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향기/마재성지

[스크랩] 비극의 순교지 하라 城

은빛강 2010. 3. 22. 18:00

화산재해마을을 떠난 버스는 약 30여분을 달려 하라 城 터에 도착했다.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가톨릭 뿌리를 뽑았다 할만큼의 비극의 하라城 터.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입국 이후 30년 동안

일본에서의 선교 영역은 서쪽으로는 나가사키로부터

동쪽으로는 교토지방까지 넓혀졌고,

  기리시탄은 10만 명을 넘을 만큼 성장했다.

 

1579년 순찰사로 일본에 들어온 발리냐노 신부는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해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세웠다.

 

信者 다이묘(大名 :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의 옛 영지로

주민 대부분이 신자였던 시마바라 반도도 신학교와 수련소,

병원이 있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사건은 새 영주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의 핍박에서 비롯 됐다.

마쓰쿠라는 성을 짓기 위해 주민의 노동력과 막대한 세금을 착취하며 기리시탄을 탄압했다.

흉년과 기근이 심했던 1637년 기리시탄 임산부가 체납을 이유로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는 고문을 당하다 죽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을 계기로

일대의 신자들과 주민들이 봉기 해 난을 일으킨 것이 '시마바라의 亂'이다.

 

3만 7천명의 봉기군은 16살 소년대장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의 지휘로 

막강한 12만명의 에도 막부군과 맞서 90일 동안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다.

 

1638년 2월 27일 아마쿠사 시로가 전사하고 다음 날 城이 함락되어

부녀자를 포함한 3만 7천 명이 비운의 죽음을 맞았다.

막부군은 남겨진 부녀자들도 신앙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생매장하거나 참수 했다고 한다.

아마쿠사 시로의 머리는 나가사키로 보내졌으며,

막부군은 하라 성이 다시 반란 거점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철저히 파괴 하였다고...

 

하라 성 유적지  안내 표지

성 터로 오르는 비탈길

 

시마바라 성 축조를 위해 많은 돌을 채취해 가고 기초 성 축대만 남았다.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天草四郞時貞)의 묘비↑와 안내문↓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時貞)의 묘비는 1898년 당시 西有家 타운

민가와 해안 경계 돌담 밑에 파묻혀 있던 것으로 그 민가의 3살된 아이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앓고 있었다고한다.

아마도 그들은 기리시탄이었던 듯...

하느님께 기원하였는데 성모님이 나타나 돌담 밑에 비석이 파묻혀 있음을 알려주어

발굴 해보니 아마쿠사 시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아이의 부모는 비석을 연고가 깊은 하라城 터 현 위치로 옮기고 늘 공양 했다고 한다. 

 기리시탄 순교탑

 

시마바라의 난 안내판

 

 

1992년 이후 하라 城 터 발굴 당시 돌담 아래에서는 많은 유골이 발견 되었는데,

유골의 혀 밑 하악골 부근에서 성패가 나왔다고 한다.

막부군이 쏜 탄피로 십자가, 성패를 만들어 결속을 다지고,

순교하기 전에는 성체 대신 입에 물고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유골 주위엔 기리시탄의 유물들(십자가, 메달, 묵주 등)이 발굴되었는데 

십자가와 메달은 탄피를 녹여 급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매우 견고했을 하라 성의 입구  

 

호네마키 지장 탑

 

1638년 2월 28일 시마바라  항전은 끝났다.

호네마키 지장은 1666년 7월 15일 아리마(有馬) 마을 願心寺 주지 譽上人이

성터에 버려진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이곳에 묻고

영혼을 위로했다는 지장탑이다.

성터를 오르기 전 우측에 이 탑이 있다. 

 

2009년 4월 26일 주일 나가사키의 나카마치 성당에서 미사 후 스님이 분향하고 있다.

제대 앞엔 '島原の亂戰歿者慰靈祭'란 깃대가 세워져 있다.

 

개인적으로 작년 나가사키 순례 때 주일 미사를

나가사키의 나카마치 성당에서 참례했었다.

마침 그 날은 시마바라 봉기 때의 전몰자 위령제를 겸한 미사였는데

당시 하라 성터에 버려진 유골들을 수습,

영혼을 위해 원심사에서 매년 불공을 드렸었다고 한다.

오늘 날엔 스님이 이 곳 나카마치 성당미사에 참석,

전몰 순교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 함께 해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일본의 가톨릭 수난사에는 불교에서의 핍박도 만만치 않았었다. 

그런 와중에도 한쪽에선 연령들을 위해서 오랜 세월을 대를이어 위령제를 지내주고

 또 성당에서 함께하는 모습이 마음에 감동으로 파문이 일었었다.

 

아마쿠사 시로 동상이 바라보는 아리아케 바다

 

 

아마쿠사 시로 동상

 

 

하라 성은 동남쪽은 바다에 면한 낭떠러지,

서쪽에서 북쪽으로는 만조 때 조수가 밀려들어 온다.

 

막부군은 12만5천8백명의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고

바다에선 네델란드 배 2척의 포화를 도움 받아 양면으로 총공격하였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처절한 항쟁을 한 봉기군.

 

하라 성의 둘레가 4km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은 온데간데 없다.

기단으로 남은 돌 축대...

사이사이 잡초더미에 덮인 채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들...

이들 흔적이 있어 성이었음을 알려 줄 뿐이다.

 

성 터 한 켠엔 칼을 찬 사무라이 복장으로 가슴엔 십자가가 걸려있고...

두 손은 깍지 껴 합장을 하고...

지그시 눈감고 기도하는 모습의 아마쿠사 시로가

너른 아리아케 바다를 향해 서있었다.

 

 결사 항쟁하던 봉기군들의 함성으로 처절했을 하라 성...

 성터에서 우측으로 바라보는 해안으로 마을이 자리 잡고

아마쿠사 시로가 바라보는 바다... 파도소리도 소근소근 조심스러웁다.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주변은 무심스럽게 너무도 평화로웠다.

 

순례단은 저릿해져 오는 마음을 추슬러 기도로 마음 모으고

성터를 뒤로 하고 聖·俗의 사랑을 만나러 나가사키로 향했다.

 

 

첨부파일 Oscar Lopez - Cancion Triste.mp3

 

출처 : 마재성지-간절히 그리워하여
글쓴이 : ver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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