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인문학 스프- 패러디

은빛강 2016. 6. 25. 08:43

인문학 스프-패러디

횡설수설⑥ - 라쇼몽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30대 초반의 일입니다. 20대의 견문은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라는 걸 거의 모르고 지냈습니다. 일본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넘어서였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 대학에 막 자리를 잡고 <문학개론> 과목을 강의하려고 이런 저런 책을 보며 교재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유종호 선생님이 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실린 <화자와 시점>에 관한 글 안에 『라쇼몽(羅生門)』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통해 저는 비로소 일본문학과 영화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라쇼몽(羅生門)』(일본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平安京)에 있는 커다란 문이며, "라조몬(羅城門)"이라고도 부른다)이라는 새 문(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가 본 문안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법입니다. 이 글을 쓰려고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 보니 여기저기 연필로 줄을 긋고 깨알같은 메모를 남긴 것이 눈에 띕니다. 20여년 저쪽에 머물러 있는 자화상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 얼굴이 앳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유종호 선생님은 존경받는 당대의 비평가입니다. 그분의 글에서 가르침을 얻어 이립(而立)의 발판을 마련하는 학인, 문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일 겁니다. 턱없이 부족한 저를 소설가로 입신하게 해준 최종 심사위원이셨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좋은 책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훈도(薰陶)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인생의 은사(恩師)셨습니다. 당선 소감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이 글을 통해 선생님의 가르침에 크게 감사하고 있다는 심경을 전해 올립니다.

 

연전에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등을 한꺼번에 몇 편 봤습니다. 딸아이가 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다며 사서 보낸 것입니다. 그때는 이런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꽤나 인간 심리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감독이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 묶음에는 『라쇼몽(羅生門)』이 빠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그것만 따로 구입했습니다. 먼저 본 것은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해설하는 섹션이었습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본 영화를 먼저 보다가는 이내 실망하고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구로자와 영화가 지니는 일종의 ‘작가주의’가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DVD에 그런 섹션이 있어서 그것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작품의 원작이 사실은 「라쇼몽」이 아니라 「수풀 속」이며 몇 장면만이 표제작인 「라쇼몽」에서 따온 것이라든지, 감독이 카메라 운용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음영을 두어 어떤 효과를 만들려고 하는지, 각 등장인물들의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보고를 행하는 각 장면 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일본적인 이 영화가 서구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결국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해서 이것저것 부연 해설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설 중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감독은 보여주고자 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말은 <진실>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것이라는 걸 뜻했습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당사자들이 당면한 <현실>만이 있을 뿐,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진실>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 이를테면 실존주의적 세계관 같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유종호 선생님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라쇼몽(羅生門)』 부분의 글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저는 그 말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오직 <진실>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이 <진실>일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궁극적인 역지사지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감독은 끝내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그런 물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우리네 삶을 바라 볼 것을 구로자와는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끝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손에서 떨쳐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칼을 훔친 나무꾼의 말이 그래도 가장 진실에 가까울 거야. 약점이 있는 자의 말은, 그 약점을 제외하고는, 항상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으니까, 죽은 자의 말도 너무 작위적이야.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성성에 대한 묘사도 그래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잖아, 등등의 생각이 늘 뇌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역지사지’가 많이 부족했다는 걸 알게 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생각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생긴 미녀, 미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제 뇌리 속에 형성되어 있던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인물 형상들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인지는 설명이 곤란합니다. 어쩌면 황당하게 다가온 그 ‘못난 스토리’가 그런 선입견을 조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못난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생긴 것도 그럴 것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선입견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못난 인간의 생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결국 구로자와 아키라가 관심한 부분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질로 요약될 수 있는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그는 전후(戰後) 정체성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사회를 한 번 되짚어보는 차원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원작의 취지도 살리면서, 즉 일본인의 체면 중심 세계관이 빚어낼 수 있는 극단적인 디테일들을 하나의 매개로 이용하면서, 인간에게 과연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실존주의적 물음을 제대로 형상화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과의 접점(接點)을 획득함으로써 서구인들의 인정을 받아 이른바 명작(名作)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에 와서 『라쇼몽(羅生門)』의 영화로서의 작품성을 논한다는 것은 약간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영화는 6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야말로 고전(古典)입니다. 원작이 지닌 서사구조도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않습니다. 헐리우드의 잘 짜여진 반전(反轉) 영화에 익숙한 지금의 관객이나 독자들이 기대하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에 인생의 진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라는 이 영화의 주제는 지금도 꽤나 현대적입니다.

사족 한 마디 달겠습니다. 한 때 그렇게 몰입했던 『라쇼몽(羅生門)』을 정작 영화로 대면한 것은 책을 만난지 장장 20여 년이나 흐른 뒤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요? 상업성을 도외시할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순수문학자’의 박절한 심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것이 구축해 놓은 성곽이 워낙에 도도(滔滔)한 것이어서 감히 다른 볼거리(영화)로 그 감격을 희롱하고 싶지가 않아서였을까요? 그도 아니면, 그 때는 일본 영화를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때라 실기(失機)하고, 그 뒤로는 세월이 무심히 흘러 지금까지 그 감흥을 되살릴 길이 없었던 탓이었을까요? 아마 그런 것들 모두와 제가 알지 못하는(캐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어떤 것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에라도 20여 년의 세월을 한 줄로 다시 꿸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것이 즐거울 뿐입니다.

혹시 『라쇼몽(羅生門)』에 대해서 처음 듣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의 글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유종호)에서 뽑은 것입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 : 「수풀 속」은 1922년에 발표된 단편이다. 한 도둑이 남편과 함께 길을 가던 여인에게 남편 면전에서 성적 폭행을 가한다. 숲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어서 남편 되는 위인이 죽고 여인은 도망을 갔고 도둑은 붙잡힌다. 먼저 시체의 발견자였던 나무꾼, 도둑을 잡은 순검, 여행 중인 부부를 목격하였던 스님, 사위의 시체를 확인한 장모 등 네 사람의 간단한 진술이 전개되어 사건의 윤곽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 네 사람은 증인으로서 경찰 간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어서 작품의 중심인물인 도둑, 아내, 남편이 각각 모순되는 진술을 들려주고 있다. 시대는 12세기경으로 되어 있으며 남편은 사무라이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네 사람의 증언과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고 지문이나 작가편의 논평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작품의 초점은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엇갈린 진술에 있다. 도둑은 폭행을 가한 후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인 쪽에서 미친 듯이 매달리면서 <두 남정네에게 수치를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다. <살아남은 사람을 따르겠다>는 여인의 말에 살의를 느꼈고 묶여 있는 남편을 해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되어 남편을 풀어 준 뒤 칼을 돌려주고 결투를 해서 23합(合) 째에 치명상을 가했으나 그 사이 여인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죽였으나 여인은 살해하지 않았으며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극형을 내려달라면서 말을 맺는다.

한편 절간으로 도망간 아내가 참회하는 자초지종은 전혀 딴판이다. 도둑은 폭행을 끝낸 후 묶여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비웃었다. 남편에게로 달려가려는데 도둑에게 걷어차였다. 그때 남편의 시선에서 자기를 비웃는 차가운 눈빛을 발견하였다. 섬찟해서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편과 함께 살기는 틀렸다 생각하고 죽을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도 자신의 봉변을 목격했으니 혼자 남겨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께 죽어 달라고 하였다. 남편의 입에는 낙엽이 잔뜩 물려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죽여라>고 말했음을 알고 단도로 남편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 보니 묶인 채 남편은 숨져 있었다. 새끼줄을 풀고 그 자리를 떴다. 목을 찌르기도 하고 연못에 몸을 던져 보기도 했지만 죽지를 못하고 말았으니 관세음보살조차 자기를 버린 게 아니냐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녀는 흐느껴 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은 남편의 혼령이 무당의 입을 통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도둑은 아내를 범한 후에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상 남편과는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지 못할 터이니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유혹하였다. 이때 아내는 황홀한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처럼 아내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아내는 어디든지 데려가 달라고 하더니 <저이를 죽여주세요. 저이가 살아 있다면 함께 될 수가 없어요>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도둑조차 이 말에는 기가 차서 아내를 걷어찼다. 도둑은 <이 여자를 죽일까, 살려 둘까?>라고 물어왔다. 이 말만으로도 도둑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었다. 자기가 망설이는 사이 아내는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도둑은 새끼줄을 한 군데 끊어 놓고 그곳을 떴다. 아내가 버리고 달아난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얼마 후 누군가가 소리죽인 발걸음으로 다가 오더니 가슴의 단도를 빼었고 자기 자신은 영원히 어둠속으로 잠겨 버렸다는 게 무당의 입을 통해서 남편의 혼령이 토로한 자초지종이다. 여느 경우와는 다르게 세 사람이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각기 자기가 살해자라고 엇갈리는 진술을 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고 작자는 지문이나 논평 없이 일곱 사람의 진술만을 전해 주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은 모호하다.

영화의 표제가 되어 준 「라쇼몽」은 1915년에 발표된 짤막한 단편으로 작가(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첫 단편집의 표제가 되어 준 작품이다. 일본 국내에서의 성가가 높았던 편이다. 라쇼몽은 중세 일본의 서울이었던 경도(京都) 중심부의 거리 남쪽 끝에 있던 이를테면 저들의 남대문이다. 어느 해질녘에 한 하인이 남문 밑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진과 기근 같은 재앙이 연거푸 일어나던 흉흉한 시절이라 사람들이 시체를 이곳에 마구 버리기가 일쑤였다. 비는 그칠 것 같지도 않고 으슬으슬해 와서 하룻밤 쉬어갈까 하고 사나이는 층계를 올라 다락 쪽으로 올랐다. 한 노파가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처음엔 두려움을 나중엔 증오를 느꼈다. 웬일이냐고 다그치는 소리에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노파는 대답하였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노파는 시체의 머리칼을 뽑는 것은 고약한 일이지만 여기 굴러 있는 시체들은 그만 정도의 일은 당해도 싼 위인들뿐이라고 말하였다. 금방 머리카락을 뽑았던 시체의 주인공도 뱀고기 말린 것을 생선 말린 것이라고 속여 팔던 여인이었으니 굶어죽지 않으려고 하는 이 짓을 그녀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틀림없느냐고 비웃듯이 반문한 사내는 나도 이러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라며 노파의 옷을 벗겼다. 자기 다리를 붙잡으려는 노파를 시체 위로 걷어차고 나서 사내는 벗겨 빼앗은 노랑색 옷을 겨드랑이에 끼고 층계를 내려갔다.

위의 두 단편은 모두 「곤쟈구 모노가다리(今昔物語)」라는 옛얘기 모음책에 나오는 얘기를 자유롭게 변형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우리 문학에서도 김남천의 「장날」이란 단편은 「수풀 속」의 의도적인 모작으로 작자 자신이 작품 끝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영화 『라쇼몽』에서는 이 두 단편을 혼합하여 「수풀 속」의 모티브를 훼손함이 없이 한결 극단적으로 극화하고 있다. 우선 도입부터 반은 무너져 나간 라쇼몽을 보여주면서 나무꾼과 스님이 비를 피하는 사이 사흘 전에 목격했던 끔찍한 사건을 낯모르는 제삼자인 평민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나무꾼의 시체 발견과 경찰에의 제보, 이어서 경찰에서의 나무꾼, 스님, 순검의 증언에 이어 당사자 세 사람의 상반된 진술이 전개된다. 원작에 있던 사자의 장모가 빠진 대신 단편 「라쇼몽」에 나오는 하인이 낯모르는 평민으로 나와서 사건의 자초지종에 귀 기울이는 경청자 구실을 해서 관객이 사건에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영화가 원작과 크게 다른 것은 아내가 버리고 달아난 단도로 자진했다는 혼령의 말을 나무꾼이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깊이 개입되어 성가시게 될까봐 경찰에게는 숨겼지만 사자가 일본도로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예의 낯선 평민에게 말하는 것이다. 남편이 묶여 있는 사이 도둑이 여인에게 무엇인가 호소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가 새끼줄을 끊고 두 남정네 사이에 몸을 던졌다. 도둑이 칼을 뽑았으나 <말(馬) 잃는 게 훨씬 아깝다>며 싸우기를 거절하였고 도둑은 그곳을 떠나려고 몸을 돌리고 따라오는 여인을 물리쳤다. 그러자 여인은 두 남자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기를 위해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이니 잃어버린 절개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고 남편에게 들이대었다. 그녀의 말에 자극되어 두 사람은 마지못해 싸움을 벌였으나 그것은 결투가 아니라 볼품없이 야단스러운 난투였다. 마침내 남편이 죽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면서 찔린다.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리면서 도둑이 여인에게 근접하지만 거의 황홀경에서 싸움구경을 하던 여인은 그를 물리치고 도망간다. 도둑은 일본도 두 개를 집어들고 그곳을 떴다는 것이 나무꾼의 얘기다.

종결부에는 원작에 없는 삽화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노파의 옷을 벗기는 단편의 모티브를 변형한 채 채용한 것이다. 남문에서 비를 피하던 세 사람은 울음소리를 듣고 이어 한 구석에 버려진 갓난이를 발견한다. 먼저 달려간 낯선 평민이 갓난이를 싼 담요를 벗겨 들자 놀란 스님은 아기를 안아들고 나무꾼은 낯선 사람을 책망하면서 멱살을 잡는다. 낯선 사내는 아이를 버린 부모의 의무를 자기가 떠맡을 필요는 없다며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꾸한다. 자기가 가져가지 않으면 누군가 담요를 집어 가게 마련이라면서 왜 마지막 얘기를 경찰에게 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안다고 나무꾼에게 들이댄다. 손잡이에 보석이 박힌 단도를 채어갖지 않았느냐고 나무꾼을 면박하면서 낯선 사내는 담요를 가지고 빗속으로 사라져 간다. 스님과 나무꾼은 말없이 서 있다. 그러자 나무군은 자식이 여섯이니 하나 더 보탠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아니라며 갓난이를 받아 든다. 스님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돌려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남문을 떠난다. 그 사이 하늘은 개이고 스님은 집으로 향하는 나무꾼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난다. <라쇼몽>이라는 현판을 크게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중략]

극적 방법 :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는 「수풀 속」의 모티브인 진실의 모호성 나아가서는 현실 이해의 상대성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성적 폭행과 죽음이라는 격렬한 사건 정황이 우선 관객을 긴장감으로 충전시켜 준다. 그리고 나서 자기살해까지 포함하여 살인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강력히 제기된다. <누구 짓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나서 끈질긴 지연작전과 우여곡절 끝에 의외의 인물을 문제의 장본인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추리소설의 정석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끝내 장본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석의 파기, 그리고 범행 부인이라는 작중인물들의 일반적 관행과는 달리 스스로 범인임을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거동이 관객의 의표를 찌른다. 게다가 성적 폭행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여주는 기묘한 추종 역시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국면이다. 이 영화가 가진 호소력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리고 끝내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매력도 만만치는 않다. [중략]

현상이란 것은 이렇게 주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심하여 주관적 왜곡을 야기하는 수도 있다. 그때의 왜곡은 무의식적인 것이고 흔히 얘기하는 자기기만이란 사실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인 기만도 물론 있는 법이다. 영화에서 혹은 원작에서 당사자 중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세 사람의 당사자들은 체면이나 명예를 위해서 제가끔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직후의 이상심리 상태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착각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앞에서 현상의 해석성을 언급했지만 사실 우리의 현실이해가 구체적 세부의 낱낱의 검토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많은 부분이 상상력과 추리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의 발견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고 그 전모는 늘 유동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원작이나 영화는 이러한 진실 포착의 어려움 아니 그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성적 폭행과 살인(혹은 자살)이란 극한 행동의 사례를 통해서 분명하게 따라서 어느 정도 거칠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진실 포착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2차대전이라는 지속적 충격과 그것을 뒤이은 격렬한 동서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리둥절해진 구미의 지식인들에게 크게 호소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작품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과 추리를 통해 줄거리를 재구성한다는 일종의 창작과정에의 참여가 관중들에게 독특한 지적 만족을 주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