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다락방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은빛강 2017. 5. 3. 10:49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사랑이신 하느님*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를 생각하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생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의 깨달음은 바람처럼

한번 휙 지나가는 지성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 를

한번 생각해 보셨다고 가정하자.

무한 완전자이신 천주 성부의 당신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너무나 완전하시어 당신 자신과

똑같은 위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위격(位格, Persona, personality) 이란

"지성과 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의 주체" 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 이상 마귀, 천사,

하느님께만 위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완전하고 충실히 표현하면

그 사물 자체가 되듯이,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당신 자신에 대한 깨달음도 무한히 완전하여

'성부 하느님' 과 똑같은 위격을 가지게 된다.

생각이란 내적 언어인데, 성부의 생각(깨달음/지혜)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성부의 말씀이시다.

구약에 "성부의 지혜 또는 말씀"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분이 바로 '성자 하느님' 이시다.

여기서 '성부 하느님' 과 '성자 하느님' 이

사랑을 하셨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들도 서로 사랑하면 마음의 그림자인

정(情) 을 주고받든지, 물질을 선물하든지,

몸으로 희생하든지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끼리의 사랑은 지나가는

의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한히 완전하신 '성부 하느님'과 '

'성자 하느님' 의 사랑은 너무나 완벽하고 완전하여

성부와 성자 하느님과 똑같은 위격을 지니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 하느님' 이시다.

바로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서

서로서로 자신을 온전히 증여하며 사랑하고 계신다.

이러한 삼위일체 상호간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론" 이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서는 서로 높고 낮음도,

먼저와 나중됨도 없이, 영원으로부터

시작도 마침도 없이 존재하시는

'영원 자존자 - 과거도 미래도 없으시고 영원한 현재'

뿐인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 이다.

사랑은 가만히 있지 못하신다.

당신 자신은 조금도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으신 분이지만,

바로 사랑 때문에,

당신들이 누리는 무한한 사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다.

그래서 하느님께는 사랑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조금도 당신께는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에게는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만든 인간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뜻인 담긴 당신 계명을

인간들이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

당신을 위해 당신을 섬기도록 창조된 인간이

당신께 충실한지 충실하지 않은지

당신께 대한 충실성을 시험하시기 위해,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는 손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금한 열매 하나에 손을 대고 안대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 말라' 는 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옭아매는 것도 아니다.

계명이란 "창조주 하느님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피조물 인간과의 관계 개념" 인 것이다.

그러니까 계명을 어긴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저

하느님을 무시하고 제거하고,

인간 자신이 하느님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첫 사람은 교만과 불순명과

자유 남용으로 원죄를 지어,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성은혜(超性恩惠, 생명의 은총, 성화은총)을

잃어버려 하느님께 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셔도 되는데,

그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사랑은 가만히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의 죄 때문에

상처받은 당신의 착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운 마음을

풀어 드리기 위해,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과

위격과 레벨과 수준이 달라 어떻게 해 볼수 없는 인간을

대신해서,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성모님의 피와 살을 취하고 오셔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도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을 모든 죄와 벌을

대속(代贖) 하신 것이다.

교만과 불순명과 자유 남용을

겸손과 순명과 자유 선용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아버지의 뜻인 '인류 구원 사업' 을

성자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구세 경륜적 삼위일체론" 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사업' 이나 '구속사업' 이나 '성화사업' 이나

똑같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다 역사하셨다.

그러나 그 역할과 기능 면에서 '창조사업' 은

하느님의 전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성부 하느님께 돌리고, '구속사업'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성자 하느님께 돌리고, '성화사업' 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공로를 나누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 하느님께 돌린다.

우리 인간의 좁은 머리로 '천주 성삼의 신비' 를

다 알아들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인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 정도로 알아 듣는 것이다.

속일 수도 없고 속임을 당할 수도 없는

진실하신 하느님의 권위 때문에,

이성으로 못 알아들어도 교회가 가르쳐주는

계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받아들임이 앞설 때,

이해의 지평이 열려, '천주 성삼의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고,

생명과 거룩함의 영이신,

초자연적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을 때,

성삼의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살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요한 복음 14장 이하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첫 번째 변호자가 예수님이시고,

두 번째 변호자가 진리의 성령, 위로자이신

파라클리토(Paraclete) 성령이시라고 계시하신다.

여기 '성삼의 신비' 를 유비적으로 알아듣기 위해

'전기 작용' 을 생각해 보자.

전기 작용이 있으려면, 눈에 보이는 빛(電光)과

만져보면 뜨거운 전열(電熱), 그리고 그것이 있도록

만드는 동력의 원천인 전력(電力)이

있어야만 성립이 된다. 눈에 보이는 전광은 예수님,

뜨거운 전열은 성령님, 보이지 않는 전력은

성부 하느님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성인 파트리치오는 성삼위를 설명할 때,

잎이 셋이면서도 한 몸을 가진

'세잎 클로버'를 들고서 하셨다고 한다.

우리 가정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부부의 인격적

사랑의 결정체로 존재와 생명을 받은 자녀들

이렇게 삼위일체적으로 다 있어야 가정이 성립된다.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부르며 사랑의 신비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하든지 성삼위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성삼위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성삼위의 이름으로 마칠 때,

성삼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성삼위의 사랑으로 구속되었으며,

성삼위의 은총으로 성화되는

우리 인간의 존재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이름 중에 가장 거룩하시고 존엄하시고

엄위하시고 권세와 전능을 지니시고

무한히 완전하신 이름은 '성삼위' 의

이름 외에는 없으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낳아주는

도구 역할을 한 부모님의 이름도

조심스럽게 부르지 않는가!

하물며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함부로 불러서도

건성으로 불러서도 안된다.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성삼위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할 때 그리고 기도를 바칠 때,

진지하고 품위 있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심,

마지막 신심,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신심,

모든 신심들의 종합 신심은

'천주 성삼께 대한 신심' 이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천사의 품위 중에

가장 높은 세라핌 천사들이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보다 고차원의 지성과 의지를 지닌 천상 만군들이

'하느님 보좌' 앞에서 영원히 성삼을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죄 없는 당신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가

성체성사의 모습으로 그대로 재현되는 미사성제에서,

천상 만군들이 성모님과 함께 지극한 경외와 흠숭과

공경과 사랑을 드리지 않는가!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이신

성삼위께서 우리 자신과 가정과 본당과 직장과 모임과

이 지구와 온 우주를 축복해 주시기를 앙망하며,

성삼위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신비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임언기 신부님 '기도는 나의 성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