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북-서적/내 서재

종묘제례악.1 박찬현

은빛강 2012. 7. 25. 14:31

 

 

종묘제례악.1 박찬현

[寬齋 성경린 선생님을 기억하며]

 

지구는 스스로 자전을 한다.

그렇게 자전과 동시에 태양계를 주 측으로 해서 수많은 행성들과 공전을 하고 있다.

지구 안에 핵이 존재하기에 상상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덩어리가 중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전을 행하고 있음이다.

그러한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들려오는 소리란 인체가 전혀 감지 할 수 없다.

아마도 너무 웅대하고 큰 소리는 우리들 귀에서 걸러졌음이라고 생각된다.

 

대저 소리란 깊은 곳에서 울림의 파장이 먼 곳 까지 전달되는 알림이다.

크고 작은 울림이 맞물려 소리로 일어나는 것을 음의 조화로움이며 화음이라고

단어는 정의 한다.

조화를 잘 이룬 화음을 들으면 인체 달팽이관이 인지하여 인간의 뇌로 전달이 되듯이

그 조화로운 화음은 많은 관현악기로 아름다운 음을 표출하는데 이것을 기록한 것이

음보, 즉 악보이다.

물론, 즉흥곡도 있겠지만 필요에 의해 만들고 집대성하게 조합한 악보는 오늘날 역사가 오래 된 것은 그것이 귀히 쓰이고 길이 보존 되고 있다.

 

오래전 만난 (무형 문화제 제1)종묘제례악 보유자지정(1964,12), 관재 성경린 선생님께서는 조선의 아악 (조선음악독본, 1947,5)(조선의 아악, 1947,7) 널리 보급하려는 동시에 국악 관현악을 집대성하게 집필(국악 개론, 1952)하였으며, 각별히 심혈을 기울이신 곳은, ‘국립 국악원.(1951)’ 설립과 국악 양성소.(1961)’ ‘국립 국악고등학교.(1972)’ 서울대학교에 예술대학 국악과를 개설 교수, 이화여대 강단에도 서셨다. 또한 많은 제자를 배출하기도 하셨음이다. (1994년도)에 관제 선생님 八旬 기념 논문집(국악 60년사)을 귀하게 받아 오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그 분을 뵙게 된 귀한 만남의 시간, 그 분께서는 그동안 모든 언론매체와는 인터뷰를 일절 사양하고 계신 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진의의 간략한 내용은 이러 했다. ‘國恩으로 종묘제례악을 하게 된 처지이므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일설이셨고,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이후로는 天恩으로 국악을 알릴 수 있게 된 일인데 어찌 사사로운 일인가,’ 하셨다.

해서, 관재 선생님은 한국의 국악 속에서 묻혀 지내셨을 뿐, 그 어떤 매체에도 존함이 일체 드러나 있지 않았던 주 내용의 진실이셨다.

또한, 중차대한 제례를 책임지고 계시기에 국은을 입은 몸 잘 건사하여야 한다.’하시면서

당시, 십여 년이 넘도록 매주 도봉산을 빠짐없이 등정하셨다.

 

아마도 근대사에서 마지막 황궁 종묘제례악을 보유 하고 계시다 떠나가신 것으로 생각 된다. 일제 강점기에 역사가 보존 되어 온 것으로 알려진 종묘제례악은, 宮內省 소속 李王職 亞樂부는 황궁의 제례 및 아악, 가무의 맥을 이어 왔다. 그리고 관제 선생님께서 조선의 아악을 일맥 요연히 정리하여 주신 점이 눈에 띈다.(국악고등동창회 편-관재 성경린 九旬기념 국악의 뒤안길, 2000)(노을에 띄운 가락- 나의 인생관, 1999) 중요한 과제를 묶어 내었으며, ‘李王職 亞樂의 참고 문헌으로 쓰이고 있다. 아마도 그 세월 역사의 한 층계를 기록하시며 를 가지고 천여 년의 역사를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 같이, 뿌듯함에 관제 선생님께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셨을 것이다. (2008, 3, 5, 97세를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2011, 9, 6, 관재 성경린 선생님 100주년 기념 연주회가 그 오랜 세월 양성한 제자들에 의해 열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행정기관인,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황궁 궁중 제례를 주관하는 李王職 亞樂’(1910),를 별개로 개설 해, 손을 대지 않은 점이 특이하게 주목 할 사안이나, 조선 왕실과 혼인을 맺은 일본 황실과 관계 정황을 미뤄 볼 때, 조선 왕실 제례를 다루 는 것이라 여겨 당시 범접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 된다. -직원록(職員錄)(1922)-

이 특별한 역사 속에서, 조선의 제왕들의 제례를 지내시며 조선 아악을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과 국악 발전에 일획을 그으신 관재선생님께서는 무엇보다 겸손과 제자를 아끼는 자비로운 사랑’ ‘自身에게 엄격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역사 속 한 인품과 동시대를 잠시 살면서, 인생의 귀감이 되는 인격함양의 어르신을 뵈었다는 점이 무한 기쁨이었다.

또한, 종묘제례악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그동안 묻혀 지내 오신 관재 성경린 선생님의 행보를 간략하게나마 재삼 기릴 수 있게 됨을 무한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관재 선생님께서 기록한 역사물과 그 분의 아름다운 영혼이 영원히 한국사에 길이 보존되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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