를 갖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갸거겨
고교구규
그기가

라랴러려
로료루류
르리라

  한센병에 걸려 불우하게 살다간 시인 한하운이 쓴 [개구리]의 전문입니
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한글 자모음의 나열,
그 가운데 몇 개를 뽑아놓았군요.  이 시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저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이렇게 표현해본 것일 수도 있고,
개구리 울음소리와 아이들 글 배우는 소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해본 것일 수
도 있고,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댄 것일수도 있습니
다. 마음껏 울 수 있는 개구리의 자유와 울음조차 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
상황을 비교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가 한 철 울다 가는 개구
리와 다를 바 없어, 이렇게 한글 자모음을 빌려 울고 있음을 고백한 것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다르다고요? 여러분의 생각이 물론 맞
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이것이 시이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해석을 해보는 것이지, 일상용어
의 차원이라면 단순히 한글 자모음을 나열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런 것이 어찌 시라고 할 수 있냐고요? 아, 분명히 시입니다.  시인인 한하운
이 시라고 발표했는데 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의미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 전달, 마음과
정情의 전달을 꾀할 때도 있습니다.  충격도 주고 감동도 주고 깨달음도 줍
니다.  일상어의 목적은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에 있지만 시어의 목적은 ‘낮
설게 하기’,‘뒤집어 생각게 하기’ ‘일상어 넘어서기’등에 있습니다.  일상
어의 세계에서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1:1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밥이
영어meal, prey,one's share처럼 사전에 나오는 의미 중 하나로 쓰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밥이 meal을 가리킬 때는
meal만 가리켜야지 meal이기도 하고, prey이기도 하고 one's share이기도
하다면 곤란하다는 거지요.  시인은 ‘밥’이라는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충
실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인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1:多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 중의 밥은 meal, prey, one's
share 뿐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 포함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을 시어에 애매
성이라고 합니다.  일상어는 명확성을 지향하는 반면 시어는 애매성을 지향
하므로 일상어와 시어는 다르지만 사용되는 언어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밥을 일상적으로 쓸 때는 ‘밥’이라고 하고 시에 쓸 때는 ‘법’이라고 하지 않
거든요. 다 ‘밥’이라고 쓰지만 해석은 달리 하게 됩니다. 

이런 밥,
부잣집 개라면 안 먹일 거야
기계라도 덜거덕 소리가 날 거야
우리들은 식사를 거부하고
마지막 지점,
옥상으로 모였다

                  - 박노해, ‘밥을 찾아’제 1연


이 시에서의 밥은 우리가 끼니때마다 먹는 그 밥과 일용할 양식 정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시를 보십시오.
 
밥으로 苦痛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
으로 오르가즘을 만든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
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能辯
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希望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이성복 ‘밤에 대하여 ’끝부분

  국어사전 속에 나오는 밥의 의미만을 가지고는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습
니다.  밥으로 고통. 시. 철새의 날개. 오르가즘등을 만든다고 하는 것도
이상야릇하지만 밥이 나를 먹고 눈물과 능변을 만들고, 밥이 곧 국법이고,
끝에 가서는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라고까지 하니 몹시 혼란스럽습니
다.  이 시에서는 밥이 상징의 기재機才로 쓰였기 때문에 사전적인 의미 영
역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요즈음에는 시인들이 ‘시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소월과 영랑, 백석과 이용악, 미당과 청록파 3인의 시를 보면 정제된 시어
선택이 시 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초반의 몇 명 시인에 의해 씌어진 해체시(혹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의 등장 이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니어도 무방하게
되었습니다.  패러디(남의 작품 변용하기)를 잘하는 사람, 혼성모방(남의
작품 짜깁기)을 잘하는 사람, 몽타주와 콜라주를 잘하는 사람, 펀(pun, 말
장난)의 재주가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
다.  하지만 시가 언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어는 우리의 정서를 자극
하는 데 이용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풍부한 애매성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애매성이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다중의 의미’를 뜻합니다.  자, 이제 ‘같지만
다르다’라는 앞에서 한 제 말의 뜻을 이해하셨습니까?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이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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