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향기/사랑의 향기

서소문밖 형장에서 9위 순교하신 날 24~27일

은빛강 2010. 5. 26. 19:38

5월 24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9위 순교하신 날  

김아기  아가타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김아기님은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님, 한아기(韓阿只) 님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아기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였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다음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시었다.

 

 

 

박아기  안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님은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는 남편,
큰아들 응천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7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시었다.

 

 

 

이소사  아가타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이소사님은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하였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면서 어머니,
동생 이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183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 베드로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동생 聖 이호영 베드로님은 4년의 기나긴 옥중생활의 炳獄死 순교>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시었다.

 

 

 

김업이 막달레나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김업이님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혼기에 이르러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살아가던 김업이님은
1836년 10월 김아기(金阿只)님, 한아기(韓阿只)님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으로 66세에 순교하시었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이광헌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님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 주어 이광헌님은 4월 7일
전가족과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부인-聖女 권희 바르바라 100일후, 딸-聖녀 이 아가타200일후,
동생-聖이광렬 요한님 60일후 모두 순교하심> 
 
포청에서 형문(刑問)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南明赫)님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한아기 바르바라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한아기님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金業伊)님에게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 김업이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 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8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박희순  루치아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님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 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성녀 박 큰아기님<100일 후 참수 순교하심>과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님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全敬俠)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님은 언니와 전경협님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님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남명혁 다미아노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니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님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님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성녀 이연희 마리아님은 100일 후 참수 순교>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님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님은 한창나이인 38세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시었다.

 

 

 

권득인 베드로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님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읜 뒤 혼인하였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聖物)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권득인님은 1839년 1월 16일 아내, 처남, 어린 자녀 등 4명의 가족
그리고 김로사님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권득인님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35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5월 25일

장성집 요셉님 순교하신 날

장성집 요셉
 
관련성지 포청옥 순교일 1839.05.26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님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예비신자로 열심히 생활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회의를 품어 신앙 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
교우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뒤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 생활에
무슨 방해가 되느냐?" 하고 만류하자 장성집님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성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하였다가 代父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인 4월 6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하였으나
장성집님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과 고문을 참아 냈다.
그 뒤 장성집님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대를 맞고
54세에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시었다

5월 27일

聖女金바르바라, 李바르바라님 순교하신 날

 

 

1   김 바르바라   바르바라   옥사  

1839.05.27

 

2   이 바르바라   바르바라   옥사   1839.05.27

 

 

 

 

김 바르바라  바르바라
 
관련성지 옥사 순교일 1839.05.27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님은 13세경
서울로 올라와 교우 황 마리아의 집에서 식모로 생활하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정으로 살고자 결심하였으나 혼기가 차자 부모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여 남매를 두었다.
혼인한 지 15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3월 김 바르바라님은
몸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3개월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35세에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시었다

 

 

 

 

이 바르바라  바르바라
 
관련성지 옥사 순교일 1839.05.27
 
 


이 바르바라님은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서울 청파동에서 이영희, 이정희
두 이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님은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꿋꿋이 참으며 함께 갇혀 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자료-굿뉴스

현대- 곧 지금 현실에서는 "순교"라고 하는 것은

삶 속에서 자아를 봉헌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데

우리는 곧잘 봉사를 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교우들 사이,

그리고 가장 근접한 가정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이는 일이

사실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물론, 신앙단체도 인간이 조합되어 생성되고 희사하는 것이 봉사이지만

다수의 인품이 모여 있기에 우여곡절의 돌출이 다반사이다.

결론적으로 자신 위에 더 잘난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몹시 껄끄러운...

요즘 한국사회는 고등교육을 거의 받은 사회라고 보면 그들 역시 그럴 법도 하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모 의과대학원 정교수이며 모 병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내신 분을 취재하면서

매우 남다른 것을 느꼈다.

그분이 가진 지위나 학벌은 예사롭지않은 경우이지만 정말 해맑은 소년처럼 생각하고 말씀하시며

그 모든 것이 생활 전반에 녹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가진것을 여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모두 돌려주는 희생정신은 참 귀찮기도 할 것이고 생각처럼 행동으로 옮겨 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이후로도 더러 뵐적 마다 그분은 소년처럼 맑고 낮은 자의 시각으로 교정되어 있었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 옥스퍼드 유학시절 교회에서 받은 수모에 "하느님은 믿지만 그분을 믿는 종교인들은 싫다." 라던

현대의 종교인의 살신성인의-인- 을 이루는 일은 신앙의 당연한 숙제이며 현주소이다.

교부들의 가르침에는 [상대방 안의 그리스도를 보라.]라는 것이 지금 내게도 아주 특별한 조언이며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길목인 셈이다. -박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