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승하 시인님 방

[스크랩] 시인은 현대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 이승하

은빛강 2010. 4. 10. 18:54

시인은 현대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 이승하



<계간평>


권대웅의 「화석」
신현림의 「우울한 축배」
최승호의 「열목어」
강우식의 「염색」
손정순의 「청년이었던 당신에게」
강형철의 「광고판도 승천한다」를 중심으로 논의해본다.


우리는 모두 현대를 살고 있다. 지금 2002년은 21세기, 디지털 시대, 인터넷 시대, 초고속 정보망의 시대, 사이보그의 시대, 복제인간의 시대, 에이즈 창궐의 시대……. 머지 않아 인공지능 로봇의 시대가 전개될 것이라 한다. 사람에 따라서 현대를 보는 시각은 다 다를지라도 이상 나열한 것들이 현대를 규명할 수 있게 하는 단자들임에는 틀림없다. 가속화된 변화무쌍함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한다. 우선 어디를 가도 동영상이다. 각종 영상매체가 어지럽게 용틀임을 하면서 우리의 혼을 빼놓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와 자연의 음을 대신하는 각종 소리가 도처에서 울려 첨단의 현대문명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하다. 상상해 보라. 지하철의 굉음 속에 울려 퍼지는 휴대폰 3대의 소리, 거기에 덧보태지는 외판원의 고함과 방송 멘트를.
그렇다면 이 땅의 시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잘 감지하여 나름대로 시상을 전개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듯하다. 시인들은 여전히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고, 4계절의 변화에 따른 내 감정에 충실하다. 문예지에서 보게 되는 많은 시가 복고풍의 회고지정(懷古之情)이다. 20세기 100년을 풍미했던 모더니즘은 고색창연한 서정시의 물결에 휩쓸려 자취를 감춘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은 죽음이다. 입고출신(入高出新)이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같은 옛말에도 전통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야 발전이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요즘 문예지에서 읽게 되는 시는 상당수가 옛것만을 답습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현대인이 근대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현대를 제대로 읽어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미래 예측은 고사하고 아슴푸레한 추억에 사로잡혀 살 때, 그의 현대는 전근대이다. 오늘날 이 땅의 시인들이 현대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그것을 한번 알아보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수화기에서 돌멩이들이 튀어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붉은 벽돌이 시멘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나의 혀는 축대처럼 굳었다 할 말이 없다
신문을 읽으면 자갈밭을 걷는 것 같은,
자판기를 두드리면 찍혀 있는 알 수 없는 새 발자국들
나는 이제 나를 나라고 쓸 수 없다
―[화석] 제1연({리토피아} 여름호)


권대웅은 [화석]에서 현대인으로 살아가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부르짖고 있다. 수화기에서 돌멩이들이 튀어나왔다고 느꼈으니 얼마나 황당한 수신이었으랴. 텔레비전에서 붉은 벽돌이 시멘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고 느꼈으니 얼마나 못마땅한 보도였으랴. 문명의 이기인 전화와 텔레비전이 나의 혀를 축대처럼 굳게 한다. 신문을 읽으면 고통이 엄습하여 마치 자갈밭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자판기를 두드리면 정신이 혼미해져 글자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새 발자국들이 보인다. 시인의 절망감은 "저 돌로 지은 마음"을 한탄한 제2연을 거쳐 네 번째 연에 이른다.


어느 날 깨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말하는 벙어리들
어느 날 깨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것은 박쥐들의 언어
말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삶을 꿈꾸었다
비틀비틀 돌멩이를 맞으며 돌멩이를 읽으며
수세기가 지나간 어둠 속에서.
―[화석] 끝 연


여기서 깨어났다는 것은 탄생보다는 깨우침을 뜻한다. 눈을 제대로 떠서 보았더니 사람들은 모두 말하는 벙어리들이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언론들. 눈을 제대로 떠서 읽었더니 책이며 신문에 적힌 글은 모두 박쥐들의 언어가 아닌가. 즉, 조변석개하고 표리부동한 언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이 살고 있음을 시인은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심전심과 염화시중의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꿈(소망)일 뿐이었다. 현대인은 여전히 비틀비틀 돌멩이를 맞으며, 돌멩이를 읽으며 살아간다. 수세기가 지나간 어둠 속에서 화석이 되어. 시인의 세계관이 너무 어둡다고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만 현대문명의 어둠을 이처럼 깊이 들여다본 예가 흔치 않아 나는 [화석]을 이 계절의 수작으로 꼽고 싶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고
여름 축제는 열렸지만
축구공만한 해는 내게 날아오지 않았지

니 멜 왔나 클릭하면 스팸 멜만 잔뜩 정박중이고
꿈꾸던 등대는 물살에 잠겨간다
더는 되돌아올 것도 없이
더는 우릴 묶을 끈도 없이
창 밖엔 흰 머리칼 더미가 휘날려가지
―[우울한 축배] 제2, 3연({문학사상} 8월호)


신현림은 [우울한 축배]에서 2002년 월드컵 축제를 찬양 고무하지 않는다. 온 국민이 열광한 그 여름의 축제 때 시인이 축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시적 화자는 혼자만의 축배를 든다. 우울한 자축연이다. 현대인은 컴퓨터와 휴대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은데, 실상 그것을 쓰면 쓸수록 대화의 단절을 더욱 느끼게 된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제3연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과의 유대감이니 연대감을 느끼는 대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마지막 제5연에 가서 자신을 이렇게 추스른다.


할 수 있는 건 갈 데까지 가보는 거
절벽까지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거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다
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어가는 거
―[우울한 축배] 끝 연


현대인이 감내해야만 하는 의사소통의 부재는 시적 화자를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하지만 계속 우울해하지 않고 '∼하는 거' 하면서 세 차례나 굳게 다짐해본다. 이 연으로 말미암아 신현림은 권대웅과 같은 완전한 비관론자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연과 문명을 대비해도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0권의 시집과 여타 저서 9권을 내고 시인에게 주는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하고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줄기차게 쓰고 있는 최승호의 신작시 특집 9편 가운데에서 한 수를 읽는다. 문학상을 탄 이후 시 세계가 약화되거나 붓을 꺾는 사례가 너무 많은 우리 풍토에서 최승호의 신작시 9편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서울에서 나는 저녁의 느낌들을 잃어버렸다
스타빌딩에서 큰 네온별이 번쩍거리면
초저녁이다
저녁 어스름도 땅거미도 없이
벌써 발광하는 거리, 발광하는 간판의 불빛들로
눈은 어지러워진다
수정체가 조금씩 찢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눈에서 열이 날 때
열목어를 생각한다
―[열목어] 앞부분({작가세계} 여름호)


서울의 저녁에는 어스름도 땅거미도 없다는 표현이 '옳거니!', 무릎을 치게 한다. 그 대신 발광하는 간판의 불빛들로 눈은 어지러워진다. 수정체가 조금씩 찢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눈에서 열도 난다. 안과에 가서 눈의 피고름을 짜고 붕대로 공 같은 안구를 눌러대고 있을 때, 시적 화자는 열목어를 생각한다. 8행을 건너뛰고 마지막 부분을 보자.


서늘한 계곡에서 눈 식히는 열목어
그 적막 깊은 골짜기에서
멋모르고 얕은 서울로 내려왔다면
열목어야, 네 눈구멍에서
붉은 연기와 그을음 조각들이 치솟았으리
―[열목어] 뒷부분


눈의 열을 서늘한 계곡에서 식히다 멋모르고 얕은 서울로 내려온 열목어가 당한 수모는 눈구멍에서 "붉은 연기와 그을음 조각들이 치솟"는 것이다. 어느 독자인들 이 시에서 환경 파괴와 대기 오염을 연상하지 않을 것인가. 시골 사람이 서울에 처음 와 거리에 즐비한 대형 전광판과 광고판, 어지러이 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트들을 본다면 어지럼증쯤은 확실히 느낄 것이다. 수정체가 조금씩 찢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일종의 과장법이리라. 아무튼 이제 강에는 열목어가 없다. 그렇게 강을 방치한 우리에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희망을 보낼 자그만 우체국이 이제 자연에는 없다고 탄식한 강우식 같은 시인도 있다.


탄저균 분말의 눈이 내린다.
삼각지 로터리 곱창집 석쇠에는
곱창들이 이글이글 뒤틀며 타며
인육 냄새를 풍긴다.
술꾼들의 잔인한 무의식이 그곳에 있다.
한 여자가 머리에 인 눈을 털며 들어온다.
노오란 실국화의 머리가 드러난다.
부분 염색을 넘어 전체 염색인데도
나의 감정은 구토를 모른다.
나도 어느새 염색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염색] 앞부분({詩로 여는 세상}, 여름호)


시인이 생각하건대 겨울에 내리는 눈은 "탄저균 분말의 눈"이다. 눈을 머리에 이고 곱창집에 들어온 여인은 머리에 물을 들인 것일까, 눈 자체가 노란 색을 띠고 있는 것일까. (겨울에도 황사바람이 부는지?) 어쨌거나 머리 전체를 염색한 셈인데도 나의 감정이 구토할 줄 모르는 것은 시적 화자의 말대로 내가 어느새 염색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잠시 한 잔 술에 취해
탄저균이 아닌 희망을 보낼
조그만 우체국이 있을까 생각한다.
자연에는 우체국이 없다.
몇 천만 대의 에어콘에서 강풍을 보내듯
눈보라가 휩쓴다.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서푼짜리 삶조차
어느새 동상 들고 염색되었기 때문이다.
―[염색] 뒷부분


탄저균이 아닌 희망을 보낼 우체국이 없다고, 자연에는 그런 우체국이 없다고 화자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것은 내 초라한 삶조차 어느새 동상 들고 염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색깔이 바뀐 것이다. 초록의 들판은 회색의 빌딩 숲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을 희한하게 염색한 사람들이 떳떳이 거리를 활보한다. 이 땅에 부는 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황사바람이다. 색깔이 바뀐 현대를 원래의 색깔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거대도시 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차도 과포화의 상태이다. 건물도 많고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풍요와 번영의 상징인 수도 서울에서 33번째 입사원서를 찢고 자살한 사람이 있다. 무한경쟁의 시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질서의 와해 때문이다. 대량실업사태를 겪은 시절에 30대 노총각 자살자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비닐 천막 속에서 당신의 풀어진 손마디 꼬옥, 잡아봅니다 막걸리를 벌컥, 들이키고 쓰러진 당신의 붉은 손가락 끝에서도 흰 목련이 피었던가요? 눈이 맑은 청년은 죽지 않는 것이라구요 싸늘한 죽음을 옆구리에 하나씩 둘러찬 驛舍에는 가는 비가 내립니다 삼삼오오 아무렇게나 쓸려가는 저 꽃잎들이여, 우리 어느 역 어느 광장의 바다에서 다시 환생하여 이마에 붉은 꽃 가득 피울 수 있을까요?


그날도당신은취했었죠33번째입사원서를찢으며이제고향따위속이는거짓원서는다시쓰지않아도된다며힘차게움켜쥐던그주먹그웃음소리는차라리통곡이었죠대리가되면보란듯이목련꽃핀고향집에도내려가동네막걸리잔치도벌이고먼저간오월녀석에겐소주잔뜩먹이는걸로살아남은자의슬픔조금덜어보겠다던그32번째행운그무지개빛꿈이정말한여름밤의꿈이될줄은미처생각지못했어요
―[청년이었던 당신에게] 1, 2연({현대시 7월호)


손정순은 지금껏 발표했던 시와는 아주 색다른 시를 발표하였다. 일단 시의 도입부가 의미심장하다. 화자가 비닐 천막 속에 죽어 있는 당신의 손을 잡아본다. 당신이 죽은 장소는 역 근처이며, 막걸리를 마신 상태에서 죽었다. 약을 타서 마신 것일까. 자살을 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활자의 포인트를 낮춘 제2연에 나와 있다. 대리가 될 수도 있었는데 대리가 되기 전에 퇴사를 한 당신은 32번이나 입사원서를 썼었고, 33번째 입사원서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자살을 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IMF 사태로 퇴출된 은행원이나 증권회사 직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32번이나 입사원서를 쓰면서 무지개 빛 꿈을 꾸었지만 끝끝내 수포로 돌아간 취업에의 꿈, 노숙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끝내 막걸리에 약을 타 마시고 자살을 한 것이 앞의 두 연이 시사해주는 정보이다.


광장에는 어느새 요란한 빗소리 들리고, 전광판 속으로 낯익은 건물들이 흔들립니다 청년은 벌써 죽고, 시들어가는 목련꽃 옆에서 수천의 청년이 또 가방을 꾸리는데 어디로 흘러가는지 까물거리는 심지만이 불안한 밤을 밝힙니다

당신은 아시나요, 이렇게 잠 못 드는 이유를.
―[청년이었던 당신에게] 끝 3, 4연


이 시에서 '시들어가는 목련꽃'은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 남은 꽃을 암시한다. 문제는 청년의 주검 옆에서 수천의 청년이 또 가방을 꾸리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데 있다. 현대의 거대도시에 고등 실업자가 넘쳐날 때, 그 도시는 활력을 잃은 공간이다. 문명이 요란하게 가속도를 내며 달리고 영상문화가 우리의 시야를 아무리 어지럽게 해도 청년들이 입사원서를 계속해서 쓰게 한다면 그 청년들의 둥지인 도시는 거대한 공동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것은 상업광고판이다. 집에서도 지겹도록 보는 상업광고를 우리는 이제 길을 걸어가면서도, 차를 운전하면서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건너가는 다리 위
상업광고판이 승천하고 있다

내가 본 것은 광고판을 비추고 있는 형광의 불빛이
내리는 비 때문에 기화하는 것이지만
그림판 안의 여자가 열 고운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면서
무관심한 사람에게 카펫에 대한 호기심을
세탁기에 대한 꿈을
청소기에 대한 필요성을 주입시켰으니 성공이라며
아들 데리고 승천하는 선녀처럼
광고판 타고 승천하고 있다

봄밤을

세상에, 봄밤을.
―[광고판도 승천한다] 전문({문학나무} 여름호)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속에서 선녀는 나무꾼이 옷을 감추자 아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현대의 선녀는 광고판 속의 모델이다. 그녀는 열 고운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면서 카펫과 세탁기와 청소기에 대한 필요성을 소비자에게 확실히 주입시키고 "광고판 타고" 승천하고 있다. 강형철은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가는 다리 위에서 광고판을 보고 경악한다. "봄밤을//세상에, 봄밤을." 하면서. 옛날에 어린이들은 그런 전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웠지만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는 광고가 꿈을 심어주는 천사이다. 그 천사는 눈에 보인다. 봄밤을 수놓으며 승천하는 천사, 모델, 광고판. 광고판도 승천하는 현대를 살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하련만 시인은 말문을 잃고 만다.
이상 거론한 여섯 명 시인은 21세기 초입을 살고 있는 시인으로서 현대의 의미를 읽어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시를 보여주었다. 공통점이 있었으니, 예찬이 아니라 비판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시인이기에 물질문명의 도도한 흐름에 이렇게 맞서 싸우려 한 것이다. 이들의 싸움이 풍차를 보고 돌진한 돈 키호테처럼 무모한 것이라 할지라도 시인이 아니고서 누가 이런 싸움을 벌이려 할 것인가. '현대'와 '문명'에 대한 진단이 보다 많은 시인에 의해 행해지기를 바란다.

출처 : 시와 공간
글쓴이 : 박숙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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