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문학인의 방

환상의 여류 시인

은빛강 2010. 7. 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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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류 시인

[신봉승]

시인이라는 말은 멋지고 아름답다. 좋은 시를 읽으면 모국어의 아름다움 때문에 마음이 밝아진다. 조지훈의 <승무>나 정지용의 <향수>를 암송 하노라면 한국

▲ 신봉승 극작가
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조선 시대에도 환상의 여류시인이 있었다. 절제된 판타지를 노래하면서 스물일곱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禁姬)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난설헌의 문학적 천재됨은 그녀가 여덟 살에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읽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대저 보옥으로 만든 차일은 창공에 걸려 너울거리고, 구름 같은 휘장은 색상의 한계를 떠나 그저 황홀하기만 하며, 은다락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노을 같은 주두는 헤매는 속세의 티끌 세계를 벗어났도다····(이하 생략. 원문 생략).

이 글의 표제인 <광한전 백옥루>는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환상의 건물이다. 그 건물의 상량문을 이토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적어가는 여덟 살 난 어린아이를 어찌 천재라고 아니할 수 있을까. 

난설헌에게 비극이 닥쳐온 것은 결혼이란 속박이었다. 빼어난 재능을 간직하고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를 하였으나, 평범한 지아비와 뛰어난 지어미 사이의 금실이 좋을 까닭이 없었으니 그녀는 홀로 초당에 앉아 만권서적을 대하며 시상을 가다듬는 고독의 정한(情恨)속을 헤매야 했다.  

    비단 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옷 짓노라면 손끝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 <밤에 홀로 않아(夜坐)> 전문

여류시인만이 구사할수 있는 세심한 은유와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특히 마지막 구절의 사색(思索)은 선경(仙境:난설헌 문학세계이기도 하다)에 들어서 있음이라고 여겨진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불을 돋우는 것이 '불꽃도 높일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는 비유는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난설헌은 정말로 스물일곱 살에 세상을 떴다.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천추에 세 가지 한(恨)을 품고 갔다면서 애석하게 여겼다. 첫째는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아닌 조선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셋째는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두목지(杜牧之)와 같은 지아비를 만나지 못했고, 자녀가 없어(두 아들이 모두 어려서 죽었다) 모성애를 알지 못하고 간 것을 한했다는 것이리라.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집과 시편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하였으나, 누님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아우 교산 허균('홍길동'의 작자)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누님의 시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기에 오늘 우리가 환상적인 한 여류시인의 정한을 감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 신봉승
극작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월간에세이》2010년 7월호 수록]

 
[월간에세이] 2010년 7월호
신봉승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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