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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18일 Facebook 이야기

은빛강 2012. 2. 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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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속의 노래-9 [현대소설] - 박찬현

    등록일 2009-03-18 2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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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육신과 마음의 병균



    전 여사는 밤 행보가 끊어진 제일상회 여자로 안정세를 찾고 있었다.



    밤마다 피를 말리는 행보로 인해 신경쇠약이 왔었지만,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고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 했다.



    어둠과 함께 활개를 치며 득실거리던 병균이 DDT살충제 가루에 석회도 남기지 않고, 종자가 전멸 된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영미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서 앓고 있었다.



    자리를 펴고 누운 영미는 학교를 출석 할 수 없었다.



    전 여사는 김형욱에게 기별을 넣었다. 그도 이곳저곳에서 얻은 자식들로 늘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는 집으로 찾아 와보지도 않고 기별을 넣어서 서울에 있는 어느 병원을 찾아 가보라고만 연락이 왔다.



    전 여사는 잠시 상회 문을 닫고, 영미 동생 선미를 홍희네 집에 맡기고 서울 병원을 찾아 올라갔다. 그리고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서울 전화입니다. 잠간 기다리세요.” 전화 교환원의 목소리였다. 전화 선 너머로 무겁고 음울한 전 여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영미가 12살이 다 되어서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고 했다. 척추와 골반 뼈에 이상이 있어서 깁스를 할 예정이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통보였다.



    그렇게 근 한 달이 지난 뒤 영미는 가슴 밑에서부터 하체까지 흰 석고를 굳힌 깁스를 감은 몸으로 돌아 왔다.



    영미는 머리가 영특했고 손재주도 많았다.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로 방바닥에 엎드려서 만화를 그리거나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기를 좋아했다.



    전 여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많은 책들을 사주기도 했다.



    그녀의 두 딸들도 그대로 빼닮은 양 머리도 영특하고 창의성도 놀라웠다.



    전반적인 학교생활은 거의 리더십이 강했고 공부도 항상 수위권에 머물렀다.



    그러자니 언변도 전 여사를 많이 닮아 가고 있었다.



    영미는 무엇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을 정도로 군계일학의 면모를 일구어 가고 있었다. 선미는 아무래도 동생이다 보니 응석이 심했다.



    영미에게서 배울 점은, 많은 책을 탐독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졌고 여자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영미는 책을 통해서 얻었다.



    전 여사에게서 몸에 익히고 배운 것은 그다지 없다.



    그녀는 식사를 할 때에도, 수저가 치아에 부딪히는 소리를 냈고 입을 꼭 다물고 음식을 먹지 않아 ‘쩝쩝’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영미는 입을 꼭 다물고 곱상하고 복스럽게 식사를 했다.



    그녀는 식사 후 입을 헤 벌리고 성냥개비로 치아 사이 음식 찌꺼기를 제거 했고,



    영미는 칫솔질을 했다.



    그녀는 아주 종종 한 쪽 엉덩이를 들고 방귀를 소리 내어 방안 공간에 뿜었지만,



    영미에게서는 그러한 행위를 본 일이 없다.



    홍희의 어머니가 그녀 입안에서 깍두기 씹는 소리마저 잔소리 하는 것을, 영미는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다.



    책은 영미를 지적이고 차분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목발을 짚고 학교를 다녀도 단발머리 여중생인 영미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어려서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여인과 결혼을 한 ‘김 진호 박사’는 경제적으로 부강하지 않은 조국 고향을 위해 물심양면의 도움을 지원했다.



    김 박사가 엄청 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이 끝난 자락이고 자신도 어렵게 타국 땅에서 의학박사를 이수하기까지의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산재했으므로,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 이해를 하기에 마음 편히 자신의 조국고향을 위해 나름대로 마음의 희사를 하려 했던 것이다.



    외지에서 들어 온 교사들 가운데, 더러 몇 명이 그러한 정황을 몹시 껄끄러워 했다.



    초콜릿 몇 알에 손을 벌리며 따라가던 50년대 초입을 상상하며......,



    그 상황을 관망하는 여러 개의 눈 초점이 엇갈리었다.



    자국민을 거지 취급을 하는 것 같은 시각과 그래도 고향을 위해 일조를 한다는 마음을 높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나뉘었다.



    영미는 그 김 박사의 장학제도 수혜자이기도 했다.



    김 박사는 자녀가 없는 관계로 입양을 권유 했으나, 전 여사의 사고방식과 뿌리가 깊게 내린 사회주의 사상에서 용납이 되어 주질 않은 분야였다.



    물론, 전 여사는 부르주아라고 맹비난 이였고 지방 유지들은 그를 일국의 수상을 영접 하듯 환대 했다.



    아무튼 그는 고향 발전을 위해 초중고교에 많은 것을 희사 했다.



    영미는 그와 가끔 서신을 주고받았고......,






    영미는 전 여사의 의지대로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시험을 쳤다.



    지방에서 유학을 간 학생으로 내로라하는 여고에는 들어가지 못했어도 그래도 과히 나쁘지 않은 여고에 상위권으로 입학 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수석의 자리를 석권 했고,



    홍희의 오빠도 중학교 때부터 대도시 명문 중학교에 시험에 응시 해 일찍이 집을 나서서 학교를 다녔다.



    영미는 방학 때 마다 집에 내려 올 양이면, 한층 조신한 여인으로 거듭나서 돌아 왔다. 목발은 짚지 않아도 한 쪽 다리는 절뚝거렸다. 그것이 그다지 흉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사람의 내면이 아름답게 성장을 하면, 외양도 더불어 아름답게 울어나 보이는 것은 어느 누구의 시선에도 그렇게 보였다.



    여고생이 되어서도 영미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유복한 집안은 아니지만, 전 여사는 딸들을 훌륭하게 키워 내리라 생각을 한 듯 했다.



    타고난 두뇌도 그녀를 뒤 따라 주었고......,



    고3 여름 방학이 끝나고 영미는 서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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