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인문학 스프- 패러디

은빛강 2016. 6. 23. 04:53

인문학 스프-패러디

횡설수설④ - 돈의 효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마 제목 덕도 좀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몹시 바라는 것들 중 제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은 무시해버려야 속이 편합니다. 배고픈 건 견뎌도 배 아픈 건 못 견딘다는 말도 있지요. 그만큼 인간은 ‘정신적인’ 동물이라는 뜻일 겁니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도 바로 그런 정황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옛날에도 어쩜 그리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해 내는 이가 있었는지 참 신통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노라면 사람 사는 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10여년 전에도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는 말이 한 번 크게 나돈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 주변에서입니다. 그때는 저도 그 말을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정말이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좀더 넓은 집, 좀더 크고 안락한 차, 좀더 때깔나는 비싼 옷, 좀더 달고 기름진 음식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살 수도 없고, 자식 공부도 살 수가 없고, 가정의 화평도 살 수가 없고, 돈독한 우정도 살 수가 없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정말 돈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들로 세상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 나이 들어 바랄 게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생도 없습니다. 나이 들어 궁핍한 삶은 젊을 때와는 달리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각박합니다. 내 인생에 행복감을 이식할 공간이 애초에 마련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느 정도는 돈을 꼭 가져야 합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노년에서는 정확히 진실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돈이 있어야 먹여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누릴 수 있는 수명도 달라질 추세입니다. 돈 없으면 친구들도 외면합니다. 가정의 화평은 아예 기대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돈이라는 관문(關門)’을 통과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습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반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바깥의 세상은 여태 그대로 있는데 저 혼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헛되도다’라며 뒤로 자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지금은 돈이 소중한 것이라는 걸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인생이라 ‘돈’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잘 들어오는군요. 200년 전에 화폐 무용론을 주장한 다산의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돈(물질적 풍요)의 효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는 화폐의 효용과 부의 편중에 대해서 따지고 있는 글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폐(錢幣)에 대하여 물음 : 대저 돈의 용도는 능히 물건에 따라 오르내리고 유무(有無)를 서로 교역하는 데 있으므로, 진정 국가의 큰 보배요 백성을 살리는 긴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옷감과 곡식은 무거움에 구애되고, 금은과 주옥은 희귀해서 걱정이므로, 귀천의 중간을 절충하고 빈부의 사이에 유통하기에는 돈처럼 편리한 것이 없다. 다만 그 수송이 편리해질수록 사기가 더욱 불어나고, 교역이 번창해질수록 사치가 더욱 넓어졌다. [중략]

오직 우리나라는 바다 한쪽에 위치하여 예부터 나라에는 돈에 대한 법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돈에 대한 이로움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병력은 부강하고 풍속은 순후하였으니, 이는 풍속이 소박하여 변통할 줄을 몰라서 그랬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지형도 삼면이 바다로서 뱃길이 교차되어 있으므로 교역할 때 수송이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돈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돈이 사용된 지는 이제 1백 40여년이 된다. 맨 처음 오영청에서 쓰기 시작하여 수원과 강화에까지 파급되었으며, 드디어 태농(太農)에서 주조한 돈으로 탁지(육조 가운데 호조를 말함)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수천 년 동안 막혔던 풍속이 이제 확 트이게 되었으니, 의당 백성들이 생업에 풍부해지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해져야 할 것인데도, 어찌하여 1백여 년이래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고갈되고 남북의 재화가 유통되지 않음으로써, 조그마한 이익을 다투어 풍속이 나날이 각박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벼슬아치의 탐내는 습관을 징계할 수 없는 실정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진실로 그 까닭을 따져 보면 돈에 허물이 있는 것이다.

전론(田論)을 논함 : 전지(田地)를 10경(1頃은 1백 이랑, 즉 백묘의 지적을 말함)이나 가진 어떤 사람이 있었고, 그의 아들은 10인이었다. 그의 아들 1인은 전지 3경을 얻고, 2인은 2경을 얻고, 3인은 1경을 얻고 나머지 4인은 전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울부짖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다면, 그들의 부모된 사람이 부모 노릇을 한 것일까?

하늘이 백성을 내어 그들을 위해 먼저 전지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군주를 세우고 목민관을 세워서 군주와 목민관으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산업을 골고루 마련해서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그 여러 자식들이 서로 남의 것을 강탈해서 제 것으로 만들고는 하는 것을, 팔짱만을 낀 채 눈여겨보고서도 이를 금지시키지 못하여 강한 자는 더 차지하고 약한 자는 떠밀려서 땅에 넘어져 죽도록 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과연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것일까?

그러므로 산업을 골고루 마련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한 사람은 참다운 군주와 목민관이고, 산업을 골고루 마련하지 못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하지 못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책임을 저버린 사람이다. 지금 나라 안이 전지는 대략 80만 결이고, 백성이 대략 8백만인데, 시험 삼아 10구를 1호로 쳐본다면 매양 1호마다 전지 1결씩을 얻은 다음에라야 나라의 재산이 고르게 분배되는 것이다.

지금 문관, 무관 등의 귀신(貴臣)들과 여염집의 부인 가운데는 1호당 곡식 수 천 석을 거두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1백결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바로 9백 90명의 생명을 해쳐 1호를 살찌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국 중의 부인(富人)으로서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 같은 경우는 곡식 1만 석을 거두는 자도 있는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4백결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3천 9백 90인의 생명을 해쳐서 1호만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벼슬하는 관리들이 부지런하고 시급하게 오직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주거나 그 재산을 골고루 제정(齊整)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은 군주와 목민관의 도리로써 나라의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

[정약용, 『목민심서』 중에서]

 

요즘 ‘99%와 1%’라는 말이 자주 매체에 등장합니다. 부의 편중은 여전한 우리 현실의 아킬레스건입니다. 또 ‘과거와 미래’라는 말도 자주 등장합니다. 선택에 따라서 과거로 회귀할 수도 있고 미래로 한 발 나갈 수도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200년 전의 다산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굴곡 많은 다산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200년 전의 현실은 ‘미래’를 선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밖에 되지 않았을까? 왜 200년 전의 역사는 그렇게 뒤로 갔을까? 식민지가 되고 분단국가가 되고 동족상잔과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때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뜬금없는 원망마저 듭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 가관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굳이 ‘여우와 신포도’가 아니더라도, 예나제나 사람 사는 형편은 늘 그 모양 그 꼴인 것 같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그저 ‘배 아픈 것’만 면해 보려고 안달입니다. 어쩌면 그게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