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종이강에 그린 詩

[제 89호 종이강에 그린 詩]-비린 글씨 -송 종 규

은빛강 2010. 11. 7. 01:05

[제 89호 종이강에 그린 詩]

 






비린 글씨 --송 종 규



야야, 밥은 먹었나?

밥통 같은 엄마 식빵 같은 우리 엄마
팔십 다섯
마른 우물 같은 속까지 다 퍼내주고 아직도
밥 먹었나 야야 많이 먹어래이

툇마루에 둥그렇게
보름달 떠 있다 삐거덕 문이 열리고
언 손, 엄마 치마 속에 묻는다 고봉밥 따뜻하던 우리 엄마 안채에도
둥그런 보름달 뜬다 램프 불 밝히시던 젊은 아버지 두런두런
댓돌 오르내리시고 나팔꽃 뜰을 돌아 삐거덕
다시 문 닫힌다

세월이 남긴 건 얼룩진 기억이 아니라 아슬한 단애
사는 게 전부 허구가 아니라면
아니, 삶이 만약 허구라면
그날의 초록색 대문도 우리 엄마 꽃분홍 치마도 모두가 허구라면,

문득 창이 흐려진다
치매 약을 먹기 시작한 엄마를 위해 나는 돌아서서
약을 챙긴다 한 봉지 한 봉지 날짜도 새겨 넣는다
많이 먹어래이, 내 딸 귀여운 내 딸 많이 먹어래이 엄마의 노래가 그칠 때까지
나는 약 위에 비린 글씨 새길 것이다

만약, 세월의 단애 또한 허구라면
엄마는 다시 둥그런 보름달을 낳을 것이다


* 위 시는 시집『<시안> / 2006 여름호 』에서 골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