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양선규-문학개론

인문학 스프-싸움의 기술㊻ - 책을 걷어차라

은빛강 2012. 9. 28. 02:50

인문학 스프
싸움의 기술㊻ - 책을 걷어차라
어제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 가서 <저자와의 대화>라는 행사에 참여하고 왔습니다. 제가 쓴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라는 책을 두고 저자인 제가 몇 마디 말을 먼저 하고 그 후에 학생들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국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제가 한 말은 대략 이렇습니다.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심리학이든 사회학이든, 모든 책은 ‘이야기’일 뿐이니 (주눅들지 말고) 쉽게 접근해서 ‘득(得)’을 위한 것인지, 심심해서 하는 것인지, 욕을 하기 위한 것인지를 살펴서 그 이야기의 맥을 잡으면 됩니다. 그래도 이야기의 맥이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책(텍스트)을 걷어차십시오. 글자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펼치십시오.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됩니다. 무슨 생각이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책에, 글자에 연연해서, 그것만 파고들다가는 평생 제대로 책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법(法)보다는 때(時)가 먼저라는 옛 선인들의 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코드는 맥락 안에서 숨쉬며 살아갑니다. 그런 글쓰기가 가장 잘 되고 있는 곳이 바로 문학입니다. 시이고 소설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런 ‘글이 되는 과정’을 깨쳐 나가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읽다가 보면 저절로 쓰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집중적으로 글을 쓰십시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강 그런 취지로 말하고 필요한 예화를 몇 가지 들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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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책을 걷어차라’와 관련된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책 읽기에서 무엇보다도 ‘생각’이 중요한 이유로, 제가 대학원 입시 시험장에서 겪었던 ‘영어문장 해석’의 경우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그해에는 영어 시험이 해석 문제만 출제되었습니다. 네 덩어리가 나왔는데 두 덩어리만 해석해도 합격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어려웠습니다. 특히 첫째 문제는 더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아는 단어 몇 개를 연결해서 문장을 만들려다 보니 횡설수설, 제가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손을 댔습니다. 창작을 했습니다. ‘앞으로 도시의 모든 가구의 화기(火氣)는 중앙 통제식으로 바뀐다. 모든 집들은 모두 똑같은 불을 사용하게 된다. 스위치를 돌리면 파란 불꽃이 일어난다. 밤하늘의 화려한 별빛처럼 도시의 가구들은 밤마다 찬란하게 빛난다....’ 서두가 대충 그렇게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시가스를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연탄불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때였으니 도시가스라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만들고 나서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어릴 때 경험했던 자취생활이 그런 해석을 강요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연탄불 살리고 가는 일이 여간 고통이 아니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또 철학적인 내용이 나온 것 같았는데 그 부분은 지금 기억에 남아있질 않습니다. 시험장을 나와서 같이 시험을 본 서울의 명문대 영문과 출신인 고등학교 동기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에게 그 부분을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답은 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얼마 전에 본 칸트의 어떤 책에서 그 비슷한 구절을 봤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우주(창공)의 빛나는 별처럼 빛난다, 그런 이야기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했습니다. 철학적인 내용 앞에 무슨 주방기구 선전 문구 같은 내용이 나오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2차 시험(교육대학원)을 준비했습니다. 그때는 일반대학원에서 실패하면 교육대학원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시류였거든요.

마침 교육대학원 원서 접수 첫날이 일반대학원 합격자 발표날이었습니다. 저는 아예 포기하고 대학 본부 건물 앞 발표장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교육대학원 행정실이 있는 사범대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몇 걸음 가다가, 그래도 한 번 확인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시험 본 친구들 중에서 누가 합격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와 있었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제가 합격을 했던 것입니다. 합격자 이름 옆에 순위가 적혀 있었습니다. 가리는 종이를 그 위에 붙여놓기는 했습니다만 강한 햇볕에 노출되어 백일하에 순위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제가 1등이었습니다. 저의 답안지가 인문계열 안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겁니다. 전공 시험 점수는 각과마다 엇비슷하기 때문에 순위는 영어 시험에서 결정이 나는 거였는데 제 엉터리(?) 답안지가 그 중에서 제일 나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칸트를 몰랐던 게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책을 걷어찬 것이 오히려 행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책을 걷어차라고요. 내 경험으로 내용을 해석하라고요. 글자에 연연하지 마라고요.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연결하는 거라구요. 실제로, 그때의 그 경험이 그 후 저의 독서 생활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텍스트는 콘텍스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살아숨쉬는 것이 되는 것임을 그때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걷어차고 내 생각을 하는 그 순간 비로소 책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