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속 외침

각교구 교구장님의 성탄 메시지

은빛강 2010. 12. 25. 00:57

 

정진석 추기경 2010년 성탄메시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온 세상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성탄이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탄 시기는 과거 이천 년 전에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념하는 때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에 이 세상을 완성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보잘것없는 말구유에서 가장 여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성탄은 우리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여리고 약한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고 삶의 의미와 우주의 신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바로 ‘인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러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별이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탄의 기본 정신은 바로 ‘차별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차별이 없어진다면 우리의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맹수와 약한 동물들이 어울려 노는 세상으로 표현했던, 바로 모든 이가 함께 공존하는 평화입니다(이사 11,6-8 참조). 이런 평화와 행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소외와 차별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공동체 의식보다는 개인의 이기심, 집단적 이익추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어려움들을 안고, 세상의 빛이 되어 오신 주님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 속을 헤매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4 참조).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희망과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을 통해 우리 사회를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가 평화와 자유를 한껏 누리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지도자들이 억울하고 차별을 받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의 눈물이라도 더 닦아주려고 노력한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더욱 희망차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 구세주께서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축복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내리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2010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2010년 예수성탄 대축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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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 상영시간 : 1분 18초(2010 성탄메시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사랑으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이 모든 이에게 풍성하게 내리시길 기도드립니다. 해마다 오늘이면 교회와 세상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며 구세주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라고 외쳤듯이, 이 세상은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 온 세상 곳곳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리는 기쁨의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돈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이웃을 경쟁자로만 여기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에게 매우 고귀하고 소중한 건강, 교육, 미모, 결혼, 취직 등이 나의 상품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이혼증가율이라는 슬픈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삶을 충만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내적 가치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소중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이 힘을 잃으면서 많은 이들이 이기적 계산과 살벌한 생존경쟁에 던져져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깊을 때 빛은 참으로 그 가치를 발합니다. 생명과 내적가치가 경시되고 경제적 효용성과 외적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생명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성경을 읽고 그분의 삶을 따르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그분은 말씀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가장 낮고 겸손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깨어 맞이하는 방법은 생명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빛과 소금으로서 신앙인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경제논리에 치여 버린 우리 자신과 힘없는 이웃을 보듬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이며 사랑받는 자녀임을 되새깁시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을 충분한 이유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하셨던, 온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시대적 사명에 동참하는 뜻 깊은 성탄을 맞으시길 빕니다.

2. 우리나라는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라를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하고 희생을 바쳐야 합니다. 남과 북이 최첨단의 성능을 자랑하는 무기들로 상대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의 위력은 지구를 40번이나 파괴시킬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남과 북이 대치하면서 전국토가 요새화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반도는 불바다가 되어, 모두가 패자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이미 한반도에서 치러진 한 번의 민족 간의 전쟁으로 족합니다. 북한은 연평도에서의 무고한 민간인 사망에 대하여 즉시 사과하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남한은 북한의 굶주린 형제들을 위하여 식량이나 약품 등 인도적인 지원을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차분하게 지혜로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라에서 큰 책임을 지고 계신 분들 중에 말을 함부로 하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을 졸일 때가 많습니다. 흥분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서 함께 살 수 있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하여 차분한 자세로 상황을 꼼꼼히 따져보고 대처하는, 지혜로운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즉시 대화와 타협의 길로 나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3.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이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얼마만큼의 희생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상적인 선물이 뒤따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말씀을 살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 그리고 성찬례의 신비도 올바로 알아듣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펼쳐 오신 사랑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랑 안에 머물면서 빛이 되고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살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 우리의 삶이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토록 당신 자신을 낮추신 주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비우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만나는 이웃과 하나가 되려 했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친애하는 형제·자매님들,

지난 114일에 선종하신 이태석 신부님께서 아프리카 수단에서 성 다미안 신부님처럼 사셨던 삶의 다큐멘타리 영화 울지마 톤즈는 보는 이들마다 눈물을 흘리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종족간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한센병은 물론이고 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톤즈 마을을 찾아가셨습니다. 한센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의 뭉개진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각자의 발 모양을 본떠서 신발을 맞춰주시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워 공부를 가르치고,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복음 말씀을 증명해 보이셨으며,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의사였고, 사제이며, 선생님이었던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닮은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오직 이웃만을 사랑하다가 자신은 48세의 젊은 나이에 천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 신앙인의 모범이시며, 자랑스런 한국인이시고, 이 시대에 큰 책임을 진 모든 지도자들의 본보기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이 세상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고자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아무리 어둡다고 말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작은 촛불을 밝히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옆의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소통을 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빛, 소금, 누룩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소명을 받았음을 늘 기억하기로 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천주강생 2010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 흥 식 라자로

 

 

 

 

[인천교구장 성탄 메시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우리는 매주일 미사 중에, 구세주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1요한 4, 14 참조)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시는 분, 그분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고난이 가득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 오셨습니다. 멀고 먼 타향에서 태어나셨으니 이민자들, 고향을 등진 사람들에게도 위로자가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 10-12)라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소리 높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라고 외칩니다.

우리도 이 성스러운 성탄에 하늘의 군대와 함께 외쳐야 합니다. 희망을 주시려고 오신 분, 기쁨을 주시려고 오신 분,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분 찬미 받으소서.”

오늘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정말로 나에게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인가요? 예수님의 탄생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하고 기쁜 소식인지 깊이 새겨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 많은 난관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남과 북이 심각한 대결상태를 유지하다가 천안함사건,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는 참상이 일어났습니다. 비극입니다. 이 사건들이 인천교구의 관할 하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정신적인 공황상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데, 무슨 뜻이 있을까를 깊이 새겨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으나 불행하게도 자살률에서 세계 1, 아기를 낳지 않는 것에서도 1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혼과 낙태율에서도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고 합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절망의 늪이 깊어지고 비정규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해 노숙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갑니다. 왜 이런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겹겹이 쌓여가고 있는지요?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미움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돌아서야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탄절을 맞으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탄생하신 예수님께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모두가 사랑으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것, 곧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처한 이 모든 난관들을 해결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기쁨이요, 희망이며 행복입니다. 기쁜 소식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노인과 병든 이, 온갖 어려움 속에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시려고, 희망을 주시려고 오셨으니, 이 기쁨과 사랑, 희망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날을 모두가 기뻐하며 용약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만 얽매어 있지 않고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임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인간의 죽음 뒤에 올 새 세계, 그리고 언젠가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께서 공심판을 하게 되실 것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탄생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굳게 믿고 영생을 얻는 기쁨 속에, 매일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소망하며,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내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12월 성탄절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 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의 성탄 메시지]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 5,20).

 

† 희망의 땅, 복음으로 !
  청소년과 함께 교회의 미래를 !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구세주 탄생의 ‘큰 기쁨’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며,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인간의 생명을 취하시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 
1.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이 “큰 기쁨”의 원천은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이 ‘강생의 신비’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첫 아담의 죄로 인해 “비록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잃었으나 죽음의 세력 아래 버려두시지 않고”,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그 사실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 2).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 5,20).

 

동정녀의 순종으로 하느님께서 인간 생명이 되셨다.
2. 때가 차자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마리아께 잉태되신 천주성자께서는 모든 인간이 탄생할 때처럼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건이 세상 안에서 실현된 것은 주님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에 기인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동정녀의 이 위대한 응답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구원사업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의 길이 열리고, 말씀이신 성자께서 연약한 인간이 되시어 죽을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외아드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의 순종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 생명을 선물로 받는 어머니들의 모범이며,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모성의 표상입니다. 따라서 성탄의 기쁨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 느끼는 기쁨의 토대이며 그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출산은 부부의 기쁨이요, 행복이며, 하느님 최고의 선물
3. 혼인과 부부 사랑은 그 본질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합니다. 특히 가정은 그 본질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합니다. 특히 가정은 인간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생명의 성역’입니다. 자녀의 출산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창조 활동’에 대한 부부의 특권입니다. 이로 인해 가정은 부부의 일치와 사랑으로 진정한 인간 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에 봉사하며, 창조주의 첫 축복을 역사 안에서 실현합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따라서 출산은 하느님 모습을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거룩한 하느님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창조사업의 영역입니다. 또한 출산은 부부애의 결실이고 징표이며, 아울러 부부 상호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의 산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여 열린 마음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저출산 과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녀는 소중한 생명이요, 세상의 생명을 책임질 미래 
4. 가정은 생명이 살아 있는 창조와 인간 번영의 최고의 보고입니다. 자녀는 혼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크게 이바지해야 할 가정의 희망입니다. 자녀 출산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창조 사업을 수행하는 부부의 첫째 임무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생명의 문화가 급속히 파괴되는 이 상황에서 부모들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생명을 사랑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부모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 교육은 주님의 계명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신앙 안에서 자녀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늘 일깨워 주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
5.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지난 대림 제 1주일 전야에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을 위한 밤 기도”를 거행하셨습니다. 교황 성하의 요청에 따라 우리 수원교구에서도 주교좌성당을 비롯한 모든 본당에서 보편교회와 일치하여 이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직?간접적으로 위협하는 많은 일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성을 무디게 만드는 실용주의와 상대주의는 윤리성이 결여된 문화, 곧 생명문화의 퇴보를 가져와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간 생명을 해치는 위협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죽음으로 내몰거나, 자살, 온갖 살인, 안락사, 배아줄기 세포 연구와 인간 실험, 사형제도 등 갖가지 양태로 표출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생명권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생명과 그 불가침성에 대한 분명하고도 단호한 의지를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간 생명의 완전한 의미를 밝혀주는 성탄의 참된 의미라 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은 아름다운 생명 문화 형성의 시작
6. 인간은 존엄하고, 인간 생명은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시작부터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연결되어 있기에 무엇보다 신성하며,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음으로써 고결한 품위와 지고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며, 특별히 주님의 명에 따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사명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이 추운 겨울에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이웃들, 특히 끼니를 걱정하는 청소년, 독거노인, 새터민, 이주민, 교정의 대상이 되는 이들 등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새로 태어날 생명을 간직하고 출산을 기다리는 모든 고귀한 여성들에게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설정 50주년을 향하여
7. 수원교구는 지금, 2013년 교구설정 50주년 희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0주년은, ‘수원교구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화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하는 큰 과제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원교구는 이미 올해 초부터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희년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위원회는 수원교구 희년의 준비를 시작하는 지난 대림 제 1주일에 이미 희년 기념로고를 채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희년의 대주제를 <희망의 땅, 복음으로!>로 선정하였습니다. 이미 제가 교구의 책임을 맡으면서 발표한 중점 사목의 그 중심인 “새복음화”는 이 대주제 안에 함축적으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반세기를 기념하는 수원교구 설정 50주년이 감사와 기쁨의 희년 대축제가 될 뿐만 아니라, 교구가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써의 역할을 다하는 기회와 계기가 되도록 교구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거룩한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또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생명을 사랑하고 수호하자는 주님의 뜻에 응답하여 우리 사회에서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거룩한 사명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낮은 자세로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면서 성령으로 인하여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더욱 큰 사랑의 열정을 불어 넣어 주시고, 모든 이의 생명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0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님의 성탄 메시지]

2010년 교구장 성탄메시지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태어난 아기가 자라나서 하느님에 대해서 또 구원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요, 이로써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탄은 바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과 온 세상의 만남을 기뻐하는 축제입니다.

  성탄의 소식을 온 세상이 기뻐하는 이때에,
그분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

  성경은 그 분의 탄생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수 천 년 기다려온 이스라엘은 정작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알아채지 못합니다. 반면에 그 생명을 찾아 먼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곧 이방인들이 별을 보고 그 먼 길을 찾아와 경배한 것입니다.

그  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탄생을 거부하였던 이스라엘과 먼 나라에서 찾아와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배한 이방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시작부터 그러하더니 공생활 중에도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기득권세력에게 반대 받는 표적이 되고 세리와 창녀, 이방인에게 오히려 환영을 받습니다. 마침내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한 이야기, 곧 복음도 이스라엘보다 이방인들에게서 더욱 환영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유에 누여진 아기처럼 힘없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셔서 그런 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곧 잘 무시합니다. 메시아를 고대했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면서 정작 우리 곁의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의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뵈었던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봅니다.
별을 보고 먼 길을 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고 경배를 드렸던 동방의 박사들
, 그들의 여정이 얼마나 걸렸는지, 얼마나 멀었는지, 몇이 함께 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별이 인도하는 낯설고 긴 여정을 생각해 봅니다. 별을 따라 추운 밤길을 걷다보면 고향의 안온함이 그리웠을 것이고 이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그 무엇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구름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의심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하고 마침내 그 분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 드리고 그들의 정성을 바칩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향해 떠나는 자에게는 별이 보입니다
. 지치기도 할 것이고 회의와 의심이 찾아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별을 가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가야합니다
.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기 예수님이 있을 초라한 구유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없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별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을 걷어내야 그 별이 보입니다. 그들을 위해 내 손을 내밀 때 구름이 걷히고 별이 보일 것입니다.
'
나눔과 희생'의 성체성사가 바로 그 길을 걷는 우리의 힘이요 양식입니다.

  어려운 때입니다.
남북의 긴장은 최고조를 향해 달리고 있고
, 평화의 길은 자꾸 멀어지는 듯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화해와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힘이 없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향한 노력에 우리의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일수록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더욱 힘이 들고 소외됩니다.
일부 사회복지재단의 비리로 기부금이 크게 줄어든데다 정부의 복지예산 삭감으로 사회복지시설들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 비리를 저질러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이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내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을 거두어들일 때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숨통이 같이 조여듭니다. 사실은 이러한 때 더욱 많은 사랑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춥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 이주민들을 비롯한 다문화 가족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튼 탈북 새터민들, 그들에게도 새로운 고향에서 맞잡을 수 있는 우리의 따뜻한 손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우리시대, 우리에게 다가온 이방인이요, 보잘 것 없는 작은이로서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할 때, 우리는 메시아를 외면했던 이스라엘인이 됩니다.

  추운겨울에 성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세상이 아직은 살아 갈만큼 따뜻하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라 여기며,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맞이하는 올해의 성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희망과 기쁨이 되기를 기도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2010년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주교 김지석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주교님 성탄 메시지]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대림절을 지내며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던 우리는 그 옛날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기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그분이 오시면 어두움과 불의가 가시고, 빛과 즐거움이 넘치고 정의와 평화가 가득찬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라고 탄원하였으며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이사 9,1)는 예언자의 말을 믿었습니다.
금년도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 또한 그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의와 평화가 요청되는 시기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모두가 그 품위 때문에 존중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합니다. 권력과 재물, 학벌과 사회적 지위로 평가하고 또 차별하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지난 11월 23일 북한은 우리 서해 연평도를 향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우리 군도 이에 대응해 포탄을 북한의 해안포 진지를 향해 쏘았습니다. 가히 전쟁이라 할 수 있는,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남북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습니다.
백주에 버젓이 포탄을 퍼부어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의 위협을 가한 북한 정권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운 파렴치한 행위이고,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대북정책이 실행되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향하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는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나라를 맡기며 그분의 뜻이 한반도 안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목동들에게 하신 말씀은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화를 위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북한의 회개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위해 기도드리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소중한 일입니다.
파티마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본 사람도, 성탄 밤에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도 모두 양을 치는 목동들이었습니다. 목동들이 하늘로부터 들은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목동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불안이 사라지도록 참 평화를 구하면서, 목동들의 묵묵하고 성실한 삶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정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정의의 실현은 무엇보다 생명과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사회에 넘쳐흐르는 반생명적인 문화인 죽음의 문화를 퇴치하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정의의 실현일 것입니다.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는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없고, 여야의 구별이 없으며, 기득권을 위한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부의 모든 정책이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북한과 인접하고 있는 우리 의정부 교구의 지리적 특성상,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람이 사람을 해쳐야 생존하는 인간성 상실의 극한인 전쟁을 결단코 반대하고, 평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는”(이사 11,6) 그런 세상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의정부 교구는 타 교구에 비해 우리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더욱 열심히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야 말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시작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주님 성탄의 기쁨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청합니다. 가난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과 요양원이나 여러 시설에서 외롭게 지내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 이 땅이 채워질 때 하느님의 평화 또한 온 세상에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성탄의 거룩함과 기쁨이 형제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고 한반도 곳곳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2010년 예수성탄 대축일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 대교구장 조환길 주교님 성탄 메시지]



사랑과 나눔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교구 100주년을 앞두고 주님 은총의 해를 준비하는 우리 마음에, 그 옛날 목동들이 처음 들었던 천사들의 합창이 새롭게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물들어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구세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알리러 나타난 천사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두려워하지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2,10-12)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께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고 찬란한 영광에 싸여 나타날 수도 있으셨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마구간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표징이 바로 가난하게 되신 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당신을 죽이려 드는 악인들 때문에 외국으로 피하셔야 했지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저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기심과 폭력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 시대에 참된 평화가 너무나 간절합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평화를 간직하지 못한 채 남과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고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진정한 평화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그분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이웃과 나눕시다. 우리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서로 참아주고 받아들입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기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우리나라에, 이세상에 참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2010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 조 환 길 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님 성탄 메시지]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님 성탄 메시지]

 2010년 성탄 메시지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모든 생명체는 빛을 향하고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은 성장을 멈추고 죽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생명의 원천’(시편 42,3)이신 하느님을 빛이라고 했으며(1요한 1,5) 이 세상을 어둠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요한 1,4)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 때만 우리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밝게 비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요한 12,46)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빛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빛은 거짓과 무지의 어둠과는 반대로 특히 진리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빛은 이렇게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또 빛은 따뜻한 열을 전해주기 때문에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있는 그곳에는 빛이 세상에 드러나고, 미움이 있는 그곳에는 세상이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의 외양간에 세상이 기다리던 큰 빛이 나타났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영광은 당신 스스로 자신을 선물로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권세와 위엄을 스스로 포기하신 그런 사랑의 영광입니다. 베들레헴의 빛은 한 번도 그 빛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세기를 걸쳐 그 빛은 남녀 모든 사람을 비추었습니다. ‘그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루카 2,9) 이 아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솟구쳤던 그곳에 또한 사랑이 샘솟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연약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 용서의 베풂 등이 그러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들레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과 사랑과 진리가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바오로와 아우구스티노에서 켈커타의 마더 테레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인들을 보면, 우리는 베들레헴의 신비 곧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이 하느님을 향해 항상 새롭게 타오르는 사랑과 빛의 이러한 흐름과 여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아기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 세상의 폭력에 맞서시며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르십니다.”


 

(2005년 12월 24일 성탄 밤 미사 강론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누더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루카 2,6.12참조)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크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장 작은 분이 되셨고, 모든 것을 맘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조차 방어할 수 없는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이렇게 가난하고 작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가난하고 작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사람이 되시어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은 사랑 이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러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과 힘의 논리로 모든 가치 기준을 설정하려는 경향에 물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가치보다는 경제적인 효율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며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특히 약한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고 빼앗는 행위의 뿌리에는 ‘힘의 논리’와 ‘왜곡된 자유’가 있습니다.(생명의 복음 19) 그런데 이렇게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며 파괴하는 생명경시풍조를 조장하는 더욱 근원적인 이유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물질’(맘몬)을 선택하려는 현대인들의 혼돈된 의식 때문입니다.(마태 6,24참조)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어둠에서 해방되고 구원되는 길은 오로지 “생명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시고 “생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며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도록 합시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채웁시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약한 생명을 일으키고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시다. 우리 인간이 생명이신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의 빛으로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2010년 12월 25일 예수성탄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주교님 성탄 메시지]

“이 세상에 참 빛이 오셨네”(요한1,9)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삶의 여정에 주님 사랑과 희망의 빛이 늘 비추길 바라며, 여러분의 가정에도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세상의 희망으로 오신 예수님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의식할 뿐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도록 행세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더라도 도움 받는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마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적선을 베풉니다.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는 관계 안에서는 결코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발견하거나 인류애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과 억울한 이들, 슬픔과 고통에 잠긴 사람들과 당신을 별개의 존재로 보고 적선을 베풀지 않으시고 그들의 처지를 당신의 처지로 받아들여 함께 머물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안에 함께 머물러 주심으로써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희망과 힘을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이 세상의 참다운 삶의 희망이십니다. 우리 모두 참 위로자이시며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만을 나의 빛, 나의 희망이라 고백합시다.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또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루카 1,79)

 

세상의 희망으로 초대된 그리스도인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 안에 머무름으로써 당신처럼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마태5,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우리들을 통하여 당신의 빛과 희망의 불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힘겨울 때가 많지만 당신께서 우리의 희망이 되어주셨듯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들, 슬퍼하며 절망하는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사명을 실천하도록 파견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사명에 초대되어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그리스도인

 

많은 이들은 올 2010년 한 해가 민족의 평화와 번영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여 온 국민을 불안에 휩싸이게 하였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더욱 소외된 해였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폭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온 국민을 놀라게 하고, 또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숭고한 생명들의 어이없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혼란에 빠져 국민 모두가 상처 받은 사람으로서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인지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들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아픔 때문에 성탄의 참 의미보다는 분위기에 들떠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 시간이 더 힘들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포근한 손길이 이분들과 함께하시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다시 키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가 유가족들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연평도 주민들에게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따뜻한 위로와 힘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가 경제 제일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들어 공동선을 외면한 채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급급하였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소비하는 것에 매몰된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했어도 서로를 생각하며 부족하지만 작은 것이라도 나누었던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부유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에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은 나눔에는 더욱 인색해졌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 비정규직과 이주민 노동자들 같은 소외된 계층에 대해 우선적으로 배려해야할 정부조차도 이들에 대한 정책을 뒤로 미루어 두고, 반면에 가진 자들의 편에 더 기울어진 것은 아닌지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정책 기조가 경제와 효율에만 치중된다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결국 경제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경제가 우선시 되는 삭막한 상황에서 자신만이라도 살아야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든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암울한 어둠이 될 것입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이 아니라 약자들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위한 배려와 상생의 정책이 실행되는 나라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릴 뿐만 아니라 복음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 따라 우리 사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성탄이 주님의 희망이 나의 희망이 되고 나아가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목동들과 박식하지만 늘 참된 빛을 찾았던 겸손한 동방박사에게 당신의 오심을 먼저 알려주신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빌며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모든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10년 12월 25일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님 성탄 메시지]

2010성탄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14).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요한은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이 가장 가까이 따르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그 행동 하나하나를 샅샅이 살펴보았던 분, 그래서 그분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필립 2,7)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과연 나자렛에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1고린 2,9) 분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실 때에만 그렇게 놀랍고 신비스런 분이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도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계속 신비스런 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시며, 온 우주도 담을 수 없는 분이 짐승의 밥통 속에 담겨 계시고, 더 할 수 없이 풍요하신 분(요한 1, 16 참조)이 천대받는 인간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십니다(요한 4, 7 참조).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마르 16,19)이 제자들과 '함께 일하십니다'(마르 16,20). 그리고 보이지 않으시면서도 모든 사람, 특히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되고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과 감옥에 갇힌 사람(마태 25,35-36)의 얼굴 속에 지금도 그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안에'(요한 14,20) 계신가 하면, 아직도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묵시 3,20) 계십니다.

 

그분의 신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루가 21,5) 건물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두고“(요한 2, 21)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도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신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께서는 말씀이신 당신이 피와 살을 취하여 사람이 되게 하신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잘 간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리아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당신의 어머니 못지않게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루가복음 11장 27-28에 소개된 한 장면에서 두리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0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실 때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당신을 잉태한 자궁과 먹여 기른 젖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지킨다'다는 표현은 우리말에서도 '실천한다'는 뜻과 '남이 손상시키거나 훔쳐가지 못하도록 잘 간직한다'는 뜻이 있는데, 성서 원문은 여기서 이 두 번째 의미를 띠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을 풀어 보면, 여인이 남편의 씨를 받아서 손상되지 않도록 몸속에 잘 간직하면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 아기로 태어나듯이,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여 손상되지 않도록 잘 간직하고 보호하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천사를 통해 들려온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인 나를 몸에 잉태하여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특별히 부러워할 것은 없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잘 간직하면, 어떤 의미로, 말씀을 잉태한 나의 어머니처럼, 하느님 말씀에 자신의 피와 살을 입혀드리는 셈이 되고, 따라서 말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띤 사람은 누구나 말씀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혀서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에 관해서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의 하느님 말씀'(2008년 10월 5-26)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논의된 것을 정리하여 내놓은 교황 권고서 '주님의 말씀' 79항에서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이렇게 피력하십니다. '주교는 자기 사제들과 함께, 또 나아가 모든 신앙인들과 똑같이, 그리고 교회 자체와도 같이,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건네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씀을 듣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 머물러 그 보호를 받고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이 되시고, 그 뒤를 이어 신앙인이 성전이 되는 것과 같이, 마리아께서 말씀의 어머니가 되신 모범을 본받아 신앙인은 누구나 말씀을 받아들여 마리아와 같은 말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탄은 말씀의 탄생일만이 아니라, 마리아께서 어머니로 탄생하시는 때이며, 그분의 뒤를 이어 우리 신앙인 하나하나가 또 말씀의 어머니로 탄생하는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 복음 3장에 소개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복음선포 활동 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어떤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하고 알려드리자, 예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신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1-35 참조).

 

이번 성탄에 우리 모두 말씀을 세상에 낳는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그분의 형제, 자매,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서 빛과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합시다.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 성탄 메시지]

2010-12-24 10:36:01, 조회 : 43,


 

[군종 교구장 유수일 주교님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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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메시지] 2010년 교구장 성탄 메시지
이름 관리자(admin)
날짜 2010/12/20  10:41 조회 70
파일 2010년_교구장_성탄_메시지.hwp            
친애하는 교구 신자, 군종 사제 그리고 군종 교구를 위해 봉사하시는 남녀수도자 여러분,

북한에 의한 천안함 및 연평도 공격 등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겪은 가운데 금년 한 해가 저물고 있고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이 세상에 보내주신(요한 3,16 참조) 하느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고, 이 감사의 정신 안에서 현재의 고통마저 끌어안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 때 속령이던 팔레스티나의 베들레헴이라는 고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녀 마리아를 택하시어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 외아드님 우리 구세주를 동정으로 잉태하여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2위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통하여, 곧 한 여인의 몸을 빌려 오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발현하신다던가 웅장한 소리와 번쩍이는 빛 속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권능에 어울리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시기로 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기도문 중에 성 암브로시오가 쓴 “사은 찬미가”(떼데움)가 있습니다. 이 찬미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영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여, 당신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드님, 인간을 구하시려 몸소 인간이 되시고자 동정녀의 품 안을 꺼리지 않으셨나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에 있어 사람들을 통하여 또 인간의 길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인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구원 역사에 있어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사람을 출신이나 외모나 재능을 갖고만 평가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의 겸손만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방법을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에서 얼마나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아드님 예수를 탄생하게 하시는 장소로 왕궁이나 부유한 저택이 아닌 상상도 못할 장소, 가축들이 잠자고 여물을 먹는 구유를 택하셨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장소, 외롭고 춥고 짐승의 똥냄새 나는 장소, 그러나 순수한 장소인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기대 밖의 장소에서 아드님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구유는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한 탄생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뜻을 늘 찾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지극히 가난하게 탄생하신 것을 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느님께서 왕궁은 고사하고 여관방 하나 얻지 못하시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그 가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었다.”(2코린 8,9)고 말합니다.

가난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세계 도처에 너무도 많은 현실에서 가난만을 예찬할 수는 없습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극단적 가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직자와 수도자로부터 시작하여 좀 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살고 탐욕을 버리며 못 가진 이들과 나누는 청빈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경제사정과 관련없이 언제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나친 편리성, 지나친 효율성, 지나친 안정성, 그리고 지나친 고급성을 피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공통된 욕구일 것 같습니다. 청빈의 정신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욕구들을 조절하거나 억제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난한 탄생이 우리의 지나친 욕구를 조절하고 억제하는 은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여분의 것만이 아니고 내게 꼭 필요한 것들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청빈의 덕을 성실히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의 악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으로부터 이 덕을 실천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루카 2,7)라는 복음서의 기록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 외로운 사람들인 목자들에게 맨 먼저 전해졌고 또 목자들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맨 처음 경배하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이가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하겠지만 외로운 이들이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외로움”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심리상태입니다. 이 세상에는 일시적이든 장기간이든 외로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고독”인데, 저는 외로움 혹은 고독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고독과 하느님을 찾는 고독입니다.

옛날 수도자들이 고독을 예찬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오오, 은혜로운 독거여! 오오, 고독의 축복이여! 오오, 행복한 고독이여! 오오, 유일한 행복이여!” 이 예찬은 온갖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온갖 피조물에서 떠나 영혼 깊숙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축복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병이 되는 고독도 있습니다. 인정 못 받고 사랑 못 받고 소외된 이들이 겪는 고독입니다. 어떤 상황의 인간적 고독이든 이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성탄을 맞으면서 외로움,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 탄생이 진정한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외로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외로운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전달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구의 신자, 사제, 수도자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쁨과 감격으로 경축하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탄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을 관상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기쁨에 찬 이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에 젖은 이들에게 위로의 말과 기도를 선물로 보내면서 형제애 넘치는 성탄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2010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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