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유식 평론가님 방

이유식 평론가-실천비평의 선두주자

은빛강 2009. 5. 23. 14:53

이유식 평론가-실천비평의 선두주자

▲ 이유식 문학평론가                                                     -설록. 박찬현 작화-

스토리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하여 한국문학방송을 창립하고 문학평론가와 수필가, 시인으로 널리 활동하고 있는 안재동 작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지난 2월 초였다. 메인스토리에 소개할 걸출한 분이 있는데 취재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평소 이유식 선생의 평론과 수필을 읽어온 터라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으니 4월에나 취재하여 5월호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하니 이유식선생께 그리 말씀드리겠다는 화답이다. 그리고 바쁜 일정으로 두 달이 훌쩍 지나 안 작가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이에 이유식 선생께 전화를 드리니 언제든 좋다고 하시면서 집에서 취재하는 게 좋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리하여 봄볕이 따사로운 봄날, 녹번역에서 지성찬 주간선생과 만나 삼성역 근처의 자택으로 찾아가니 사모님께서 직접 과일을 갈아 만든 음료수로 내놓으시며 정갈한 다과로 지성찬 선생과 필자를 맞으신다. 베란다를 보니 많은 꽃들이 생기있게 자라고 있었다. 꽃은 사람과 같아서 잘 돌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선물하지만, 무관심으로 내버려두면 집안 환경을 더욱 나쁘게 한다. 이유식 선생께서 평생 교단에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위해 애쓰시고, 많은 꽃을 피워내셨으니 그 기술이 꽃에 접목되어 이릴게 화초가 아름답게 자라나 싶어 기분이 좋다. 선생은 베란다에 커튼 대신 생화로 대신한다고 하시며 화단 자랑이 대단하시다. 거실로 서재로 집필실로 두루 구경을 시켜주셨는데, 학자의 집답게 내가 좋아하는 책 냄새가 그 어떤 향기보다 더욱 기분 좋게 만든다.

▲ 김순진 시인(스토리문학 발행인)과 이유식 평론가(우)

이유식 문학평론가는 최연소 학생문학평론가로 데뷔(23세 때)하며 48년간 전후 제1세대 평론가 중 한 사람으로서 선두주자로 활동해왔고 아직도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4년 정년퇴임 후에도 왕성한 문단활동을 하고 있으며 세미나의 주제발표와 좌장 등을 가장 많이 해온 논객이다. 그는 학연과 지연의 아무런 뒷받침도 없이 혼자 힘으로 자기 비평세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문단활동에서도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부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강남문인협회 창립 초대 회장 등을 거치면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 이유식 평론가
그의 비평활동은 특히 소설과 수필이론을 개척함과 동시에 실천비평에도 큰 몫을 담당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궤적은 주로 60년대에는 시비평, 70년도와 80년도에는 소설비평, 그리고 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수필비평을 하면서 많은 수필을 남기고 있다. 이유식 선생의 48년간 문필활동을 총 결산해보면 2009년 현재, 일반평론 130여 편, 세미나 주제발표 평론 40여 편, 평설 100여편, 월평 100여 편, 수필 및 칼럼 등 총 700여 편을 써왔다. 저서로는 선집을 포함하여 평론집 8권, 수필집 8권, 편저 4권, 평전 2권, 공저 1권 등 총 23권의 저서를 내는 등 끊임없이 창작 및 문학평론에 임해오고 있다.

선생의 본관은 합천이고 선생은 7대 종손이다. 시조 할아버지 이개李開는 서라벌 6부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고려 개국 초에 가수嘉樹 호장戶長을 지냈고 강양(江陽:지금의 합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합천이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세계世系를 계승해 오면서 가세가 번창하여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를 포함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 병사공파兵使公派 등 크게 11파派로 갈라져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판 윤검允儉의 아들로 이조정랑을지낸 희민希閔, 검열과 대교를 거쳐 수찬을 역임한 희증希曾, 학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희안希顔의 3형제를 들 수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합천 이씨는 남한에 총 23,951가구, 98,5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출처:네이버 검색)

▲ 이유식 평론가(우)와 현동순 여사(좌)

선생은 부인 현동순玄東順(전직 교사) 여사와의 사이에 큰아들 광호光皓(게임개발회사 팀장), 자부 하지원河智媛(교사), 둘째아들 기섭寄燮(국세청 근무. 미혼), 딸 은주銀珠(출가) 등 2남 1녀가 있다. 그럼 여기서 이유식 선생과의 취재 내용을 대화체로 싣는다.

김순진 : 선생님 오늘 이렇게 저희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이유식 : 하하.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정말 악동이었습니다. 뱀 허물을 여학생의 책상 속에 몰래 넣어 두었다가 자지러지듯 놀라는 표정을 보며 좋아하기도 했고, 물을 길어 가지고 가는 처녀의 길에 허방을 파 나뭇잎으로 덮어놓았다가 헛디뎌 벌렁 넘어지게도 했지요. 더위팔기나 제웅 속에 돈 빼먹기 등은 주로 한 장난이었네요.

지성찬 : 아주 개구쟁이 소년으로 자라셨군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이유식 : 아버지는 일제 말기에 징용을 가지 않을 방편으로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산청군 단성면에서 잠시 면서기 일을 보다가 할아버지가 한약국에만 전념하셔야 했기에 해방을 하자 농감農監을 하려고 곧바로 고향에 돌아오셨습니다.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먹물이 들어갔으면 경찰관, 군인, 일반관공서 관리나 반공단체 인사를 제외하고는 무슨 유행열병처럼 마르크스와 레닌의 붉은 사상이 퍼져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골수분자는 아니었고 심정적 동조자였다는 것이 후일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가 생겨 그 조직에 가입하면 면죄부를 주며 과거 전력을 일체 불문에 붙인다고 해서 자수를 하였는데 그것이 날벼락이 되었지요. 지서로 붙들려가게 되고 그해 7월 9일 하동경찰서로 이송되어 죽임을 당하셨나 봐요.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집을 나가시던 날짜 7월 5일을 기일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아주 외롭게 지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키우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우리들을 밥상머리에서 바라본 할머니와 어머니는 측은스러워 한숨을 내시면서 '어서 먹고 얼른 커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는데 몇 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그 외로움은 하늘을 찌릅니다. 

▲ 김동리 선생의 친필 가훈
김순진 : 선생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나요? 처음부터 문학을 좋아하셨나요?

이유식 : 저는 고등학교 시절, 영화평론가나 아니면 외교관이 되고 실었습니다. 영화잡지를 보면서 또 영어에 흥미를 느끼면서 그려본 나의 미래의 자화상이었지요. 이런 청소년 시절의 내가 평론가 겸 수필가, 교수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평론가나 문학평론가는 같은 평론의 장르이고, 또 외교관 역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저의 직업 수단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지요. 사실 제가 처음부터 문학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교관의 꿈을 갖고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이는 W.B 예츠, T.S 엘리어트, 월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사르트르, 까뮈 등의 시인과 작가를 접할 기회가 된 것이지요. 그들의 찬란한 문명文名에 반하여 문학지망생이 되게된 것입니다. 대학 1학년 2학기 초었습니다. 평론이 무엇인지 분명한 장르의식 없이 무작정 한 편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대학국어』에 실려있는 김동리의 단편 「바위」를 분석해본 글이었는데 당시 제가 공부하던 과목 『문학개론』은 작가이기도 한 김정한 교수가 맡고 있었는데 국문과와 영문과의 합반강의였습니다. 강의가 있었던 어느 날 오후 연구실로 찾아가 원고를 보여드리며 '평을 좀 받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강의실로 곧장 갔는데 교수님께서 곧바로 강의시간에 평을 해주셨습니다. 과분할 정도의 칭찬을 받으면서 '바로 이런 것이 평론이로구나.'를 생각하면서 평론가의 자질이나 잠재능력이 있구나 싶어 그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된 셈이지요.

지성찬 : 《현대문학》지를 통해서 문단에 나오면서 조연현 선생님의 추천을 반으셨다면서요?

이유식 : 네. 저를 추천해주신 조연현 선생님은 만난 적도 없고 소개받은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분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를 다니던 제가 응모를 통해 원고를 보냈고 1,2회를 추천해주셨으니 은인이라 할 수 있지요. 조연현 선생께서는 "이유식씨의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을 추천한다. 현대정신의 기본적인 지향을 모색해보려는 이 논문의 주제와 그 착안점은 그것이 비록 기존의 어떤 철학적 조류의 모방이나 공감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필자는 앞으로 자기가 지는 그 관념적 과잉을 어떻게 좀 더 효과적으로 정리할 것인가 하는데 한층 주력해야 할 것이다. 정진을 빌어 마지않는다."라며 격려해주셨어요. 추천 후 1년 만에 현대문학사를 찾아가니 조현현 선생은 안 계시고 편집장이셨던 오영수 선생과 박재삼 선생이 계셨어요.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하자 반갑게 맞이해주셨지요. 퇴근 시간이 되자 박재삼 선생이 데리고 나가서 막걸리를 사주었습니다. 처음부터 굵직한 문인들을 만났으니 당시 나의 문학적 사기는 충천했다고 할 수 있지요. 

김순진 : 교수님의 평론을 크게 구분해본다면 어떻게 구분 지을수 있을까요?

이유식 : 제 평론을 본격적으로 정리하자면 저는 첫째, 현학적 비평론에 머물지 않고 본격 비평작업으로 소설과 수필이론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둘째, 신문 잡지의 월평, 작가론이나 작품론을 많이 기고하여 실천비평에 앞서왔습니다. 셋째로는 비평적 에세이를 통한 인간과 사회, 문명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지요. 넷째로는 문단활동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간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평론가협회 회장, 강남문인협회 초대회장 등을 지내면서 한국문단에 기여하려 애썼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저를 통하여 상당수의 비평가와 수필가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론비평이 허약했던 한국평단의 실정을 감안해보아 물론 실천비평가로도 남아야 하겠지만 이론비평가로도 남고자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설이론과 수필이론을 정립하고자 애썼으며, 시론에도 관심을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내 비평과 수필이 좋아야하겠기에 문학의 완성도를 높이려 애써왔지요.

▲ 정년퇴임 기념문집 봉정식 (2004년)

지성찬 : 선생님께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요?

이유식 : 본격적으로 수필을 써본 것은 사실 신진평론가시절부터입니다. 그 당시는 이어령씨가 경향신문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연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뒤라 각 신문사 문화부에서도 에세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무렵 저는 부산에 있었는데 문학시평이나 칼럼을 국제신보에 가끔 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원고를 전해주려고 문화부에 들렀더니 아동문학가인 최계락 문화부장이 연재 에세이를 써볼 용의가 없느냐고 해서 써 본 것이 바로 첫 테마 에세이 『회색 자화상』(한국인의 프로필)인데, 그때가 64년이었지요. 매주 1회씩 20여회가 나갔는데 반응이 좋아 수필장르에도 차츰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70년대 초부터 서울생활을 하게 되면서 월간《동아정경》에 칼럼을 연재했고, 74년에는 《신여원》에 여성을 소재로 에세이를 약 1년간 연재했으며, 89년에는 역시 테마에세이「유행가에 나타나는 세태」를 주 1회씩 8개월간 연재했습니다. 90년도에는 월간《통일세계》에 1년간 연재 에세이를, 90년도와 91년도에는 월간《농지개량》에 매월 2편씩 48편의 수필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종합지나 문학지의 청탁에 글을 썼는데 그런 창작활동이 선집 2권을 포함해서 8권의 수필집을 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겁니다. 

김순진 : 선생님의 수필은 대체로 어떤 경향을 띄나요?

이유식 : 내 수필은 다분히 중수필적인 경향을 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평가로서의 연장선상에 있어서의 창작행위라고 할 수있지요. 40여 년 동안 본격평론과 월평 등을 쓰면서 몸에 밴 습관이라고나 할까요? 칼럼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수필의 한 영역이고 이는 중수필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비평서인 『흘겨보기와 예쁘게 보기』에 실린 칼럼의 제목만 보아도 <문단의 권위주의>, <문학활동의 자구책>, <문학상 심사방법의 제고>, <오염되는 한국시>, <수필계를 위한 몇 가지 제언>, <시인의 장르 넘나들기>, <장르 바꾸기>, <번역현황과 노벨상의 기대가치> 등 뚜렷한 문명의식을 지닌 지성인의 문화현상에 대한 중수필적 비평 활동이라고할 수 있지 않나요?

▲ 예총 예술문화대상(1997년) 수상기념

지성찬 : 수필가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할까요?

이유식 : 훌륭한 수필가가 되려면 우선 필요충분 조관과 응분의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풍부한 인생경험과 폭넓은 지식정보, 과부족 없는 상식 쌓기가 그 조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에다 상상력, 연상력, 직감력, 분석력, 추리력, 창조력, 유머와 위트감각 등 일곱 가지 자질을 갖춘다면 최고의 수필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생경험이야 물론 사는 행위 자체가 경험의 축척이니 무상으로 얻는다지만 이에는 연상력이나 추리력을 동원해야 하지요. 그러나 지식정보나 상식의 경우는 반드시 노력투자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많은 독서를 필요로 합니다. 독서체험이 깔려있지 않은 수필은 단조롭고 건조해서 맛이 나지 않습니다. 윤기가 없고 마치 양념이 골고루 들어가지 않은 음식 같습니다. 좋은 음식에는 좋은 양념이 들어가듯 독서체험이 글을 어느 행간에라도 들어가거나 배어있으면 글이 빛나며 맛을 내게 합니다. 좋은 수필을 쓰자면 첫 번째가 독서요. 두 번째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한 정보와 자료의 입수요, 세번째가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 얻기입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좋은 수필을 쓰며 훌륭한 수필가가 될 것입니다. 

김순진 : 수필 쓰기에 대한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강남문인협회를 창립하셨다면서요?

이유식 : 네 그렇습니다. 참 세월이 빠름을 느낍니다. 강남문협을 창립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말이에요. 약 20년 전의 강남은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강북의 사정처럼 오래된 마을이 아니었고, 다들 새로운 곳으로부터 이사를 들어온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인적자원이 많았습니다. 95년도 말쯤 몇몇 문인들이 모여 '강남골 시문회'를 만들어 낭송회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이왕에 이런 모임이 생겼으니 보다 조직적인 문학회를 갖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냈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나보고 깃발을 들어보라고 해서 강남문인협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력 끝에 100여 명의 문인들을 동참시켜서 1995년 5월말에 창립총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저는 호천되어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반기부터 《강남문학》창간호를 내기로 하였지요. 그래서 구청 관계자를 만나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관계자는 원고를 모아주면 원고료를 지불하고 강남구청의 명의로 책을 내겠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펄쩍 뛰면서 그렇다면 우리 자력으로 내보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구청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원고료와 제작비 일체를 지원해주겠다'는 확답을 얻어냈습니다. 이로써 가속도가 붙어 11월에 창간호가 나왔고 12월에 하객과 회원 200여 명이 구민회관에 모여 출판기념회 겸 송년회를 하게 된 것이지요. 제가 문단활동을 해오면서 강남문협의 창립을 주도했다는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현대문학상 수상기념(1971년). 박영준 조연현 김동리 오영수 박두진 등과

지성찬 : 선생님께서는 고향인 하동군 옥종면에 면가面歌를 지어 선물하셨다면서요?

이유식 :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고향이라는 게 어머니 같아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곳이지요. 저도 서울이라는 타향에 나와 살면서 70이 넘는 나이가 되었지만 고향이라는 이름은 언제 들어도 눈물이 핑 돌 정도입니다. 사실 출향인 출신으로서 고향을 위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번듯한 도서관이라든지 회관을 짓거나 도서관에 다량의 양서를 기증해주는 일 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쟁이가 회관을 지어주거나 도서관을 지어 기증하는 일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해볼 일입니다. 또, 책을 기증하는 일도 벅찬 일이지요. 그래서 고향을 빛나게 해주고 싶어 고향에 대한 글을 많이 써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김성봉이란 좋은 작곡가 겸 가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1989년도에 일간 스포츠서울에 8개월 동안 <유행가에 나타난 세태>란 테마에세이를 연재한 바도 있고 해서 늘 노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터였습니다. 때마침 기회가 되면 작곡을 부탁해보리라 생각하고 작시해 놓은 옥종면가가 있다며 김성봉 작곡가에게 말했더니, 나의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노랫말을 보내달라고 하여 성사가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김정봉 작곡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전국에는 1,211개의 면이 있는데 면가가 있는 곳은 아마도 우리 옥종면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옥종초등학교 총 동창회 기수별 체육대회에 갔는데 옥종면가가 흘러나왔고 면단위 행사시에나 각 마을의 아침방송에 이 노래가 흘러나올 것을 생각하면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저는 고향 옥종을 배경으로 한 자전 에세이집『옥산봉에 걸린 조각달』을 펴내기도 했는데, 그런 저런 일들로 옥종면으로부터 받은 감사패는 제가 사회에 나와 수없이 받아온 상장과 상패, 감사패, 임명장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 펜클럽 세미나 주제 발표(1990년). 이어령 교수(가운데)와

김순진 : 끝으로 다양한 문화매체 및 놀이문화에 눌려 문학이 점점 쇠퇴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문학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구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유식 : 네, 아주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현 시대는 인터넷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실상부한 인터넷 시대에 우리도 이젠 작품발표 매체를 활자매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자기 이름 알리기 정도의 수동적 관행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좋은 작품을 인터넷 공간에 발표하고 문인들끼리 연합하여 문학 콘텐츠를 구축하거나 개인적으로라도 카페나 커뮤니티를 개설하여 시, 수필, 소설 등을 연재해 보아야 합니다. 그밖에 여러 제휴방법을 찾아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인터넷 문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시점입니다. 또한 문화 환경이 많이 변화한 만큼 전통적 문학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야 합니다. 지나친 상업주의 문학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대중성의 확보도 문학을 지속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학작품도 생산자와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구매의욕을 촉진할 그 무엇을 발견해 내야 합니다. 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자체적으로 창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컨소시엄을 이루어 작품을 생산해 내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저는 이를 태교비평胎敎批評이라 명명하여 제안한 바 있습니다. 작가가 한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면 착상과 구상, 그리고 구성단계가 바로 회임단계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집필이라는 산고기간을 거친 출산입니다. 그러므로 산후비평 즉 작품이 탄생된 후에 비평하는 것만 택할 것이 아니라 평론가와 작가가 합심하여 작품을 만들어내는 산전비평産前批評과 태교비평도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김순진 : 오늘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문학지로 승부하여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토리문학지가 되겠습니다. 

다음은 이유식 선생에 대한 문단의 평가와 함께 독자를 위하여 짧막한 평론 1편을 싣는다. [☞관련작품(클릭)☜]

문단의 평가 

1963년에 발표된 그의 윤동주론은 윤동주 시의 나르시스적 요소를 지적한 점, 아웃사이더 심리경향을 파악한 점, '들여다보기'를 중시한 점, '방'의 이미지를 지표화한 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윤동주 시연구의 선구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우리의 평단이나 학계에서 거의 구호로만 겉돌던 형식주의 소설비평 방법을 이유식 교수가 직접 작품을 통해 시험해 보았던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 우한용(평론가, 서울대 교수)

이유식 교수가 형식주의적 방법으로 비평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평단 일각에서는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 지금 와 뒤돌아보면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 비평과 문학연구, 나아가서 문학교육의 불구적 측면에 대한 근본 반성의 실천이라는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지금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고 있다. 
- 정호웅(평론가, 홍익대 교수)

이유식 평론의 궤적은 60년대에는 시에, 7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에는 소설에,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수필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오고 있다. 가령 <허구의 수용과 현대수필의 새로운 모색>은 허구이론으로서는 가장 앞선 것이다. 그들의 우리 수필문학을 가장 신속하게 증언하고 고발하며 또 길을 터주는 대화 광장의 유능한 좌장이 바로 평론가 이유식이다. 
- 이현복(수필학 박사, 전 경인교대 교수)

이유식은 문학평론가이면서 드물게 수필문학의 이론 개발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한국수필의 독자성과 창작이론 개발을 위해 노력해왔다. 본격적인 의미의 수필이론이 정립되지 못한 우리 수필문단의 사정으로 보아 매우 큰 공헌을 했다. 
- 한상열(수필평론가)

민족문학의 개념정립과 영역 설정의 문제, 세계 문학속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우리 민족문학의 길찾기, 새로운 세기의 사회변동과 이에 대한 우리문학의 대응자세 등을 모색하기 위한, 이유식의 비평행위에 대한 해석과 펑가는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크다
- 김봉군(평론가, 전 카톨릭대 교수)

이유식은 영미문학의 세례를 받은 비평가이다. 가령 <한국소설의모두·종지부론>, <김광균 시의 플롯 구조원리>와 같은 대표적인 평론에서 보듯 그는 분석적인 틀에서 자신의 문학적 논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그의 비평은 70년대 이후 아카데믹한 비평이 나아가는 터전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전기철(평론가, 숭의여대 교수)

▲ 이유식 평론가의 가족사진

이유식 문학평론가 연보 
1938년. 아버지 이창李滄 선생과 어머니 심경두沈敬斗 여사와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경남 산청군에서 출생, 하동군 옥종면에서 성장함.
1957년. 진주고등학교 졸업.
1961년.《현대문학》으로 평론가 데뷔.
1964년. 부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64~1966년 월간《세대》편집기자.
1970년. 제1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70~1978년. 외국어학원(서울) 원장.
1979~1981년. 한국관광공사 교육원 교수.
1983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3년. 한국문학평론가헙회상 수상.
1983~1984년. 배화여자대학 교수.
1983~1989년.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이사.
1988년. 세종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89~1995년.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90~1998.《수필문학》상임 편집위원장.
1994년. 한국비평가협회 회장.
1995년. 제4회 우리문학상 본상 수상.
1995~1998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96년. 강남문인협회 초대회장. 배화여대 교수협의회 초대회장.
1997년. 강남문화원 창립이사.
1998년. 한국민족문학회 창립고문.
1998년. 제10회 남명(조식)문학상 본상 수상.
2002년. 제39회 한국문학상 수상.
2004~2006년. 하동평사리 토지문학제 추진위원장.
2008-2009년 현재.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상임고문, 강남문인협회 고문. 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 청다문학회 이사장. 덕성여대 평생교윽원 수필창작반 초빙교수

수상
현대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우리문학상 본상. 예총 예술문화 대상(문학부문). 남명(조식)문학상 븐상. 한국문학상. 

평론집
『한국소설의 위상』(이우출판사). 『우리 문학의 높이와 넓이』(교음사). 『오늘과 내일의 우리 문학』(박이정). 『흘겨보기와 예쁘게 보기』(박이정). 『전환기의 새로운 길 찾기』(박이정). 『한국문학의 전망과 새로운 세기』(국학자료원). 『반세기 한국문학의 조망』(푸른사상사). 『변화하는 시대의 우리 문학 엿보기』(푸른사상사).

수필집
『벌거벗은 교수님』(창우사). 『노래』(문학아카데미). 『그대 떠난 빈자리의 슬픔』(장원). 『찻잔 너머의 여자』(교음사). 『내 마지막 노을빛 사랑』(문학관). 『세월에 인생을 도박하고』(문학관). 『남자 뺨을 때리는 여자들』(소소리). 『옥산봉에 걸린 조각달』(한누리미디어)

평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문학』(이목구비사). 『알베르 까위의 문학과 인생』(이목구비사)

편저
『나의 작품, 나의 명구』(한누리미디어).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문학과 현실사). 『저 빛나는 인생길의 합창』(문학관). 『저하늘에 사랑등불 매달고』(공저. 푸른사상사)

참고도서
김봉군 편저『반세기 한국문학의 전개』<이유식의 문학세계>(푸른사상사)
문효치 편저『꿈을 쫓는 로멘티스트』<이유식과 나>(푸른사상사)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5월호 '메인스토리' 수록]

■ 김순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