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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의 문단 비화(12)-김동리 편

은빛강 2011. 7. 12. 23:24

문학인 > 문단야화
2011년05월12일 09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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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의 문단 비화(12)-김동리 편
나의 집 가훈을 써주신 김동리 선생

[이유식]

문학 청년시절부터 나는 비록 만나 뵈온 적은 없었지만 김동리 선생을 매우 가깝게 느낀 일이 있다. 선생은 경주 태생이지만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35년에 나

▲ 이유식 평론가
의 연고지인 진주와 하동 사이에 있는 고찰 다솔사에 잠시 머물면서 작품도 쓰면서 짬을 내어 야학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이 있었고 또 그분의 대표작 「역마」의 주무대인 쌍계사와 화개장터가 바로 내 고향 하동에 있다는 지연적 친숙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시절에 평론습작을 한답시고 선생의 단편 「바위」를 심층분석도 해서 작가 요산 김정한 교수로부터 칭찬도 들었던 인연도 있고 해서이다.
 결국 이런 유대감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여 후에 내가 평단에 데뷔하고 나서 그분의 장편 「사반의 십자가」를 작품론 형식으로 1961년도 『현대문학』지에 발표한 바도 있었다.

그렇지만 직접 뵈온 것은 71년도 3월이었다. 70년도 현대문학상 시상식장에서였는데 나는 평론부문 수상자로 참여하여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셨던 선생께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또 심사위원들과 수상자들이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그 사진은 나에겐 가장 소중한 사진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 후 문단모임에서 자주 뵈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첫인사에서는 워낙 많은 문인들을 만나서인지 나를 즉석에서 잘 알아보시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후 인사를 드릴적마다 두세 번 다짜고짜로 “평론가 이유식입니다.”라고 신고를 드렸는데 그것이 주효해서인지 그 다음 모임에서는 “아, 이유식씨”하고 즉석에서 알아보시기에 ‘이름신고’를 그만 둔 내력도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께서 신당동에 사실 때 두어 번 댁으로 세배를 간 일이 있고 또 그 후 강남 청담동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와 사실 때인 80년대에도 한두 번 세배차 들른 일이 있다. 

그리고 가장 뜻있는 방문은 87년도 일이었다. 교직에 있는 어느 여성 소설가가 봄방학중이라면서 내가 동리 선생님댁을 아시니 자기가 인사차 방문하려고 하니 가능하면 동행해 주면 좋겠다는 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오후에 동행을 했다. 마침 거실에서 붓글씨를 쓰고 계시기에 인사를 드리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문득 선생의 붓글씨를 기념으로 하나 받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청을 넣어 보았다. 선생의 붓글씨는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는 터라 훗날 값있는 기념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신년 휘호 대신 대뜸 가훈을 하나 생각해 놓고 있는데 그걸 써주시면 좋겠다는 청을 드렸다. 즉석에서 쾌히 승낙하시면서 며칠 후에 오라는 것이다. 순간 노 대가의 붓글씨, 그것도 나의 집 가훈이니 훗날 나의 손자나 손자들의 손자들 세대에 가서는 가히 가보(家寶)가 됨직도 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며칠 후에 간단한 인사 선물을 가지고 가서 드리고 그것을 찾아와 곧 바로 표구사에 맡겨 표구를 시켜 나의 집 거실에 여봐란 듯이 걸어두었다. ‘부끄러움 없이 살자’라는 내용 옆에 작은 글씨로 ‘이유식 교수댁 가훈을 위하여 정묘년 봄 수남각 김동리 씀’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그 정묘년이 바로 87년도 봄이었다. 

그 이듬해 마침 ‘비너스’란 상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여성 이너웨어 전문회사인 주식회사 신영에서 매달 내는 홍보지 『신영』으로부터 수필 1편 청탁이 들어왔기에 오라, 잘 되었다 싶어 가훈을 만든 경위에다 동리선생으로부터 글씨를 받게 된 자초지종을 소재로 하여 ‘나의 집 가훈 이야기’를 쓴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2004년도에 나의 대학 정년기념 및 문단등단 43주년 기념문집에도 들어가 있어 더욱 빛을 내주고도 있다.

듣건데 동리선생은 후배와 제자들에게 휘호를 곧잘 써주신 걸로 알고 있지만 가훈만은 좀 희귀하지 않을까 싶다.

이 가훈 휘호는 지금도 나의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다. 간혹 가훈을 볼 때마다 견물생심이라 동리 선생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또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정말 가훈처럼 ‘부끄러움 없이’ 살아 왔는지도 반성해 보곤 한다.

■ 이유식
문학평론가. 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

[격월간《동방문학》2010년 3/4월호 수록]


 
이유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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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월 (dsb@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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