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문학인의 방

장윤우 시인-시와 조형미의 조화를 통한 예술의 완성

은빛강 2010. 4. 24. 01:15

장윤우 시인-시와 조형미의 조화를 통한 예술의 완성

평소 스토리문학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시는 함동선 선생께 메인스토리를 취재할만한 인물을 소개해 달라 말씀드리니 선생은 장윤우 시인을 소개해 주시고 친히 전화까지 넣어 스토리문학에서 전화가 가거들랑 잘 대해주라는 부탁까지 하셨다.

그러던 중 장윤우 시인으로부터 시예술상 시상식에 참여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장윤우 시인은 지난 5월 22일 미네르바가 주관하는 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월말인지라 대구에서 열리는 시상식장에는 가지 못하고 사무실로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리니 시인은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드디어 약속한 5월 24일 오후 2시, 한국종이접기협회(장윤우 시인이 회장으로 있음) 사무실이 있는 장충동을 향해 3호선 전철을 탔다. 동대입구역에 내려 전철에서 나오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장충단공원에서 수표교 등을 바라보며 잠시 여가를 즐겼다. 사람은 때로 자연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 살갑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장충단(奬忠壇)은 광무 4년(1900년) 을미사변 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트인 가슴을 안고 벤치에 앉아 장윤우 시인에 대한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김영은 시인에게서 사무실 앞에 도착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가 왔다.

건물 1층으로 들어서니 종이에 관한 모든 것을 진열해 놓고 파는 매장이 있었다. 김영은 시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좋아하며 아이쇼핑에 빠져 있었고 시간이 되었으니 취재가 끝난 후에  더 구경하고 어서 올라가자는 필자의 채근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시인의 사무실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니 종이접기협회의 큰 사무실이 있었고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장윤우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시인의 사무실은 아담하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취재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큰 사람, 성공한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부드러운 말씀의 안내에 따라 좌정을 하니 차를 대접해 주신다.

한참 대화를 나누려니 한경아 소설가가 찾아왔다. 시인께서 스토리문학과 인연을 맺어주려고 일부러 초대하셨다는 말에 고마움을 느낀다. 한경아 소설가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소설가로 기대가 크다는 말씀을 하신다. 단아한 모습과 초롱하고도 날카로운 눈매에서 우리 소설사의 장래가 느껴진다.

장윤우 시인은 아버지 張鎭昌 선생과 어머니 金長禮 여사와의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 서대문에서 1937년 12월 1일 태어나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 성신여대 공예과 명예교수로 있으며 한국문인협회 수석부이사장이란 중책과 월간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서의 큰 족적을 옮기고 있다.

장윤우 시인의 본은 인동(仁同)으로 시조는 고려초 仁同縣(인동현)의 玉山(옥산)땅에 처음 온 三重大匡(삼중대광) 神虎衛上將軍(신호위상장군)의 벼슬을 지낸 금용(金用)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 현광(顯光)이 있다. 그는 당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의학(醫學)에도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무신으로는 만(晩)·붕익(鵬翼)·지항(志恒)·현택(鉉宅) 등이 있으며, 영조 때 득만(得萬)은 인물화가로서 세조의 영정을 그렸고 그의 증손 한종(漢宗)과 현손 준량(駿良)도 모두 화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근세 인물로는 순국지사 태수(泰秀)와 우국언론인 지연(志淵)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8만 4863가구에 59만 13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윤우 시인은 부인 홍문자(洪文子. 61세)여사와의 사이에 영(暎), 임(任) 두 딸이 있다. 장윤우 시인은 원래 고향이 서울 서대문의 지금 독립문 공원이 있는 자리인 영천이다. 

시인은 한국문인산악회 회장을 지낸 분으로 평소 등산과 산책 등 부지런함으로 건강을 지켜오고 있고, 술을 좋아하는 까닭에 그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건강을 어떻게 지키시느냐는 질문에,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술을 좋아한 까닭에 등산으로 간신히 챙긴 건강을 하산주로 망가뜨린다.”면서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시인의 아버지(張鎭昌 선생. 1978년 작고)는 제과상을 하시다가 6.25전쟁이 터져 여수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후 마산세관과 여수세관, 군산세관 등에서 근무하셨다. 장 시인이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 데에는 사춘기를 여수에서 보내면서 혼자 있게 되니까 바다를 바라보면서 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무슨 책이던 미치게 읽고 싶던 10대 사춘기 시절을 전라남도 여수(麗水)에서 보냈지요. 끝없는 다도해의 수평선과 물 맑고 산자락 수려한 종고산과 돌산(突山)섬……. 지금도 생각만 하면 눈자위가 붉어지는 전쟁과 피난지의 3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엔 문예반에 들면서 학생들의 동인시집인 「4인부락」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늘 가정이 편안해야 모든 일이 잘된다 하시면서 ‘家和萬事成’이란 가훈으로 집안을 다스리셨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드는 등 활발한 문학공부를 해 왔으나 그는 진로를 응용미술로 바꿔 서울대 공예과로 진학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만하더라도 문학을 해서는 춥고 배고프다는 인식이 주위에 산재해 있었고 그것에 작용했다. 서울 고등학교에서는 조병화 시인이 수학교사로 소설가 황순원 씨가 국어교사로 있었으며 그의 담임선생님은 철학과 안병욱 씨여서 뜨거운 가슴을 마음껏 달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시인이 되고자 했으면서도 그는 대학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로 정했다. 미술에 대한 욕구도 욕구지만 꼭 문과에 가야 시인이 된다는 법은 없다는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미술과 시는 그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되었다. 응용미술과에 진학해서 그가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던 금속 작업을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찬란한 금속문화의 전통이 그를 자극했다. 신라시대부터 금속공예는 가장 돋보이는 예술품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는데 일제 강점기시대에 그 맥이 끊어져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그 맥을 이어 찬란하게 되살리고 싶었다.

“금속은 한국인의 솜씨와 체질에 꼭 들어맞습니다. 우리가 젓가락 가운데서도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맥을 이어 죽어 있는 것을 살리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금속 작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시적인 것에 있어요. 뭐가 시적이냐구요? 손끝을 통해 감정이 금속 표면에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것이 금속이에요. 또 금속은 일단 녹였다가 모양을 만들어야 하니 시인에 의해 언어가 살아나는 것처럼 거듭 태어나는 셈이죠.”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시와 공예의 일치를 선언하고 금속에 시 정신을 쏟아 넣는다. 지난 1962년 국전 공예부문에 입선하면서 일세대(一世代) 금속공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학도주보』, 『학원』 등에 발표를 시작하면서 예술가로소의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한 문학도로 당시 문예반으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로는 황동규, 박동규, 마종기 등이 있다.

어머니(金長禮 여사. 작고)는 아주 인심이 후하신 분이었다.  남을 위해서는 늘 후덕하고 베푸는 성격이었지만 가족이나 자신에게는 늘 검소하셨다면서 어머니에게 배운 가르침은 ‘검소’와 ‘절약’이었다며

“살아계실 때에 올바로 모시지도 못하고, 일찍이 아버님과 死別(1978년), 홀로 사시길 고집하시던 당신의 말년을 왜 그리 고적하게 보내도록 해야 했는지……. 차마 말문을 열수가 없습니다.”라면서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日帝통치 시절 부모님 부부는 京城(지금의 서울)로 올라와서 기쁨보다는 슬픔, 웃음보다는 남몰래 흘리신 눈물이 더 많았음에도 속내를 보이시지 않고 저희 4남매를 세상에 낳아서 고히 키워 주셨습니다.(실은 두 딸을 더 두었는데 病死하였다) 학력은 별로 없으셔도 누구보다도 영민하시고 일찍 부친께서 세관관리로 부임하여서 마산. 여수. 군산등지로 함께 타관살이에도 이골이 나신 어머님!

세관공무원에서 공무 중에 부상을 입으시고 옷을 벗고 나오신 아버님의 사업을 도와 허다한 날들을 밤낮으로 일하며 번창하게 이끄셨습니다. 한 때는 남대문시장 안에서 최고액 납세자로, 남대문 시장주식회사까지 인수케 하신 분인걸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늘 두통을 견디기 힘들어서 두통약인 뇌신(惱神)을 계속 복용하셨지요. 갖은 고생과 수모를 짓씹으며 이겨내신 어머님은 바위처럼 무겁고 바다처럼 깊은 분이었습니다.

서울 대치동아파트 생활 말년에 나가시던 교회에서도 입담 좋고 인심이 厚하신 ‘간난’할머니로 목사의 칭송이 자자하셨답니다. 이제 저는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어머니가 점점 그리워지네요. 어머니께 소홀했던 자식임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가슴이 메어지고 터질 것만 같습니다.  ‘깨끗하고 착하게 살라.’고 생전에 누누이 주시던 말씀 새기고 있습니다.”
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시인은 한동안 木薰이라는 필명으로 문단에서 활동하는데, 목훈이란 필명은 朴木月 선생의 목자와 趙芝薰 선생의 훈자를 딴 이름으로 ‘나무의 향기’라는 뜻이다. 이는 장윤우 시인이 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가늠하게 해준다.

장윤우 시인은 공예과에 진학하지만 늘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63년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였는데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서정주, 박남수 시인이 무수히 많이 보내온 ‘시들 중 「겨울 동양화」와 「전설을 고발하는 자」를 골라 당선의 영애를 주셨는데, 어떻게 보면 어설프고 부끄럽기만 한, 노티가 물씬 나는 작품을 미상 선생께서 뽑아주실 때 심사평에서 방자(放恣)하고 나이가 든 시인’이란 선평을 잊을 수 없다면서 그때 본인의 시가 아마도 서정주 선생의 시적 경향과 비슷해서 뽑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며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신춘문예 등단 직후 장윤우 시인은 이제하, 유경환, 김종원, 박리도, 정규남, 구석봉, 권일송, 박봉우, 윤삼하, 신세훈, 이탄, 조태일, 이근배, 강인섭, 이가림, 박봉우 등과 함께 계간 『신춘시』란 동인지를 계간으로 19집이나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장윤우 시인은 모든 예술의 본질은 하나라고 보고 있다. 역시 문학과 예술 또한 다른 것이 아니란 설명이다. 그는 ‘예술에 있어 칼라로 말한다면 회화이고 금속으로 말하면 금속공예, 선율로 말하면 음악, 그리고 문자로 말한다면 문학이 된다.’고 말하면서 ‘모든 표현 매체에 있어 어떻게 하면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느냐가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며 시에서 못 다한 표현을 금속공예를 통해 발산해왔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에 시에 있어서도 금속을 제외하고는 논의 자체가 어려워진다.

“글(문학)과 그림은 원래 하나입니다. 원시시대에는 글이 없었지요. 생존의 수단으로 들소를 잡아먹고 주술적인 목적에서 들소의 암각화를 새겨놓았는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이나 프랑스의 돌도뉴 벽에 線刻의 단순한 도형이 발견되었습니다. 미술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인류역사 이전(Pri-historic Age)에서 비롯됩니다. 시대의 변천과 흐름 속에 언어와 문자가 생겨났으며 그때까지의 예술은 문자가 배제된 시각 언어이며 조형언어와 시공간예술행위였을 뿐이지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함으로서 우리민족도 문자가 있는 국가로서 영원불멸하게 되었습니다. 문자가 없는 나라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허나 문자라는 문명의 利器가 그렇게 완벽하지마는 않다는 게 역사적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스페인어권, 영어권, 漢字語圈域, 아랍어권, 한글권 등 자신들끼리는 상통하여도 다른 언어권에는 불통합니다. 그러나 시각언어인 미술은 경우가 다릅니다. 어찌 보면 바디 페인팅,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가 더 직접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맥락에서 글이나 그림이나 모두 같은 예술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비록 ‘문자’라는 매체를 이용하거나 ‘Color’ 즉 色感을 통하여 표현하는 방식만이 다를 뿐입니다. 예술(Art)을 시간예술. 시공간예술. 공간예술로 분류하여 그것이 음률, 언어, 물질(Stuff)등을 援用하는 것일 따름이지요.”라 역설한다.

장윤우의 시인의식은 금속을 통한 시와 조형의 만남을 통해서 승화한다. 조형이라는 것은 서양적인 것으로만 인식하지만 동양적인 조향의 양식도 예술 최고의 경지로 작품화되어 우리의 문화적 유물로 남아있다. 석공예, 목공예, 섬유공예, 금속공예 등이 그것인데 장윤우 시인은 그중 금속공예란 한 부분을 시와 접목하여 시비(詩碑), 노래비 등, 시와 조형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줄의 글과 한 획의 그림이 역사의 흐름을 바꿉니다. 문화가 국력이고 문화야말로 세계에 알릴 최대의 홍보효과이며 수입증대에도 기여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동차나 반도체 수출 못지않게 <심청전>이나 <춘향전>, <홍길동전>등은 뮤지컬로,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세계 속에 ‘韓流’를 일으키며 당당히 맞서가고 있지 않습니까?  날로 황폐해가는 우리 사회를 글과 미술로 구원해야 합니다. 메마른 ‘삶’에 물기와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뒤늦게나마 정부에서도 ‘문화콘텐츠’의 위력을 깨닫고 산하기관을 설립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점은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화와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학이 세계를 지배할 날을 기대하면서 시에 대한 열정을 더욱 살라야 합니다.”라고 문학에 대한 사랑과 포부를 밝히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다른 분야에 대한 배타심(排他心)이랄까 위화감(違和感)이 조성되고 심지어는 같은 문학의 장르라 할지라도 시와 소설, 아동문학과 희곡 등이 서로 잘 어울려지지 않고 생소하게 지내오고 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같은 장르라 할지라도 물과 기름처럼 섞여지지 않아서 한국문인협회가 있는가 하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있고 한국시인협회가 있는가 하면 한국현대시인협회가 있고 아동문학가협회, 무슨 수필가협회, 어느 대학교출신 동문작가회, 어느 고장출신이냐는 등 계속되는 離合集散으로 三分五列되어오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오늘의 다양한 매체, 급속한 디지털과 인터넷 시대에 걸맞지 않는 소위 ‘패거리’문화 양상이라 보아집니다. 이는 선진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뒤떨어진 전근대적 모순이며 문화발전에 逆行하는 殘在 행위입니다. 특히 우리는 민족과 국토분단의 아픔과 相殘의 受難史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선행되어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딱한 일입니다. 소위 문화강국끼리 나눠 먹는 독점관행을 깨버려야 하는데 말이지요. 시작이 반입니다. 이젠 나 아니면 싫다는 ‘패거리문화’의 破局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합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서 만나고 함께 예술행위에 동참해야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장르가 아니더라도, 같은 예술이 아니더라도 서로 위하고 끌어주며 칭찬해 줄 때 우리 예술은 세계를 향해 뻗어갈 수 있습니다.”

라며 패거리문학을 경계하고 단합을 통한 세계화를 주장한다. 또,
“저는 최근에 시예술상을 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학상이 있고 심지어는 문학상을 돈 받고 팔거나 돈 주고 사는 식의 문학상도 너무나 많이 있음을 개탄합니다. 문학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문학에 대한 업적과 문학성에 따라 주어져야만 합니다. 문학상이 많이 생겨남은 문학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악한 문학상으로 장사를 하는 단체에게 경종을 울려주어야 합니다. 실력이 형편없는 심사자나 이제 막 문단에 나온 사람들이 심사하여 주는 그런 상은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문학상에 대하여 우려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문화시민’임을 자처하지만 정작 문학을 접하거나 창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지요. 사람들은 영화를 감상하거나 TV를 시청하고, 일간신문에 오르내리는 일상적인 교양, 만화, 애니메이션등 가벼운 볼거리에 치우치고 맙니다. 어렵고 부족하였던 50~60년대 어린 시절의 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괴테나 「노틀담의 꼽추」, 「레미제라불」의 작가 빅토르 위고,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과학소설 「해저 2만리」의 쥘 베른 같은 위대한 文豪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오가면서 동네 서점이나 헌책방에 들려서 소년소설이나 『새벗』, 『학원』같은 월간지를 탐독하였습니다. 지금, 청소년들은 그 시절, 궁핍한 세월의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모든 것이 손닿을 곳에 완벽히 비치되어 언제든지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인터넷만 두들기면 전 세계에서 무엇이라도 당장 찾아내서 얻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책으로 읽고 메모해 두어야만 내 것이 됩니다. 꼭 책으로 읽는 습관을 들이시기를 부탁합니다.”라면서 책을 읽지 않는 청소년들을 걱정하고 문학이 죽어가고 있음을 개탄한다.

장윤우 시인의 시사(詩史)에 대한 업적 또한 대단하다. 우선 한국문인산악회의 조직에서부터 관여하여 회장을 지낸 바 있고 지금도 매달 거의 빠지지 않고 한국문인산악회 회원들과 산에 오른다. 거기다가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 비롯하여 부이사장 등을 맡아 수고해 오고 있고 한국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 발행인으로서 한국문인협회를 대변하는 문학지 발전에 힘쓰고 있다.

바쁘신 중에도 스토리문학을 위해 선뜻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신 장윤우 시인께 독자와 스토리문학관 회원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음은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장윤우 시인의 시 3편과 문단에서의 각 평론가들의 대한 평가를 싣는다. 

문단의 평가

시인의식과 장인의식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예술정신이다. 장윤우의 시는 시인의식과 장인의식의 오랜 산고(産苦) 긑에 다시 만나서 형상화된 작품들이다. 어떤 예술이든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은 동일하다. 장윤우 시인은 시를 통한 동양적 정서와 조형, 생활과 허무의 만남이 예술적 아름다움을 최대로 고양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종합예술의 미학으로 시작한다. 그의 시가 대중과 동떨어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선전문구로 타락해서도 안 되며 ‘삶을 장인의식으로 시적 형상화를 시도한 시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의 시는 이와 같은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다른 시인들과의 구별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 장윤익 (문학평론가 ․ 경주대 교수 ․ 전 인천대총장)

그의 시에는 여성적인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이 없다. 곱고 완결되고 가냘프고 꾸며진 그리고 心情的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시는 질박하고 거칠다. 언뜻 보기에 구성도 산만한 듯 하며 표현 역식 투박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 쏟는 - 그리하여 호탕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는 세계나 사물에 대하 어떤 미적 거리를 갖고 응시하는데서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와 함께 하는, 그리함으로써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는 행위로 쓰여 진다. 그는 울분이나 좌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안으로 안고 응어리를 만들며 삭이기보다는 밖으로 내뿜고 토로하거나 세계를 질타, 혹은 매도함으로써 풀어버리기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시는 활달하다. 어떤 망설임이나 눈치보기 또는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와 外面하여 느끼는 것 - 불만스러운 것이거나 혹은 만족스러운 것은 곧바로 시로 형상화한다.
- 오세영 (시인 ․ 서울대 교수)

시집 「誤字인생」은 시인 장윤우의 30년간에 걸친 시학적 반추(反芻)요, 화가 장윤우의 30년간에 걸친 예술적 추구의 이슬방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60년대 초부터 쓰기 시작하여 9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30년간에 걸친 장윤우 교수의 시작세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으로부터 크리스테바의 「시각언어의 혁명」(75)까지 만큼이나 길고 험준한 사상적 旅程이 빚어낸 땀방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땀방울이 곧 ‘소슬함’의 미학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까다롭고 모질게 물고 늘어지던 理念은 무엇이며 학문과 철학은 무엇인가. 孔子가 그의 모든 정명에 앞서 시(자연,性)를 암시할 수밖에 없듯이 장윤우 시인도 결국 30년여의 시적 결산을 통해서 ‘소슬함’의 감각적 기분표상의 순간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는 장윤우의 놀라운 미학적 충격을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 원형갑 (전 한성대총장 ․ 문학평론가) 

「세번의 鍾」에서 첫째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시가 생활에 늘상 일어나는 일들을 시화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아주중요한 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늘 주의를 기울이고 산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시를 보면 <간이역> <음주에 대하여> <해변시인학교>와 같이 생활에 젖은 크고 작은 일들을 골라 거기에 시상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 조운제 (고려대교수,시인) 

여덟 번째 시집 「세 번의 鐘」은 꾸밈없는 목소리의 싱싱한 진실을 읽게 한다. 상징이나 비유의 테크닉 대신에 솔직한 의식의 알맹이들을 담아 내보임으로써 직접 시적 재질을 만져보는 듯한 신선감을 읽게 하는 때문이다. 삶의 주변에 구체적, 사실적으로 놓여져 있는 갖가지 오브제들이 적절히 배열됨으로써 참신한 빛깔 모양새를 획득하는 절차를 투명하게 바라다 볼 수 있는 기쁨, 이것이 다름 아닌 「세 번의 鐘」을 읽게 만드는 힘임을 우리는 깨닫는다. 말 재주가 덧입혀져있지 않은,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토론함으로써 신뢰감을 주는, 요즈음은 몹시 귀해진 그런 사람과의 대화를 오랜만에 나누는 경험은 퍽 신선한 것이었다. 이는 오랫동안을 詩作에 바쳐온 연륜, 그리고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에 대한 성찰을 섬세하게 지탱해온 장윤우 시인 특유의 목소리임을 깨닫는다. 차갑고 냉정한 금속에서 오히려 따뜻하고 애틋한 에스프리를 가다듬어내는 예리한 정신과 손끝, 숱한 여행과 산행을 통해 벼뤄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탄력 있는 이해력을 그의 시편들은 맑은 메아리로 울려주고 있었다. 
- 한영옥(성신여대 교수 ․ 시인) 

그가 시로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은 언어의 형상화를 빌어 그린 자신의 모습이란 점에서  자신에 대한 내적표현은 물론 人生論的 自我의 조명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張潤宇의 實像을 볼수 있는데 그는 자신을 美化한다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고백적으로 표출하고 있어 진솔한 설득력과 만나게 된다.
그의 시에 있어서의 표현본질은 그가 기법으로 즐겨 원용하는 콜라쥬 수법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가 그림으로 그린 <自畵像>이 화가로서의 자신의 再現이었다면 시로서 그린 자화상은 언어로서 그린 내적자아에 해당된다. 그는 畵家, 금속공예가, 詩人이라는 兼業의 장인으로 보아줄 때 그의 시는 예술의 楳材를 언어로 借用했다는데 귀결되고 동시에 한 몸뚱이에 돋아난 세 얼굴 중의 하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박진환 (시인 ․ 문학평론가) 

겨울 동양화  외 2편

장윤우 

화롯불 놓고
천 년이
조용히 흘러 간다
구하산(九霞山) 붓에서
玉같이 구슬려 나오는
四君子의 情에
겨울 밤이 화안히 핀다

月田 선생께서
이르기를 
<책을 萬卷 읽으라>
평생에 가슴 속에 심고
畵六法에 앞서
마음이 淨해야지
心과 身이 갈앉고
눈시울을 서서히 들어
유연히 벽을 대하니
모두 형통하다
접시를 모으다 보니
별난 감이 다 든다
가루를 정하게 풀어
큰 접시 조그만 접시에 나눠 놓고
임리(淋離)히 번져 가는 소리
귀에 솨악 듣는다
밖엔 눈이 그쳤는지
봉당개 짖는 소리 멀고
보름을 먹는 달은
고연스레 내 외로움을 더하게 하니
에라, 오늘은 붓도 먹도 집어치고
따끈한 정종이나 한 잔 할까
안주로는 
엊그제 끝낸
수꿩을 보지
언뜻 멀리 인경소리 들리는 듯 싶어
혼자 실소하다.

-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고배(苦杯)를 넘어 축배(祝杯)로 
-미네르바 여신(女神)에게 

아무도 없는 미명(微明)의 비인 공간에서
두 손을 모우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평생을 헤매며 스스로를 버리고
남의 탓으로만 헐뜯던 방탕아(放蕩兒)가
무슨 염치로 기도를 올리는가.
인생을 소진(消盡)해버린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는가, 철이 났는가

자포자기(自暴自棄)의 내 인생길은
방탕한 술주정뱅이의 비틀 걸음이었거니
매일 독배를 들고 고배를 마셔왔다.
가족도, 친우도, 이웃도 모른 채
스스로 포기해버린 진흙탕길이었다.

종교를 매도(罵倒)하던 한 치 혀(舌),
늙고 메말라빠진 육신이 하늘을 우러러 붓잡고
회한(悔恨)의 눈물을 뿌린들 무엇하는가
고배와 독주의 생애가 아닌
눈부신 감사와 축배의 오늘이었는가.
아무도 모르는 어둠의 공간에서
홀로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드린다.
드디어 황홀(恍惚)감이 온 몸에 충만하는 微明.
“내 잔(盞)이 기쁨으로 넘치나이다.”

- 2006년 4월 25일


M에서 M으로 

미니(mini)에서 미디(midi)를 거쳐
맥스(max)의 시대로
실로 오랜 세월동안 어지럽고
어쩌면 신나는 여정(旅程)이었다-
뭇 여성들의 탄성(歎聲)과 비애(悲哀)-
용출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하고
드디어 뒤엉킨 체 여행이 끝맺으려는가
선사(Pre-historic Age)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질펀한 애원(哀怨)과
몸짓이 담긴 파노라마로 스쳐간다
그리워- 
그리워도 돌이킬 수 없는 날을
얽히고 얽힌 얼굴과 일그러진 모습들이
자꾸만 보고 싶다.
그리아 가슨. 실바나 망가노. 소피아 로오렌.
신음이 배인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몬로. 브리짓 바르도에서
가련(可憐), 청순형으로 비운(悲運)의 모나코여왕이 된
그레이스 케리에 이르기까지…
여체는 무릇 남성들의 우상(偶像)이였으니
정신이 혼미하도록 바싹 쳐올린 미니여 안녕!
화사한 무도회의 마돈나처럼
우아한 미희(美姬)의 치렁치렁한 맥스까지
가는구나, 나도야 가련다.


*장윤우 시인 연보
아호는 목훈(木薰)
1937.12.1 서울 출생 
1956  서울 중․고등학교 졸업
1963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겨울 동양화」, 「전설을 고발하는 자」2편 당선
1965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 대학원 졸
1966~  현 한국미술협회 회원 부이사장 감사, 역임, 한국문인협회원, 시분과회장 역임, 현 부이사장, 현 서울신문 출신작가 ‘서울문우회’ 회장
1958~59 서울대학교 운영위원장 겸 총위원회 학예부장 
1967~99 상명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건국대학교 대학원 강사
1968~70  경기공업전문대학 공예과 조교수
1970~현 성신여자대학교 공예과 명예교수,(산업미술연구소장 산업대학원장 박물관장 역임)
1970~2002 서울대, 고려대, 성대, 경희대, 숙대, 원광대, 단국대, 상명대, 한양대, 강원대, 청주대, 세종대, 서울산업대 및 대학원 강사 역임
1986  미국 Califonia 주립대 (CAL State LA) 연수
1989~90 문예진흥원 미술지원 심의위원
1990  12차 세계시인대회(WCP) 참가.
2000~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겸 월간문학 발행인/홍보위원장 
현 한국종이접기협회 회장/종이문화원장

저서
*시집
겨울동양화」, 「속 겨울동양화」, 「시인과 기계」, 「화가 슬픈 성주의 손」, 「두 사람의 풍경과 리삼월」, 「그림자들의 무도회」, 「세 번의 종」 ,「형해의 삶」,  「그 겨울 전차 포신이 느린 그림자」,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오자인생」
*수필집
「화실주변」, 「장윤우 예술시평집」, 「그림과 시의 팡세」
*기타저서
「중학 미술교과서 1」, 「중학 미술교과서 2」, 「중학 미술교과서 3」(교육부 검정도서) ,「공예재료연구」, 「공예재료학」,  「도학 및 제도」 외 다수.

*수상 경력
1983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상
1986  동경아세아미술대전 초대작가상
1983  한국현대시인상(한국현대시인협회)
1986  동포문학상(한국문인협회)
1991  시와 시론 본상,  순수문학 대상
1961  국방부장관 공로상(57호)
1976  한국문인협회 감사패, 영화평론가협회 감사패, 광운대학교총장 감사패
1982  한국귀금속공예회장 감사패, 백제미술대전 감사패
1989  디자인뉴스 사장 감사패, 현대시학 사장 감사패, 청동문학회 회장 감사패
1991  한국예술문화 특별공로상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1991  문교부장관 표창 (201호)
1995  한국문인산악회상 및 감사패
1996  국무총리 표창(30717호),
1997  한국미술창작협회 감사패
1998  서울시 문화상(미술),  헌법재판소장 감사패
2000  국제예술문화상(예술의 전당)
2002  영랑문학대상 수상
2003  예총 예술문화 대상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2004  국민훈장 황조근정 훈장
2006  제8회 시예술상 수상 

[월간 스토리문학 2006년 5월호 '메인스토리' 수록]



■ 김순진
△시인·소설가
△월간《스토리문학》발행인
△도서출판 문학공원 대표
△저서 『광대이야기』외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