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문학인의 방

문효치 시인-백제와 현대를 실어 나르는 배

은빛강 2010. 4. 10. 08:42

문효치 시인-백제와 현대를 실어 나르는 배

문효치 시인이 집무하고 있는 여의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사무실로 찾아간 것은 황사주의보가 내려진 날 오후 6시쯤이었다.

스토리문학 김영은 사무장과 함께 네 시가 조금 넘자마자 신설동에 위치한 사무실을 떠나 내부순환도로로 차를 움직이자니 시계가 트이지 않아 답답하고 왠지 모를 정체에 안달이 났다.

‘젊은 사람이 어른들을 찾아뵈올 땐 최소한 10~20분 이상 먼저 가서 대화내용을 체크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예의라’는 스토리문학관 최현근 회장의 말씀을 되새기자니 더욱 조바심이 났다.

더욱이 황사로 인한 흐린 마음에 “중국은 살수에서 지고/ 안시성에서도 지고 /귀주에서도 져놓고 약 올라// 별 해괴한 방법으로/덤벼든다//시방/우리들이/자기네 나라에서/연예인으로 자동차로 휴대폰으로/휘날리고 있는 줄은 아는 건지//그래, 약 오르면 푸념삼아/사나흘 심술부려 보아라//그 정도쯤은 /감내할 우리다.”라는 필자의 ‘황사’라는 시를 다시 외워가며 차를 지그재그로 몰며 추월을 거듭하여 여의도 순복음교회옆 오성빌딩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정확히 15분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비교적 정갈하게 정리된 사무실엔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사무실의 위용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갈아 앉은 분위기에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실로 된 문효치 시인의 방이 들여다보이고 시인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려니 시인은 통화를 서둘러 끝내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평소 자주 뵙던 터라 낯이 익어 한결 부드러웠고, 워낙에 강단에 오래 서신 분이라 좋은 대화는 흥미롭고 편안하게 이어졌다.

 

문효치 시인은 1943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에서 아버지 문영수(文榮洙. 행불) 씨와 어머니 김옥수(金玉洙 86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시인의 본관은 南平으로 문씨의 본은 단본이며 시조는 신라 자비왕 때 사람인 다성(多省)이다. 남평이란 지명은 전남 나주시 남평면으로 그곳에는  장자못(長淵)이 있고 그 옆에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始祖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남평문씨는 고려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의종(毅宗)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한 공원(公元), 의종 때 예부 ·병부상서 등을 지냈으며 명필로 이름난 공유(公裕), 문무를 겸비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았던 극겸(克謙),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정헌공도(貞獻公徒)를 양성한 학자 정(正),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더불어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들여와 의류혁명을 이룩한 익점(益漸) 등이 유명하다. 현재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시인으로는 문덕수, 문정희, 문인수, 문정영 등이 있고 4만이 넘는 가구 수에 인구 23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인은 소년시절부터 젊은 날까지 늘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하여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시인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삼형제 중 맏이로 6.25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가 공산군이 밀려들어 방구들 아래 지하 땅굴을 파고 숨어있었는데 사흘 동안 코피를 흘리며 고민하다가 ‘이대로 공산화 된다면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여 대를 이을 수 없을 런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하나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인민군을 자원입대하였다고 문 시인은 추측한다. 원래 문효치의 집안은 만석꾼의 집안으로 소위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주의 집안, 부르조아 계급의 집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인민군에 입대할 만한 이유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때문은 아니었고 대를 잇고 가족을 보호하기 장남으로서의 보호본능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인민군에 입대하였다는 오명은 그가 성장하여 취직을 하거나 문인으로 활동하는데 지대한 걸림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젊은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고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야 하는 등,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한다. 대학시절 2년간의 R.O.T.C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임관이 되지 않았던 것도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가 작용했다. 나중에 등단 이후에 이야기지만 모 문예지 원고를 보내면 작품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뭐, 이상한 것 없어?’라며 사상적으로 이상이 없느냐를 먼저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좌제 등이 활개를 치던 시절, 젊은 패기에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왔는지, 그러니 몸이 아프게 되었고 죽음을 넘나들었다는 말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못 보게 되었지만 어린아이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몇 가지 있다.

우선 아버지는 너무나도 무서운 분이었다. 밥상을 대할 때에는 골고루 먹으라는 꾸지람을 늘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사자가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로 굴려서 기어 올라온 새끼만 기른다’며 용감하게 자랄 것을 주문하셨고, 아버지께 그림책을 사다주셨는데 한번은 발로 책을 가리키니까 ‘임마, 책은 발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큰 사람이 못되는 거야!’라며 훈계하시던 기억과 애국가를 가르쳐주신 기억을 떠올리며 비록 자신의 앞길에 부담이 되었던 아버지였지만 문 시인 자신이 부모가 되어 아버지를 회상하는 모습에서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두 부모의 슬하에서 자랄 권리가 있고 그것은 어른들의 이해관계로 인한 전쟁이나 분단에서도 그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초로(初老)의 시인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문효치 시인을 지금에 있게 한 것은 어머니의 위대한 힘이었다. 어머니 김옥수(金玉洙) 여사는 河西 金麟厚의 집안인 울산김씨로 아마도 문효치 시인은 본가의 가풍이나 처가의 가풍이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될 집안이었나 보다. 잘 알겠지만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현재 전남 장성 팔암서원에 모셔져 있지만 조광조의 뒤를 이은 강개한 선비로 무려 1천6백여 편의 시를 남긴 타고난 시인이 아니던가?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어머니는 가정교육이 철저하셨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홀로 되시어서도 절대 자식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맏아들 효치에게 어머니는 늘 거인이셨고 강인하신 분이었다.  ‘어머니가 약하게 보이셨다면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마음도 덜 했을 뿐 아니라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마음도 컷을 것인데 너무도 어머니가 위대하고 큰 분이셔서 어머니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적었다’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누구와 의논할 사람도 없이 홀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이끌고 나오셨으니 참 답답하셨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회고한다. 문 시인의 그러한 말에 지난달에 김성기라는 신인수필가가 보내온 작품 중에 ‘어머니의 쌍꺼풀’을 읽으며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70이 넘은 나이에 쌍꺼풀 수술을 받는 어머니에게서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는 글에 공감이 간다. 아마도 문효치 시인도 생존해계신 지금의 어머니 모습에서 어머니의 위대함보다는 한 여인의 몸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온 데 대한 연민이 더욱 느껴지리란 생각을 해본다.

문효치 시인은 부인 한춘희(韓春姬. 57세)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 준식(俊植. 33세)과 딸 미연(美娟. 31세)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그가 시인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우선 그의 가풍에 있다고 하겠다. 그의 집안은 문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다. 할아버지도 책을 냈던 분이었고 아버지 역시 6.25동란 전에 ‘시집을 낼 준비하고 있었다’고 문 시인은 전한다. 당시 문 시인의 아버지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수도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고, 양정고등학교에 다닐 당시에도 글을 써 이름을 날리던 분이었으니 말이다. 또, 미취학 연령 때라고 기억하지만 삼촌들은 그 당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방학 때면 내려와 ‘시몬…….’을 입에 오르내리며 시낭송을 하는 모습을 기억해낸다. 특히 한 삼촌이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를 읽다가 둔 것이며 일기장이나 낙서들을 그대로 두고 상경하였는데 어린 효치는 집안에 읽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음으로 그런 것을 여러 번 읽었고 뜻은 잘 모르지만 시라는 것이 사람을 위대하고 멋있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가끔 글짓기 숙제를 내주면 처음에는 남의 시를 베껴가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자꾸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부끄러워 직접 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그에 있어 습작의 시작이었다. 그 후, 중고등학교 때엔 줄곧 문예반에 들어가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미당 서정주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숙기가 없어서 1학년 때부터 서정주 선생의 수업을 받았지만 서정주 선생이 어려워 4학년 때나 가서야 찾아가 ‘말을 붙였다’며 싱거운 웃음을 짓는다.

당시(1960년대 중반) 동국대학교 국문과 학생이었던 문효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활화산 같아서 미당 서정주 시집이나 신구문화사에서 출판된 ‘세계전후문제작품집’ 시리즈를 읽으며  큰 문학가로서의 큰 꿈을 키웠다. ‘세계전후문제작품집’ 시리즈는 문학선집으로 1950년대에 등단한  시인들 김수영, 황금찬, 이형기, 구자운, 고은, 구상, 이동주, 박인환, 김춘수, 박재삼, 천상병 등이 자선대표작들을 시작노트를 첨부해서 15편 정도씩이 실려 있었는데 특히 김춘수, 구자운, 박재삼 등의 한국정서의식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문효치 문학에 있어 여러 가지 업적이 있겠으나 백제에 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아니 백제에 관한 이야기가 본류이고 나머지는 부수적이라 봐야 맞을 것 같다. 1961년에 나온 서정주 시인의「신라초」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백제에 관한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필자는 감히 추축해본다.

앞서 말했거니와 문효치의 젊은 시절은 과히 밝거나 희망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1970년대 초는 아버지에 대한 고민에서 오는 불면과 심신의 불안으로 거의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급기야 그는 그러한 심리적 불안을 가지고 살다가 쓰려졌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과 싸워야만 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럴 즈음에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아마도 독재자들이 강압적으로 탈취하고 이끄는 정권을 의도적으로 국민의 눈을 돌릴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무령왕릉의 발견은 그에게 크나큰 이슈로 다가왔다. 우연히도 문효치는 덕수궁에서 있던 전시회에서 1500년 전의 유물들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과 생의 기로에서 많은 생각들과 싸우고 있던 문효치는 무령왕의 시신을 담았던 목관이 1500년을 견디고도 썩지 않은 것을 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것이 무엇일까? 저것은 저승에 갔다 온 배다. 나를 실으러 왔나? 아니다. 저 배(木棺)는 1500년 전의 백제와 현대를 잇는 가교다.”

문효치는 그런 생각에 미치게 되었고 그는 거기에서 대단한 시의 씨앗들을 채취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령왕의 목관재’, ‘무령왕의 청동시기’등의 시를 써서 당시 월평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는 매주 주말마다 공주를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그의 백제에 대한 조명, 백제와의 대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효치 시인은 ‘백제시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몇 가지 중요한 말을 전한다.

첫째, ‘백제는 신라처럼 조명 받은 역사가 아니라 매몰된 역사’라는 것이다. 신라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차례로 멸망되고 그 직후의 사가들, 즉 친 신라계 사가(史家)에 의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쓰여 졌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거의 없는 상태라는 것이 문효치 시인의 말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있지요? 그 탑을 옛날에는 ‘평제탑’이라 불렀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이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탑을 세웠다 하여 붙였던 이름이지요. 얼마나 굴욕적입니까? 같은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 군대를 들여오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본의 아즈카 문화를 전해준 것은 백제입니다. 삼국 중에 가장 화려한 문화를 가졌던 곳도 백제지요. 백제는 황해 쪽에 있어서 당나라와 교역이 성했지요. 서산, 당진 마애삼존불 같은 것들도 모두가 중국에서 들어온 문물들이지요. 뱃길이 닿기 쉬운 것이 백제와 신라 중 어디겠습니까? 서해안에 위치한 백제지요. 저는 그 백제가 매몰되고 역사가 전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즉 여백이 많은 것에 대하여 또 다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그러기에 백제는 시인들의 상상력으로, 문학적으로 메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그가 지적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문제’이다.

“1500년 전 죽음에 대한 사유는 현대에 와서 아우르고 풀고 승화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1500년 전 사람들의 매몰된 역사, 매몰된 한을 누가 풀어줄겠습니까? 우리처럼 시인이 작가가 그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연구하고 도공의, 석공의, 그리고 관을 짠 목수와 관에 들어간 무령왕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치유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는 신라처럼 고구려처럼 화려하고 주목받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꽃이 있으면 뿌리가 있고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생기듯 화려함의 반대쪽을 이해하고 치유하자는 것이 그가 백제시를 쓰는 또 다른 이유다.
 
세 번째로 ‘전통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민족의 전통을 계승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전통계승의 방법론은 없고 당위론만 주장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보고 그 눈으로 여과하며 현대에 맞게 재현해야 합니다. 저는 백제시를 쓰는 것 역시 전통계승의 구체적인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네 번째로 ‘백제사와 현대의 억압받는 민중과의 상관관계’다.

“사람들과 좀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겠으나 억압받는 민중과 억압받은 백제사는 상관관계가 없을까 하고 생각해왔습니다. 시의 연상적인 유추방법에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라며 어느 시대나 억압받는 민중은 문학의 대상이 된다고 설명한다.

다섯 번째, ‘백제 시쓰기의 영역 확대’다.

“저는 앞으로 백제에 관한 시쓰기를 단순히 백제 땅에 국한하거나 국내에 국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백제의 유적을 대상으로 삼에 시의 영역을 확장시켜나가겠다는 생각입니다. 강우식 시인은 제 시를 가지고 ‘백제와 현대를 잇는 교통의 시학’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묻혀 있는 백제사를 시로 재현하고 끄집어내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시키며 그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고취시키려고 시를 씁니다.”

라며 자신이 백제 시를 쓰는 것에 대한 의지를 힘 있게 표현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완벽한 토착문화는 없습니다. 모든 문화는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섞여서 나가지요. 토착문화와 외래문화를 잘 희석해서 그 나라만의 문화를 만들 때  또 다른 문화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화적 유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전통을 말하지요. 그 문화적 유전자만은 지켜가야 합니다. 옛것만을 고집하고 계속하려는 것이 전통이 아니지요. 예를 들면 지금 옛 판소리만을 계속 부른다고 그게 어디 문화가 살아있는 나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문효치 시인의 말대로라면 판소리에 현대 감각의 산문시, 랩 등을 접목시켜 나가는 것과 랩에  판소리 가사를 접목시켜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승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필요하지요. 가정에서 우리 것을 외래 것과 잘 접목시키는 교육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전통과 현대를 부드럽게 아우르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라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문효치 시인의 업적은 대단하다. 그는 1975년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을 ‘백제 시’라는 한 가지 작업에만 몰두해오고 있다. 문학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소재가 된다. 그러나 진정한 학문의 가치는 다양성이라기보다는 일관성이라 할 것이다. 한 가지를 지속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그 한 가지는 수천수만 가지가 되고 수천수만 가지는 결국 한 가지 진리로 통하니 1500년 전의 백제도 현대일 수 있고 현대도 곧 과거일 수 있다. 문학의 목적에는 여러 가지 논리가 있을 수 있다. 우선하는 목적 중에 하나가 그 작가가 태어난 나라, 민족의 융성이라고 생각할 때 문효치 시인은 백제의 묻힌 역사를 발굴하여 현대 감각에 맞게 숨을 불어넣고 그 문화적 유전자를 보전하면서 우량유전자를 계발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나가려 한다. 그의 두뇌 1500년 전의 백제와 현대를 실어 나르는 배다. 그의 이 같은 일관된 작업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마땅하다. 문학인들은 창작을 위해 밤을 새우며 고뇌하는 일만으로도 힘들진대 사비를 들여가며 여행을 하고 연구를 한다는 점이 우리 시인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하여 또 다른 고통을 준다.

나라에서 주는 민족문학상! 그런 상이 있는지는 필자가 아직 문단 연륜이 짧아 잘 모르겠다. 지금 그는 그가 하고 있는 ‘백제시’라는 일련의 작업들을 더욱 지속하겠다 말한다. 그가 하는 작업이 우리 한민족의 정신적인 면에 뿌리내리길 기대하며 스토리문학은 앞으로 지속적 관심을 보일 것이다. 만일 민족문학상이 있다거나 신설된다면 아마도 문효치 시인에게 가장 먼저 돌아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문 시인은 포럼 우리시 우리음악의 공동대표로 이안삼 작곡가, 박세원 테너와 함께 우리 가곡을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월간 ‘스토리문학’과 같이 새로 문학을 하러 나오는 신인작가나 아직 문단 연륜이 짧은 사람들에게 학문하는, 창작하는 방법론을 제시해주신 문효치 시인께 이처럼 많은 시간 할애하여 취재에 응해주신 점에 대하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음은 문효치 시에 대한 문단에서의 평가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 3편을 싣는다.|

문단의 평가

문효치 시인의 시집 『백제 가는 길』은 한마디로 이명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책머리에서도 "늘 지니고 사는 이명이 오늘은 더 크게 울린다"고 하였는데 시집 전편에 흐르는 시적 화자의 발언은 시인 자신의 고백처럼 상당한 부분이 이명의 언어로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명이란 비밀한 방식으로 귀를 두들기는 지속적인 소리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전달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 특정한 음성이나 메시지로 전달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특정한 개인이란 바로 특정한 시인일 것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그의 작품들 속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를 발언하는 시적 자아가 될 것이다.
- 홍문표(시인·평론가·명지대교수)

우리는 孝治가 기울이고 있는 詩精神이랄까 시적 관심의 큰 영역이 百濟精神 또는 百濟美의 깊은 천착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未堂을 新羅의 佛敎와 아름다움을 추구한 新羅의 歌人이라 부를 수 있다면 孝治를 百濟의 恨많은 歷史와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百濟의 詩人으로 불러 과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詩的 成果에 대한 논의 이전에 詩精神의 向方이나 기질에 관한 논의의 문제에 속한다고 봐야 할 관점의 문제이다.
- 홍기삼(문학평론가)

시인의 격조 높은 에세이를 읽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는 그 ‘보물찾기’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더군다나 곳곳에 복병처럼 숨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나타나는 그의 여행시에 내 정신세계가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나면 나는 흰 깃발을 흔들며 항복할 수밖에 없다.
- 주경림 (시인)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시인으로서 주어진 몫을 다하고자 하는 문효치 시인은 '허명을 바다에 던지고, 오욕의 육신을 바다에 뿌리는 도전과 탈출에서 소생의 미학을 확립한다. 이것은 영원한 과거를 기반으로 한 자아의 예술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의 미적 승화이다.
생의 아픔과, 그리움, 사랑, 고독이 어울려 새로운 바다로 소생하는 문효치 시인의 목소리는 언어의 긴밀성과 긴장감을 살린 독특한 톤을 발성하고 있다. 그것은 바다의 문을 영원성으로 열어 주는 생동감 있는 개성의 소리이다.
- 장윤익(문학평론가)

세상에 한 맺힌 혼령이 있기로 사랑만큼 사무친 혼령이 어디 있으랴. 분명 있기는 한가본데 보았다는 사람이 없으니 사랑이라는 것, 보이지 않게 떠도는 혼령일지라, 냄새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것. 문효치는 마구 날려 보내며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고 주문을 외워댄다. 마치 사랑의 넋을 씻겨주는 무당처럼 발목에 편지를 묶어 맨 비둘기를 날리듯 사랑을 훨훨 날리고 있다.
- 이근배(시인)

文孝治君의 詩作品을 韓國日報와 서울신문 두 군데의 같은 해의 新春詩 懸賞應募作品들 속에서 내가 뽑아 當選시켰던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20年쯤이 지났다. 그러나 그 文君은 우리들이 가진 豊作에의 期待를 充分히 감당할 만한 健康을 不幸히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사람이어서 當選以後 오늘까지의 20年의 세월의 거의 全部를 鬪病生活로 一貫하느라고 불가불 寡作의 詩歷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참으로 恨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文君의 무슨 공부의 무슨 精神力의 힘으론지 그 오랜 病을 自力으로 회복시켜 내면서 그 사이에 이어서 써 모은 詩作品들로 이번에 어엿이 그의 詩集 ≪武寧王의 나무새≫를 上梓하게 되어 그 原稿뭉치를 내게 가져온 것을 읽게 되니 그를 크게 屬望했던 한 사람으로서의 내 느낌엔 많이 뻑적지근한 것이 있다.
- 서정주 (시인)

文孝治의 시에 있어서 전통의식의 본질은 연작형태로 씌어진 「백제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백제시편」은 그의 시적 본질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가 「백제시편」으로 자신의 시적 본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두 측면의 조명이 요구될 듯싶다. 하나는 그의 「전통의 현대적 접목」이라는 시관의 실현을 위해 시적 소재 및 발상근저를 백제에 두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라는 과거세계로 현실을 전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박진환 (시인, 문학평론가)

문효치에게 있어서 '백제'는 다성적(多聲的)인 공간이다. 그의 시에서 '백제'는 다양한 의식이나 여러 목소리들이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능동적인 공간이며, 동시에 과거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이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시간을 거스르며 소멸에 저항하는 공간이다. 시인의 '백제'는 역사 속에서 소외된 공간이며, 서구문화에 대한 우리 전통의 공간이고,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파아란 녹이 낀 청동거울 같은 공간이며, 본래 나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이며, 무엇보다 1500년의 시간을 소거(掃去)하고 오늘 다시 불러냄으로써 소멸에 저항하는 불멸의 공간이다.
- 박기수 (시인, 문학평론가)

文孝治씨의 詩는 自身의 삶의 行爲의 결과이다. 그는 自身의 삶의 責任을 전적으로 自身이 떠맡고 있고, 그의 詩作行爲는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質問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마 우리 詩壇에서 文孝治씨만큼 자기의 存在意識 또는 存在條件에 투철한 詩人도 드물 것이다. 그는 實驗者도 아니요, 修辭學者도 아니요, 또 테크니생도 아니지만―그의 關心이 이런 데에 있지 않음은 너무도 당연하다.―그는 實驗·修辭·技巧보다는 삶이나 存在의 문제에 더 큰 關心을 가지고 있고, 이 문제를 더 重視하고 있는 듯하다.
- 문덕수 (시인)

문효치에게 있어서 죽음의 이미지는 낡은 것, 잊혀진 것, 한 세대 전이라는 박물들과 같이 한다. 역사의 시적 정체성을 만나기 위하여서는 그 역사가 지닌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아니 하나가 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방이 상여가 되고 마침내 무덤이 되는 전이는 생이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때로는 시인에 의해서 무덤, 상여, 방이라는 역순환성도 가능한 세계이다. 묻혀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한 파헤침, 뒤집거나 엎어놓기. 그 모든 과정은 백제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작업이다. 죽음은 죽은 자와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 정체성이 완성된다. 죽음과 수시로 왕래하고 친밀할 수 있는 길은 내가 바로 죽음과 하나가 되는 길밖에는 없다. “죽은 자의 혼령들이여/ 죽은 것은 당신들만이 아니다.” 라는 동일성은 문효치의 치열한 시정신이기도 하다. 그런 자세가 없이는 백제라는, 아니 무령왕의 나라에 진실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문효치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러할 때만이 역사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음을 그는 안다. 마침내 시인의 영혼은 부활하고 초월하는 자유를 얻는다.
- 강우식 (시인, 성균관대 교수)

부용은 황진이 이후 유명했던 시기(詩妓)로 '부용집(芙蓉集)'에 3백여 수의 시를 남겼다. 운초 (雲楚)라는 필명으로 규수문학의 정수라는 평을 받지만, 허명을 버리고 금강산 유람 후 정조 때의 시인 김이양과 은둔, 만년을 보낸다. 천안 광덕사 뒤에 묘가 있다. 시간의 무상함 속에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자연이 되어 후세의 시인을 일깨우고 있다.
 -시 ‘부용묘’를 읽고, 문정희(시인)

 
서동의 기쁨 외 2편

문효치

두꺼운 구름을 떠밀고
나, 그대의 나라에 숨어들 때
선화여, 내 앞길에
하염없이 떠다니는 그대의 얼굴,

돌 같은 감자, 감자 같은 돌의 팔매질에
견고한 성벽도
물엿으로 녹아내리고
단내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 나오시는 선화여.

전생의 질긴 인연이 옥빛으로 살아나
흘러들어오는 강물에
무수히 꽃피어 흐르는 그대의 얼굴.

그대의 알몸을 안고
내 마을로 들 때
감자밭은 황금의 동굴이 되고,

숲에서 바다에서
일제히 머리 들고 일어서는 빛,
풍장 치며 날으는 빛.

새롭게 열리는 하늘에서
땀을 닦느니.
       


武寧王의 金製冠飾 

님은
불 속에 들어 앉아 계시다.

심지를 돋궈
三界를 골고루 밝히며
한 송이 영혼으로 타고 있는 純金.
百濟 匠人의 손톱자국이
살아서 꾸물꾸물 움직여
바로 내 앞을 지나며 다시 먼 먼
幽界의 나라에까지 이르노니

당신의 머리 위에 얹히어 타던 불,
천하를 압도하던 위엄어린 음성이
저 불꽃의
널름대는 혓바닥 갈피갈피에 스며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반쯤은 미쳐 있는 나
이제 불길은
길 잃은 백성을 골라 비추시라.

찰랑찰랑
魔法의 방울 소리를 내며
人間의 마른 덤불에 댕겨붙는 불.

님이여,
당신은 이 불 속에 들어앉아 계시다.


남내리 엽서 

-연당

우렁이란 놈
여름 내내 꽃대에 붙어
귀 기울이고 있다.

물속에 흩어져 흐르는
붉은 물감 모여 꽃으로 오르는 소리
우렁이는 귀 대고 듣고 있다.

연꽃 붉은 꽃잎 헤집고
내가 넣어 두었던
유년의 추억
알알이 연밥으로 익고 있다.


문효치 시인 연보
1943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바람 앞에서」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산색」
배재중학교 등에서 오랜 교직생활
『신년대』동인
『진단시』 창립 동인
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역임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계간 『문학과창작』 주간
계간 『문예운동』 주간
『세월』동인 (문효치, 박제천, 홍신선, 하덕조, 이길원, 신용선, 홍희표, 이계홍, 이상문, 유재엽, 이원규, 김학철)
『세월』동인회장 역임
강남문인회장
동국대, 동덕여대, 대전대 출강
주성대 겸임교수
중국천진사대 석좌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장
포럼 우리시 우리음악 공동대표

시집『煙氣 속에 서서』,『武寧王의 나무새』,『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백제 가는 길』,『바다의 문』,『선유도를 바라보며』,『남내리 엽서』2001년 문예진흥원 우수도서
시선집 『백제시집』2004년 올해의 청소년도서
기타저서『시가 있는 길』,『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

수상경력 
동국문학상, 시문학상, 평화문학상, 시예술상, 펜문학상

 

[월간 스토리문학 2006년 6월호 '메인스토리' 수록]

■ 김순진
△시인·소설가
△월간《스토리문학》발행인
△도서출판 문학공원 대표
△저서 『광대이야기』외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