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방주의 창

[방주의 창] 누가 길을 묻거든2012-10-28

은빛강 2012. 10. 27. 20:39

[방주의 창] 누가 길을 묻거든 / 김창선

발행일 : 2012-10-28 [제2817호, 23면]

황혼의 문턱에 서서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 선생님께서 시조 한 수를 적어주셨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베이비붐 세대라는 해방둥이가 벌써 노인이 됐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요. 인구센서스(2010) 결과를 보면, 65세 이상 인구가 11%나 되고, 가구별로는 네 가구 중 한 가구에 노인이 살고 있습니다. 정부의 추계로는 이들 인구가 2018년에는 14%를 상회하고, 2026년에는 20%에 달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고 합니다. 현재 노인의 약 4분의 1 정도가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데, 그들의 약 절반 정도는 종교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

한국천주교회통계(2011)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신자들의 연령분포를 살펴보면, 현재 60세 이상 인구가 거의 20%에 달하고 50대가 19%를 차지하고 있어, 천주교회의 고령화는 더욱 급속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령화가 진전되고 있는데다 핵가족화와 조기퇴직으로 인해 노인복지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통계청 사회통계조사(2011)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들이 현재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문제입니다. 또한, 이들이 바라는 복지서비스는 건강검진(33%), 간병(29%), 가사 돌봄(16%), 취업알선(8%)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갈수록 노인들의 빈곤, 질병, 소외, 독거,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부담은 크게 늘어날 것임이 분명합니다.

해가 저물면 황혼 빛의 노을이 아름답지요. 낙엽의 계절인 가을도 불타는 단풍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축복받으며 태어나, 글공부 한 뒤,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기며 살다가, 이제 황혼의 문턱에 서서 여생을 마무리할 그들에게 ‘노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생계와 건강, 취업, 돌봄과 같은 복지서비스의 제공과 경로우대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때늦게라도 주님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어 여생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황혼의 문턱에서 신앙의 해를 맞은 교우들도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과 친교를 이루면 더 없는 기쁨이겠지요?

동행하는 순례자

신학자 몬시뇰 로마노 과르디니(Msgr. Romono Guardini)는 노년의 의미를 크게 둘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노인만이 통나무의 아래위를 구분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발리 섬의 전설’이 말해주듯, 노년은 지혜가 충만할 때입니다. 황혼의 문턱에 선 노인들이 노년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가난한 마음, 삶의 경륜, 그리고 수덕의 자세는 이들이 차세대에 베풀어줄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사도 20,35)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노인들은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지요? 많은 철학자, 신학자, 그리고 영성대가들이 노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얘기를 했습니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 Augustinus)는 세상에서 거짓을 참으로 알고 바보스런 삶을 살다가 늦게야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했던 자신의 아름다운 신심을 드러낸 「고백록」(제10권)에서, “하느님은 내 생명의 생명”이고, “하느님만이 참 행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루카 11,28)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St. Franciscus Salesius)는 바닷물에 사는 조개 속의 영롱한 진주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신심의 샘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신심생활입문」에서 일러주었습니다.

이 두 고전을 통해서도 우리는 깊은 산 속의 옹달샘처럼 영혼의 목마름을 달래줄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이제 어르신들이 세상에서 가진 재물, 권세, 명예, 성(性), 한(恨), 미움, 추억, 지혜 등을 모두 내려놓는 ‘비움’과 현재 모습 그대로 주님께 의탁하는 ‘맡김’의 삶을 살면서 감사, 온유, 겸손과 사랑의 완덕을 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황혼의 순례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은 순례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어르신들에게 누가 길을 물으면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벗하여 지내다가, 이제, 영원한 삶의 새 희망을 가진 ‘행복한 순례자’라고 증언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창선(세례자 요한)씨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외교통상부에서 근무했고, 현재 서울 우이동본당에서 말씀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창선·세례자 요한·서울 우이동본당 말씀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