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106. 천개의 칼을 본 이후에야

은빛강 2013. 3. 28. 06:26

인문학 스프 – 싸움의 기술
106. 천개의 칼을 본 이후에야

대학 1학년 때의 일입니다. 평소 따르던 4학년 선배를 우연히 교정 한 가운데서(一靑潭이라는 작은 연못 주위였습니다) 만났습니다. 평소 저를 귀엽게 봐주시던 선배라 반갑게 인사를 했더니 이 선배가 아주 흥분을 해서 분(憤)을 이기지 못합니다. 까닭을 들어본즉슨, ‘새로 부임한 젊은 교수(강사?)가 수업시간에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저자인 劉勰(유협)의 이름을 못 읽어서 땀을 뻘뻘 흘리더라’는 겁니다. 아마 문예비평론 시간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디에선가 『문심조룡(文心雕龍)』이 나오고 저자 이름은 한자로만 소개되었던 모양입니다. 저야 『문심조룡(文心雕龍)』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던 때였으니 의아할 뿐이었습니다. 한자 이름은 본디 읽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였고, 특히 고대 중국의 인물 이름은 거의 암호(暗號)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실수는 젊은 연구자, 그것도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약관의 학자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배는 『문심조룡(文心雕龍)』이 어떤 책인데 문학을 한다는 이가 그유명한 책의 저자 이름을 모르냐는 겁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라고 강변했습니다. 아마 그 전에 이미 고전문학을 하시는 노교수님께 그 책에 관해서 자세하게 안내를 받은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선배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의 구약성서쯤 되는 책이 『문심조룡(文心雕龍)』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재서 교수의 『동양적인 것의 슬픔』을 읽다가 문득 그 『문심조룡(文心雕龍)』과 조우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베껴 써 봅니다(베끼기가 저의 특기라는 것은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고대 중국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인이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항상 그 옆에는 종자기(鍾子期)라는 친구가 있어 장단을 맞추었다. 어느 날 종자기가 세상을 뜨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진실로 음(音)을 아는 벗이 이제는 없으니 거문고를 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양(梁)나라의 비평가 유협(劉勰, 495~552)은 그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특별히 이 고사를 유념한 듯 「지음(知音)」 편을 두어 비평의 어려움을 이렇게 논하였다.

작품을 정확히 평가하는 일이란 진실로 어렵다. 작품의 본질 자체가 파악하기 힘들게 되어 있지만 그것을 완벽히 이해할 사람을 만나는 일 또한 어렵다. 그러한 일이란 천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知音其難成哉! 音實難知, 知實難逢, 逢其知音, 千載其一乎!)

다소 신비화되고, 과장된 느낌은 있으나 견식 있는 비평가의 부재를 못내 안타까워하는 심사가 역력하다. 그러나 유협은 개탄에만 그치지 않는다. 좋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덕목을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작품이란 다양해서 소박한 것도 있고 세련된 것도 있지만 보는 눈이 대개 편파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전면적인 이해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 대저 천 개의 곡을 연주해 본 다음에야 진정한 음을 알게 되고 천 개의 칼을 본 이후에야 보검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객관적인 관찰을 위해서는 우선 넓게 보는 공부가 필요하다.
(夫篇章雜沓, 質文交加, 知多偏好, 人莫圓該 …… 凡操千曲而後曉聲, 觀千劒而後識器, 故圓照之象, 務先博觀)
<중략>
제각기 편견을 고수하면서 온갖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동쪽만을 쳐다보다가 서쪽 담을 못 보는 것과 같다. (各執一隅之解, 欲擬萬端之變, 所謂東向而望, 不見西牆也)
[정재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 63~65쪽, 인용된 예문은, 유협, 「지음(知音)」,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가져온 것임]

‘천 곡을 연주해 본 다음에야 음(音)을 알 수 있고(曉聲), 천 개의 칼을 본 연후에야 보검을 식별할 수 있다(識器)’라는 대목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습니다. 많은 것을 본다(博觀)는 것이 결국 변화하는 것들의 이치(萬端之變)를 아는 첩경이라는 말도 심금을 울립니다. 옛날 학창시절의 그 문청(文靑) 선배가 왜 ‘『문심조룡(文心雕龍)』, 『문심조룡(文心雕龍)』’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현란한 서양의 문예이론에 경도되어, 『문심조룡(文心雕龍)』같은 고전에는 사실 눈길이 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심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구조주의 같은 것들이 마치 지식의 보고(寶庫)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탓에 지금도 논문은 늘 그런 서구식 방법론에 의지해서 끄적거립니다. 그렇지만, 다 써 놓고 보면 늘 허전합니다. 그저 한 가지 관점에서 저만의(저만 아는) 스토리텔링에 열중했다는 느낌밖에 없습니다. 늘 한 쪽만을 쳐다보며 다른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못한다(東向而望, 不見西牆)는 소회를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과연 몇 사람이나 그런 편파적인 글을 읽어줄 것인가라는 회의도 많이 듭니다. 며칠 간 논문 한 편을 끄적거린 연후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만, ‘보검’을 아는 경지가 언제나 도래할 것인가, 과연 생전에 그런 경지가 제게 오기는 올 것인가라는 좀 무거운 의무감(?)마저 듭니다. 오늘 만난 『문심조룡(文心雕龍)』이 제게 안긴 과제가 꽤나 무겁다는 느낌입니다.

사족 한 마디. 연전에 교생실습 지도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부설학교 말고도 협력학교가 많이 생겨서 처음 나가는 학교도 종종 있습니다. 쾌활하고 당당하신(?) 교장선생님과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수업발표가 있는 교실로 향했습니다. 수업발표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이 지도교수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왔는데 첫 순서인 제 명함을 보시면서 무척 당황스러워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노안이시라 명함 글자가 잘 안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교장선생님이 제 성(姓)을 틀리게 읽으시는 것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명함에 적힌 이름자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한자로 적힌 제 성이 순간적으로 도망을 가버렸던 것입니다.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한 바탕 소란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제 수업을 듣는 4학년 학생들이어서 더 요란스러웠습니다. 그냥 한 바탕 웃음으로 그 장면은 넘어갔습니다만, 저 또한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명함에 꼭 한글과 한자를 병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꼭 한자 이름 위에 자기 집안 나름의 발음을 표시하는 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유협(劉勰)만 어려운 이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