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유식 평론가님 방

이유식의 문단 비화(13)-유치환 편

은빛강 2011. 7. 12. 23:26

문학인 > 문단야화
2011년07월02일 11시32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이유식의 문단 비화(13)-유치환 편
(원제)청마의 술좌석 명언

[이유식]

청마(靑馬) 유치환은 생애중 말년을 부산에서 보냈다. 대구여고에서 63년에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부산남여상  교장직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67년 2

▲ 이유식 평론가
월에 돌아가실 때 까지 약 4년간이다.

내가 청마를 처음 만난 것은 64년이었고, 그분이 문협 부산지부장직을 맡고 있던 시절이었다. 문협 모임에서 첫 인사를 드렸는데 퍽 반갑게 대해 주셨고 또 연세가 30여세나 차이가 있는데도 공대말을 꼭 놓으시질 않았다.

나야 물론 청마선생을 거울알처럼 환히 알고 있었지만, 그분도 나를 잘 아시는 듯 마치 구면처럼 대해 주셨다.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62년도에 『현대문학』지에 ‘휴머니즘의 詩’와 또 같은 해에 ‘한국의 범신주의’를 논하면서 청마의 시세계를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이 인연이기도 해 평론가가 귀한 시절이라 60년도에 나온 제10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와 63년도에 나온 수상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각각 친필 사인을 넣어 보내주신 적도 있다.

첫 대면 이후 그뒤 여러 번 뵙게 되었는데 회의에서건 술자리에서건 거의 말이 없으셨다. 즐거운 이야기가 오가면 간혹 호탕한 웃음만 웃으시며 그의 시에 나오듯 ‘소리하지 않는  바위’ 같은 자세로 좌중의 이야기만 경청하는 쪽이었다. 새파랗게 젊고도 젊은 나는 대인풍의 시인의 자세가 바로 저런 것인가도 싶었다. 이런 그의 과묵성은 1950년 말경 잠시 경북대학교에서 문학강의를 할 때 별 할 말이 없다고 이른바 ‘5분강의’로만 끝내고 그냥 질문만 받거나 아니면 자습에 맡겨버린 일화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 과묵하신 그분으로부터 내가 묘미 있는 말을 들은 것은 선생의 댁에서였다.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문협 모임이 끝나자 몇몇 사람에게 자기 집에 맛좋은 막걸리를 빚어 놓았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댁이 수정동이었는지 좌천동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튼 그날 우리는 대접을 참 잘 받았다. 번듯하게 차려나온 술상 가운데는 오지 술 항아리가 놓여있고 표주박이 걸쳐져 있지 않은가! 민속 주점류의 출입이 거의 없던 신출내기 평론가의 눈에는 가히 신선놀음이요 또 멋과 풍류가 넘친다 싶었다. 한순배 두순배 술잔이 돌려지자 차츰 이야기꽃도 더욱 무르익고, 이야기에 취해  잔을 돌리다가 잔이 비어 있으면 청마께서 직접 표주박으로 잔을 채워주시면서  ‘드시게’ ‘많이 드시게’란 권주말씀만 하셨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취중에 느닷없이 ‘선생님께서는 술을 아주 좋아 하신다고 들었는데 왜 그러신가요?’하고 정말 싱겁고 멋없는 질문을 던졌다. 청마 왈 ‘술은 마음을 세탁하지’란 말씀이었다. 정말 인상 깊었던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술에 관한 경구적 아포리즘만 서너 가지 알고 있었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 는 「법화경」속의 말, ‘술의 향기는 죽음의 사자의 입김’이라는 시인 롱펠로의 말, ‘술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다만 비밀을 누설시킬 뿐이다’라는 독일시인 쉴러의 말만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겐 청마의 이 ‘세탁설’이 순간 청마다운 술 예찬의 아포리즘이요 명언이구나 싶었다.

훗날 4,50대에 나도 반주객이 되어 문우들과 자주 술판에 어울리면 곧잘 이 말을 인용해 보기도 했고 또 한술 더 떠서는 자랑삼아 청마와의 술자리에서 얻어 들은 풍월이라고 주석까지 달아보기도 했다.

나는 지금 청마의 이 ‘세탁설’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문인들이 술을 탐하는 첫째 이유는 기질적으로 청담이나 방담을 나누길 즐기니 자연 그 촉매제 역할을 술이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글을 구상하거나 쓰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앙금을 풀고 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이 아닌가 싶다. 청마의 ‘세탁설’에는 일리가 있다 여긴다.

문득 그의 명시 「바위」의 끝행이 떠오른다. ‘두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했지만 아마 저 세상에서 주선(酒仙) 변영로나 조지훈등과 어울리면 분명 ‘세탁합시다’라고 한마디 던지실 것 같다.

■ 이유식
문학평론가. 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

[격월간《동방문학》2010년 1/2월호 수록]


 
이유식 문학평론가
뉴스스크랩하기
안무월 (dsb@hanmail.net)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문단야화섹션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