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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처와 용서 / 송봉모 / 바오로 딸

은빛강 2011. 10. 4. 19:05

 

 

상처와 용서 / 송봉모 / 바오로 딸

 

14쪽

달마 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라고 한탄을 했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 중 대다수는 한때 얼마나 우리와 다정한 사이였던가! .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자란다. ("성냄과 분노는 친밀함 위에서 자라고 번성한다.")

 

28쪽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우스갯소리 같지만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여야 한다……내가 상처받는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 세상에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나만 화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면 그처럼 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용서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30쪽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난 마음을 아물게 하기보다는 그 상처를 키우면서 살아가게 된다. 마치 꽃에다 물을 주듯이 상처에다 미움이라는 물을 주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화를 끓이면서 그 위에다 매일같이 증오심의 물을 주면서 내게 상처준 그 사람이 내 마음속을 다 차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을 그 미운 사람이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움은 악순환이다. 그러면서 나는 벗들이나 가족들에게 늘 피곤한 사람, 늘 불만에 차 있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35쪽

우리에게 상처준 사람은 분명 있지만 근본적으로 치유되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내 상처, 내 아픔은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죄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설 필요도, 모두가 나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40쪽

“인생은 마치 베틀로 짜여진 복잡한 무늬의 융단과 같다. 유전적인 요소, 환경적인 요소, 어렸을 때의 경험,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친구로부터 받은 영향, 인생의 모든 장애물, 이 모두가 베틀의 씨줄이 되고 그 위를 당신이 날줄이 되어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베틀이 왔다갔다 하면서 당신의 반응에 따라서 인생이라는 융단이 짜여지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손상된 감정을 절대로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A. 시맨즈, ‘상한 감정의 치유’)

 

46쪽

만물의 실상은 보지 못한 채 현상계에만 머물러 살아가는 범부에게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만물의 실상을 보려는 사람들, 즉 산과 물이 끊임없이 부식되고 풍화되면서 그 모양을 달리함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는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다.’ 이렇게 본질의 세계를 바라보는 단계가 깊어지면, 그 다음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산과 물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무상하게 변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그것은 분명 산과 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과정도 불가에서 말하는 깨닫음의 경지와 비슷할지 모른다. 내게 절대적인 의지처였던 어머니가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깊은 이해를 갖는 시점에서 어머니는 다시금 어머니인 것이다.

 

49쪽

우리가 용서를 한다고 해도 몸 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신앙 안에서 용서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나올 것이다. 우리가 느낌 차원, 몸 차원에서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가 아물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것은 너무나 당영한 것이다. 만약 받은 상처가 아주 크고 깊다면 아무는 시간도 그만큼 더 걸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이용당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명예 훼손을 당했을 때……이 모든 상처는 시간이 걸려야만 아물 수 있는 상처이다. 비록 종교적 행위로서 상대방을 용서하였다 해도 이렇게 큰 상처들이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

 

76쪽

인디언 속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양식과 인지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아야 한다.” 남의 신을 신고서 1마일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1마일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내 자신의 가치기준과 행동양식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던 상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82쪽

천도무친(天道無親)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까움과 친밀함을 바라지 않는다’

 

 

86쪽

“반대자들의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드 멜로, ‘일분 헛소리’)

 

105쪽

나(글쓴이) 역시 지난 시절 꽤나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착한 것은 좋은데 착한 것만큼이나 줏대가 없이 살아왔다. 얼마나 자주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 “예”라고 대답하고 나서 자신을 혐오하고 단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내 목소리와 줏대를 갖고 살게 되었다. 이미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영성 성장을 위한 첫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우리에게 자유인이 되라 한다. 앤터니 드 멜로 신부는 “착한 이들을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로움으로 초대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유로움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말한다. 나는 더이상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체성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116쪽

드 멜로 신부에 따르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 하는 체험이다. 자기 안에 도사린 감정들을 바르게 파악하고 “아하!” 할 수 있을 때 변화가 시작되고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예배와 찬양에 바쳐지는 그 많은 시간들이 자기 이해에 쓰여진다면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자기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을 위한 성장의 발걸음을 이미 내딛은 것이다. 하루를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의식하고 귀를 기울여 줄 때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은 치유되기 시작한다.

 

127쪽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내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불같이 화가 난다 해도, 그 화가 내 자신은 아니다. 지금 내 안에 짙은 슬픔이 있다 해도 그 슬픔이 나는 아니다. 어떤 감정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을 때 그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 “화는 나지만 그 화가 내 자신은 아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 외로움이 내 자신은 아니다.” “지금 내가 실망하고 있지만 그 실망이 내 자신은 아니다.”

만약 내가 가진 부정적 감정과 내 자신을 동일화시키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풀어가지 못한다.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칭찬해 주면 온 세상을 얻는 듯이 기뻐 날뛰다가, 누군가가 자기를 비판하면 살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처럼 주눅이 들어버린다.

감정과 자신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한 부분에 불과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출처 : 눌언
글쓴이 : 간서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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