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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로메로 대주교 시성절차 재개

은빛강 2013. 5. 3. 02:15

교황청, 로메로 대주교 시성절차 재개

 

▲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사진 출처 : The Archbishop Romero Trust, www.romerotrust.org.uk)
교황 프란치스코가 지난 4월 20일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가로막았던 장애를 제거하고 시성절차 개시를 승인했다.

교황청 가정평의회 의장이며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시성 청원자였던 빈첸초 팔리아(Vincenzo Paglia) 대주교는 지난 4월 21일 이탈리아의 몰페타에서 열린 토니노 벨로 주교 선종 20주기 추모 미사에서 “오늘은 벨로 주교가 선종한 날이자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절차가 재개된 날”이라며 “마침내 로메로 대주교가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으며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교황청의 시복심사 중단조치를 해제했다”면서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장애해제(unblock)를 밝혔다.

로메로 대주교는 군사정권이 통치하던 엘살바도르에서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고, 인권을 옹호하다가 우익 암살단에 의해 1980년 3월 24일 아침 미사 중에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엘살바도르 민중들에게 곧바로 ‘순교’로 간주되었고, 그동안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압제에 저항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절차, 해방신학에 대한 우려 때문에 묻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고, 이듬해 로메로 대주교에게 ‘하느님의 종’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교황청 관료들은 시성절차를 전혀 진행시킬 수 없었으며,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로메로에 대한 신심이 해방신학과 같은 ‘좌파적’ 주장에 너무 가깝다고 염려했다. 로메로에 대한 시성절차가 지지부진한 것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교황청은 조만간 로메로를 ‘복자’로 선포할 것이라고 전했지만, 몇 주 뒤인 2005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면서 그마저도 묻혀버렸다.

로메로 시성 문제는 해방신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라칭거 추기경이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갑작스레 사임을 표명하고, 지난 3월 13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6주 만에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시성절차가 본격적인 궤도에 재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제 관건은 로메로 대주교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교황청이 확정하는 일이다.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라고 지칭한 바 있다. 만약 로메로 대주교를 ‘신앙’의 확신에 따른 행동으로 암살당한 ‘순교자’라고 선언한다면, 교황청은 일반적인 시성절차에 따른 규정을 면제하고 그를 ‘복자’로 선언할 수 있다. 그 후 로메로와 관련된 기적이 한 가지만 확인되면 시성될 수 있다. 순교자가 아닌 경우에는 기적이 2가지 이상 확인되어야 한다.

로메로 대주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동시에 시성될 가능성 높아

데이비드 깁슨에 따르면(Religion News Service, 2013년 4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장애 제거’ 소식에 앞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서 2번째 기적이 확인되어 곧 시성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고 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시성 대상자가 선종하고 5년이 지나야 시성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한 유예조항을 면제하고 곧바로 시성절차에 들어갔다. 깁슨은 빠르면 요한 바오로

▲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24일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병원에 있는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거행된 미사를 거행하면서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의 불의에 대항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는 이날 미사 중에 군부정권이 사주한 우익 암살단에 의해 저격당했다. (사진 출처 : The Archbishop Romero Trust, www.romerotrust.org.uk)
2세 교황 선출 35주년이 되는 오는 10월에 요한 바오로 2세와 로메로 대주교가 동시에 성인으로 선포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깁슨은 교황청이 성인과 관련한 ‘정치공학’의 차원에서 그동안 서로 대별되는 인물들을 묶어서 시성한 전례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2000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 완고한 전통주의자인 교황 비오 9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현대화를 이끌었던 교황 요한 23세를 함께 시복한 바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나치에 대한 협력 문제로 논란을 빚은 교황 비오 12세와 유대인들의 친구로 알려진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절차 개시를 2009년에 동시 발표했다.

따라서 교황 프란치스코도 “해방신학의 수호성인인 로메로 대주교와 그 해방신학을 억누르려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함께 시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교회의 전통주의자와 개혁주의자의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 다양한 세력을 공평하게 아우르는 조치로 두 사람을 동시에 시성할 필요를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인 교회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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