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2013년 2월21일 Facebook 첫 번째 이야기

은빛강 2013. 2. 2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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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내와 자선

    종교를 가진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 우선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실천이 뒤를 따른다.

    오래전에 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상당한 수전노 구두쇠이다.
    그는 한평생을 수고하고 고생한 아내의 질병에 돈 들어가는 치료를 거부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아내는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 속 한 모티브이다.

    소설 속 인물처럼 자신의 노고로 부유를 누리는 것은 개인의 몫이며 특권일 것이다. 또한 이웃에게 나눔을 하는 것 역시 자유의지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나눔의 자비를 권한다.
    나눔에 관하여 숙고하는 이가 있을 것이며, 나눔에 관하여 잘 몰랐던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성서는 나눔이라는 자비를 행하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눈 녹듯이 녹여 준다고 한다.
    외형상 우선 우리는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일이니 굳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좋은 일 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 그 긍정적인 이들은 마음을 열고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에 많은 일조를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들은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가는 생태를 지연 시킨다거나 선행의 소득 없는 논리로 일축한다.
    이러하듯 세상살이는 다양한 유형의 사고로 형성이 되어 있어서 굳이 시간을 낭비하며 소모전을 피하고자 하는 현대인이다.
    단지 그 몫을 우리는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남겨두는 입지가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현재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인성을 지닌 하느님의 외아들이 인간에게서 온갖 모욕과 수난을 받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분이 겪은 수난을 십분 이해하며 단식과 절제로 모은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생활을 한다.
    살면서 겪는 애로사항도 사실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수난의 길에 굳이 동참을 한다.
    왜냐고 또 굳이 묻는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삼위 일체이신데도 수난을 하셨다.
    원죄에 묶인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희생하셨고 자유를 부여 받은 인간이 그 자율의지로 죄 짓는 일이 없기를 바라신다.
    그러한 인간이 현재 죄를 범하지 않고 산다고 확실하게 답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혼의 청결함을 약속 해드리는 길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겪은 수난을 우리가 한 단계씩 이겨 나갈 때 주님은 세상 감실 속에서 한 겹씩 당신의 고통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내가 행하는 하나의 고통과 희생이 그분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큰 의미가 담겨져 있음이다.
    또한 그로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영원함으로 이어지는 영혼의 약속이기도 하다. 세상에 난무하는 죄 하나씩 소멸해지는 그것 역시 우리 죄를 기워갚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아끼는 것을 이웃에게 베풀 때도 그분의 고통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공로는 내가 살면서 정말 사람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을 때, 그 시간에 그분은 어김없이 갚아 주신다.
    지금 까지 살면서 그러한 현실을 자주 맞닥뜨리고 했다.
    물론 그 삶을 되돌아보면 다시 돌아가 살고 싶지 않은 일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대소사들을 기도 할 때 응답 해 주셨다.
    그러니 어찌 그분을 외면하겠는가,
    2천년이 넘은 역사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기 좋은 기회가 교회전례력인 이 사순시기이다.
    지금 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분의 고통을 깊이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이 은혜로운 침묵의 봉헌은
    자주 나태해져 가던 자신을 흔들어 깨우게 되는 귀중한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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