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마당/여행의 향기

전북고창 선운사길

은빛강 2010. 10. 16. 13:42

선운사로 가는 길, 때가 일러 피지 않은 꽃무릇을 아쉬워하면서 걸었다. 도솔천 냇가주변에도, 부도밭 가는 길에도 꽃무릇 한 송이 피어난 곳이 없다. 시인 서정주도 선운사 동백꽃 구경 왔다가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하며 막걸리집에서 막걸리로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었나 보다. 그의 시 [선운사 동구]에 그 마음을 적고 있다.

 

 

 

선홍빛 단풍, 가을의 절정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안했고/막걸리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시인이야 육자배기 가락에 담긴 붉은 꽃을 봤다지만, 평일 오전 ‘풍천장어’ 붉은 글씨 도드라진 식당 문은 잠겼고 어디에 앉아 가을 노래 한 번 들어볼까? 이런 저런 잡념을 이고 걷다보니 어느새 선운사다. 절 마당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은은한 향을 흘린다. 만세루 마루 위에 단아하게 놓인 찻잔에 고인 건 꽃향기겠지.

 

선운사. 절집 뒤로 동백숲이 보인다. 서정주 시인이 동백꽃 보러 갔다가 때가 일러 동백꽃은 보지 못하고
삼거리 주막 주모의 육자배기 쉰 가락만 듣고 왔다는 내용이 시인의 시 [선운사 동구]에 나온다.

  

 

유치원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연등 아래서 뛰어다닌다. 아이들 마음이 닿을까봐 하늘은 더 높이 올라가버렸다. 눈이 부시게 파랗다. 절 문을 나와 다시 길에 섰다. 돌아나가는 길, 동백꽃을 보지 못한 서정주 시인의 발걸음도 여기서부터 시작했으리라. 이번 걷기여행의 출발점도 선운사다. 도솔천 옆 길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쪼그리고 앉았다. 그곳에 피어난 꽃무릇 한 송이를 보느라 사람들은 떠날 줄 몰랐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꽃무릇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한 송이 붉은 꽃이 마음을 달래준다. 꽃무릇 지천으로 피어난 붉은 꽃밭도 황홀하겠지만 홀로 피어난 꽃이 더 귀해 보였다. 육자배기 가락에서 붉은 꽃을 본 시인의 마음이나 붉은 꽃 한송이 화석처럼 새긴 여행자의 마음이나, 선운사 가을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미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선운사 부근

선운사 가을의 절정은 단풍이다. 꽃무릇 지고 난 도솔천 골짜기를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이야말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선운사 부근에 서정주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동백호텔, 선운사 입구 등이 그곳이다. 동백호텔의 옛 이름은 동백장 여관이었다. 미당이 고향인 고창에 내려올 때마다 201호에 머물렀다. 

 

또 선운사에서 동백호텔이 있는 선운사 상가단지로 가는 길목에 미당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시 [선운사 동구]가 새겨져 있다. 시비에 새긴 글씨는 미당이 직접 쓴 육필 원고를 확대해서 돌에 붙이고 글씨 모양대로 새겨 넣었다.

 

[선운사 동구]는 1968년 출간된 제5시집 [동천]에 실린 작품이다. 옛날에는 선운사 입구로 들어가는 삼거리쯤에 막걸리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지역 특산품인 풍천장어집이 즐비하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막걸리집 주모가 한국전쟁 때 죽었고 미당은 그 주모를 생각하며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지었다고도 한다.

 

누군가 가을 속으로 걸어간다. 울긋불긋 단풍에 취했나 보다.

  

 

만추의 향기 짙은 선운리와 돋움볕마을

선운사 동구를 지나 선운리로 발길을 옮긴다.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해서 강을 오른쪽에 두고 차도로 걷는다. 약 2.5km를 걸으면 용선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 길을 택한다. 그 길이 선운리로 가는 길이다. 약 2.5km를 더 걸으면 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시문학관을 볼 수 있다.

 

마을 어귀에 ‘선운리’라고 쓰인 바윗돌이 있다. 그 앞에 ‘미당외가’라는 안내판이 달린 건물이 있다. 옛날 미당의 외가였는데 지금은 정미소 건물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길 오른쪽에 미당 생가가 있다. 그가 살던 집은 원래 초가였고 1972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새로 고쳤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바람만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흉물스러운 폐가의 모습이었다. 이런 옛집을 2001년 8월에 초가로 복원했다.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미당 시문학관이 있다. 시인의 발걸음을 뒤쫓아온 길 끝에서 만난 은행나무 노란 단풍이 휴식 같은 가을을 선물한다. 시문학관 전망대에 올랐다. 한쪽 옆으로 그의 시집 제목에도 나오는 질마재가 보인다. 다른 한쪽으로는 생가와 선운리 마을이 굽어보인다. 정면에는 돋움볕마을(안현마을)이 보인다. 시문학관을 나와 길을 건너 방금 전에 보았던 돋움볕마을로 걸어갔다. 그 마을은 벽화마을이다. 벽이나 길, 담장과 지붕에도 온통 그림과 시가 적혀 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 얼굴을 담에 그린 집도 있다. 잘 알려진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가 어느 집 담에 적혀 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그 앞을 지나가신다. 동네 구경 잘 하고 가라시며 웃는 아주머니 얼굴이 담장에 그려진 국화꽃을 닮았다.

 

이 마을 뒷산에 미당의 묘가 있다. 국화가 피는 계절이면 묘 앞에 노란 국화가 가득 피어난다. 걷기여행의 종착점이 바로 이곳 안현마을이다.

 

 

가는 길
*자가용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로 나와 22번 도로를 타고 선운사 방향으로 간다. 인천강교를 지나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 - 선운사

*대중교통
고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선운사 가는 버스가 있다. 

 

먹을거리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풍천장어의 ‘풍천’은 지명이 아니라 바닷물과 강물이 어우러지는 곳을 이르는 말인데, 특히 고창 선운리 일대 인천강 하류 지점에 강물과 바닷물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장어 살이 두툼하고 맛이 단백하다. 고추장양념구이와 소금구이 등이 있다. 고창 특산품인 복분자주는 여느 과실주처럼 단맛이 돈다. 장어구이 안주에 복분자주를 즐겨도 좋겠지만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 입맛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주변 여행지
선운리 바다 건너가 곰소항이다. 선운리에서 찻길로는 약 40km 안팎 거리다. 곰소항 노을이 볼만하다. 젓갈정식도 맛있다. 각종 젓갈이나 소금도 살 수 있다. 또 곰소항에서 약 7~8km 안팎 거리에 내소사가 있다. 천년도 더 된 절도 괜찮고 절로 들어가는 전나무숲길도 걸을 만하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 : 가을

주소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지도보기)
총 소요시간 : 3시간

총거리 : 8km

준비물 : 편안한 운동화. 물 한 병. 햇볕 가릴 모자.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꽃무릇 붉은꽃이 선운사 가는 길에 만발한다. 꽃무릇 다음은 단풍이다. 고운빛 단풍이 피어난 길을 걸어볼 만 하다. 그러니까 꽃무릇 피면서부터 약 100일 동안은 울긋불긋 꽃잔치 단풍의 향연을 즐기며 길을 걸을 수 있다.

 

또한 선운사 일대와 선운리는 시인 미당 서정주의 고향이기도 하며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가을 문학기행도 즐길 만하다. 경사 없는 길 천천히 가을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다.

 

 

 

<카메라뉴스> 선운사에 꽃무릇 물결 | 연합뉴스 2010-09-29
29일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입구부터 도솔암까지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 꽃무릇이 장관이다. 붉은빛과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꽃무릇이 가을 아침 이슬을 머금은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9월 중순에 군락을 이뤄 붉은 꽃을 피운...
[단풍사진 명소] 찰칵, 떨리는 손끝… `秋억`을 담아가다 | 매일경제 2010-09-29
횃불처럼 불타는 가을 단풍. 그중에서도 최고 명품 단풍잎만 쏙쏙 골라내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면. 평범한 단풍에 질리셨다면 이곳은 어떠실지. 사진 명소지만, 그 비경이 카메라에만 담기엔 너무나 아깝다. 카메라 달랑 메고 떠나볼 만한 숨은 단풍 여행지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기자를 거쳐 2003년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살고 있다. 전국을 걸어 다니며 글 쓰고 사진 찍는다. [서울문학기행], [아름다운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살아 있는 서울․경기], [맛 골목 기행], [서울 사람들], [대한민국 산책길] 등의 책을 썼다. 이름 없는 들길에서 한 번쯤 만났을 것 같은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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