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마당/예향 산책

원통과 순환/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은빛강 2010. 8. 13. 05:50

둥글어 통해 ‘원통’한 공간

시작과 끝이 없고 하나로 통한다

한옥 공간은 순환한다. 막히지 않는다. 한국인의 민족 정서인 갈림길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길은 좁은 복도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갈래이다. 형식도 여러 가지이다. 방끼리도 통하고 마당과 대청마루를 건너기도 한다. 사방으로 적당히 뚫려있고 적당히 막혀있다. 막으면 방이 되지만 그 막음이란 것이 콘크리트 벽처럼 앙 다문 것이 아니어서 언제든지 틀 수 있다. 트면 길이 난다. 방과 방 사이에 문이 난 경우도 제법 된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길은 하나의 작은 여로이다. 인생이 여행길이고 여행길은 갈림길이듯 집은 인생을 닮아 수많은 갈림길을 가득 담고 발걸음을 흐트러트린다.

 

한옥 공간이 순환한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다. 원통이다. 원은 완전도형이라 해서 동서양 모두에서 최고의 상태로 쳤다. 하늘을 닮은 이미지로 받아들여 신성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부분 형상을 모방해서 둥근 천장을 짓는 선에서 그쳤다. 한옥은 이것을 공간에 적용해서 막힘없이 둥글둥글 도는 동선구조로 만들어냈다. ‘원’에 ‘통’을 결합해서 ‘원통’한 공간으로 만들어낸 경우는 한옥밖에 없다. ‘원’한 공간은 자연히 ‘통’하게 되어 있으니 한옥은 ‘원’이라는 것에서 기하학적 형상을 읽은 것이 아니라 ‘통’하는 가능성을 읽은 것이다.

 

 

김동수 고택 안채 ‘田’자 공간 속에서 빙빙 도는 구조가 방 하나에서 일어난 경우이다. 단순히 도는 것이 아니고 방 하나에서 사방팔방으로 동선이 닿는다는 뜻이니 집 전체로 보면 딱히 막힘이 없이 원융무애한 공간의 씨앗을 이룬다.

 

 

원통이라는 개념을 쉽게 풀어 쓰면 180도 유턴하는 일 없이 직각으로만 꺾으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솟을대문에서 시작한 동선은 제일 먼저 행랑마당으로 이어지면서 사랑채를 맞이한다. 사랑채에서는 방의 앞문으로 들어간 뒤 다시 뒷문으로 나와 뒷마당에서 직각으로 꺾어 집을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 대청으로 오르면 방으로 들어간 뒤 옆방으로 잇거나 방 밖으로 빠져 나오는 식으로 다시 대청 앞 댓돌로 돌아올 수 있다. 대청 뒤창도 완전한 문은 아니지만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어서 뒷마당에서 직각으로 꺾은 뒤 집을 돌아 되돌아올 수 있다. 누마루도 마찬가지이다. 삼면에 문을 냈으며 퇴를 발코니 겸 통로처럼 달아서 누마루 한 곳에서만도 빙글빙글 돌 수 있게 했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비슷한 방식으로 유턴하지 않고 온 집안을 빙글빙글 둥글둥글 돌아다닐 수 있다. 원통에 대입시켜 보면, 마치 원형 공간 이곳저곳에 적당히 칸막이를 쳐서 막힘없이 두루두루 도는 동선을 확보한 뒤 원형 윤곽을 누르고 다듬어서 육면체로 만든 것 같다. 물론 한옥의 형성과정을 보면 이런 내파 분할과 반대인 외파 증식이긴 하지만, 공간 개념과 형식을 유형화하면 이런 직설적 원통에 비유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원통’하다. 여기저기 문을 열어놓은 한옥을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해면체를 보는 것 같다. 한옥을 하나의 큰 상자라고 생각하고 물을 부으면 그 흘러나가는 경로는 너무 분산적이고 불규칙해서 뭐라 형식화해내기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일정한 축과 방향을 따라 몇 줄기로 물이 모아지는 서양식, 현대식 주택개념과는 분명 반대편에 있다.

 

 

향단 집이 ‘원통’해서 순환한다는 말을 단순히 생각해보면 집에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물을 부으면 사방팔방으로 줄줄 샌다는 뜻이다. 물이 새는 길은 곧 동선이다.

 

 

기가 통해 건강한 한옥의 순환공간

왜 이렇게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제일 먼저 실용적 목적이 있다. 원통은 바람 길 같은 환경요소에 유리하다. 물을 뚫어 썩음을 막고 병을 쫓아 악을 차단하는 상태가 통이다. 나무가 막히면 좀벌레가 생기며 풀이 막히면 거름이 되는데 이것을 막아주는 것이 통이다. 창도 마찬가지이다. 자연과 ‘통’할 때에만 방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과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집에 숨통을 터주니 그 숨통은 곧 사람에게 숨통이 되어 돌아온다. 집과 사람은 닮게 되어 있다. 본래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집이 사람을 닮으니 식구들 사이의 접촉 가능성 및 그 형식을 늘려준다. 의사소통방식을 다원화한다는 뜻이다. 집의 중심을 벽을 이루는 물질로 보지 않고 벽 사이의 공간을 오가는 발길로 본 것이다. 집의 요체를 벽이 한정하는 면적으로 보지 않고 발길에 따라다니는 식구들 사이의 소통과 교류로 본 것이다. 벽으로 막아 각자 면적을 깔고 앉아 안으로 꽁꽁 걸어 잠그는 집은 물심양면 모두 건강할 수 없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끼리 단절되어서 기가 막힌 상태이다. 소통과 교류가 끊기니 그 집안의 분위기와 가풍은 말 그대로 ‘기가 막히게’ 된다. 한옥은 이것을 경계했다.

 
대가족제도 때 집이라서 더 그랬다. 가부장제 집이기 때문에 엄격한 위계는 필요했지만 이와 동시에 식구 수가 많은 대가족 집이었기 때문에 위계만 고집하다간 자칫 ‘기가 막힌’ 집이 되기 쉬웠고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통하고 저렇게도 통하게 만들었다. 삼대 십 수 명이 한 집에 살다보면 식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소통과 교류는 경우의 수로 셀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얼마나 많은 만남과 모임이 일어날 것이며, 얼마나 다양한 소통과 모의가 필요할 것인가. 드러내고 싶은 소통도 있었을 것이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적절하게 복합적이고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공간구조가 필요한데, ‘원통’한 공간이 최고였다.

 

순환하는 한옥 공간에서는 동선의 종류가 다양해진다. 이 자체가 일단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동에 다양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이동의 목적과 성격, 이동하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상태 등 여러 조건에 따라 각각에 맞는 동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기 때문이다. 한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이자 우주이다. 수많은 길이 나고 이동과정이 다양하다.


 

관가정 집이 ‘원통’해서 순환하기 위해서는 복잡만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주축이 되는 중첩공간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돌아가기와 질러가기

일부러 돌아갈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다. 사람이 집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돌아가야만 하는 사정과 여유가 생기게 마련이며 반대로 질러가야 할 급한 형편도 벌어진다. 둘을 구별해서 할 수 있게 해주면 그 공간은 최고이다.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에 이동 동선이 일직선 복도밖에 없다면 이는 오히려 기능적이지도 못하게 되며 더더욱 정성적(定性的)인 집은 절대 될 수 없다.

 

한국인 특유의 상대주의 국민성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한국인은 한 방향으로만 굵고 곧게 난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로와 샛길, 갈림길과 곧은길이 적절히 섞인 ‘재미있는’길을 좋아하며 이런 길을 즐긴다.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흔히 한국인의 파벌을 얘기할 때 쓰는 말이지만 잘 따져보면 산하가 이루어지는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다른 것이 모이니 이합이요 모였다 흩어지니 집산이다. 종으로 합하니 합종이요, 횡으로 이으니 연횡이다. 본디 산줄기와 강줄기가 이렇지 않던가.

 

 

윤증고택 사랑채 원통과 순환을 좁은 의미로 보면 ‘田’자 공간 속에서 빙빙 돈다는 뜻도 된다. 이런 구조는 채 하나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방 하나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한옥의 원통 공간에 나타난 갈림길과 선택권은 이런 자연의 형상을 옮겨 놓은 것일 수 있다. 한옥에 동선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동선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이동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혜의 선물이다. 시간 따라, 형편 따라, 기분 따라, 계절 따라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이동 중간에 보는 장면이 각각이고 맡는 냄새와 듣는 소리 또한 제각각이다. 이것들을 조합해서 즐기면 된다. 집 안에서의 이동이 즐김과 감상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생활살이에서 정말로 큰 축복이다.

 

흔히 한옥이 복잡하고 불편한 것으로 알지만, 한옥에는 지름길이 있다. 한옥에서는 급할 때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 효율의 가치를 절대 무시하거나 모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다만 효율의 존재를 다른 다원주의 요소 속에 묻어 꼭 필요할 때에만 꺼내 쓰게 했을 뿐이다. 효율 하나에 목매달아 너무 소중한 많은 것들을 생매장시키는 우를 피해가는 지혜이다. 효율을 살리는 것이 기능이라고 했을 때 한옥은 이처럼 분명 기능적이기도 한 것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