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다락방

사랑은 하느님이시기에 존재합니다.

은빛강 2017. 5. 2. 18:50

이 글이 무지하게 길어서 읽어보시기 어려우시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이 짝통아닌 진품이 되기위해서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선이가!

 

♣복음말씀의 향기♣ No1260

 

5월1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노동자의 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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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2-29)

 

<영원한 보화와 짝퉁>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참 메시아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킬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꿈을 성취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긴 했지만 결코 존경과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예수님께서 자취를 감출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 마다 목숨걸고 집요하게 그분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을 발견한 그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들을 몰래 따돌리고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그들의 속셈과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의미없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허황된 꿈들은 빨리 깰수록 좋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로고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다. 이 세상 것만 기를 쓰고 추구하지 말아라. 감추어진 세계, 보다 가치있고 차원 높은 세계는 어찌 보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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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2-29)

<(1)세상의 비난받는 표적으로 만드시는 성령님>

스페인에 알폰소 12세라 불리는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의 시동들이 하느님께 식사 기도를 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책망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왕은 시동 모두를 향연에 초대하였습니다. 식탁은 모든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으며 소년들은 매우 맛있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어느 누구도 식사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향연 중에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은 거지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는 왕의 식탁에 앉아 맘껏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처음에 시동들은 경악했으며 왕이 곧 그를 쫓아내라고 명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끝낸 거지는 감사의 말 한 마디도 없이 갔습니다. 그러자 소년들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야비하고 천한 사람인가!”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조용히 하도록 명하며, 뚜렷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소년들이여, 너희들은 거지보다 더 뻔뻔스럽고 대담한 사람들이다. 매일 너희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주신 음식을 먹으면서 그에게 은총을 바라거나 감사를 표현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만드는 ‘비난받는 표적’을 세워야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예언자 시므온이 성모님께 예수님은 세상의 비난받는 표적이 되어 그 어머니의 영혼 또한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스도를 단죄하여 하느님과 반대되는 무리였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마치 주인이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외아들을 보내는 이유는 그들이 설득당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아들의 죽음을 통해 명확히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 안에 성령께서 작용하시어 누구도 그의 언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테파노를 황당한 모함으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세상과 대적하는 자가 되게 하여 결국 우리의 순교로 세상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언변으로 주님을 증거한다고 세상이 모두 설득당할 것이란 생각은 접어야합니다. 원치 않으면 아무리 반박할 수 없는 언변으로 증명하더라도 절대로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이 나를 박해한다고 해서 또 아무도 나의 증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에서 무시 받고 박해받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칭찬받고 사람들로부터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하느님 눈에는 가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성과주의에 기뻐하지 말고, 세상의 몰이해에 실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차피 내 안에서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계심을 믿는다면 크게 기뻐할 것도 많이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내가 반대하는 사람 안에 성령께서 작용하고 계실 수도 있음도 주의해야 합니다. 가말리엘의 지혜처럼 우리 모두가 반대하는 그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총장에게 악수도 받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축하객은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다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말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처지라는 것을 알 때야만 이 성령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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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적과 표징의 차이는 행위와 존재의 차이다>

“선생님 제가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을 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 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 제자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능력이 어떤 일을 행하거나 행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물 위를 걷는다고 해서 어떠한 칭찬도 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氣)를 수련하는 이들은 진짜 공중부양을 한다고 합니다. 절벽에서 1미터 가량 떠서 설법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국스님은 하버드 대학에서 30센티 공중부양을 보여주고 그것을 보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을 매혹시킨 적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특이한 현상을 이루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큰 기적을 보이면 그 사람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는 기적의 종교가 아니라 표징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찾아온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행위나 이적에 집중하는 이들은 육체적인 이들이고,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이란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 ‘양식’, 곧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적은 표징입니다. 그리스도도 기적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표징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아들’이고 표징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기적만 보고 어떤 이들은 표징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차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은 표징인 것입니다.

기적을 보는 이들은 육체와 그 감정만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모두 그분을 버리고 떠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되어지는 믿음은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표징이 된 이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먹였던 만나가 곧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것과 같고 또 그렇게 그런 기적은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이 되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표징을 읽어낸 사람의 삶은 온통 변화되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아니 무엇이 되어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기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이들의 특성을 이야기하십니다. 기적을 본 이들은 무언가 ‘해서’ 그 기적에 응답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봉사활동을 한다든가, 죄의 행위를 끊어버리는 등의 일을 해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묻는 질문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런 이들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을 바리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를 인정하십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아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오로 사도처럼 고생한 분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성모님이 바오로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아주 많은 일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일 자체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는 존재가 변화되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어야지 억지로 마음에 드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안 됩니다.

행복한 만큼만 행하십시오. 이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고 자신을 아는 길입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되었기에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따뜻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주위의 우리들이 그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은 우리를 살리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음과 향기를 주는 꽃들도 마찬가지고,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좋은 일을 행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한 행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행위로 당신께 봉사하며 예수님의 발치에서만 있으려는 자신의 동생을 판단하는 언니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발치에 붙어있는 것. 그것만 바라십니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만 한다면 ‘저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봉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말씀이나 성경을 읽을 시간도 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이 원하는 것은 일 잘 하는 가정부가 아닌 순결한 신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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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

 

목수로 일한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의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복음: 마태 13,54-58

: 저 시림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회당에는 악의에 찬 믿지 않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릴 때,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지혜를 받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그것을 청하여 그것을 받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면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고 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지혜와 기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들먹이며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나게 할 어떤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샘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몹시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그분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하고 만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대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며 이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아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예언자들의 고향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들의 혈연관계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말씀대로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예언자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58절) 믿음이 없어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권능이 힘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놀라움이 커져 갔는데 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니라 기적의 소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기적이 소용이 없을 때는 행하지 않으셨다. 단지 몇 번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저자가 기적을 일으켰더라면, 우리도 믿었을 텐데’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업과 가족관계를 가지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혀 틀리는 경우가 많다. 고향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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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에서 찾는 행복>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날,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배불리 먹여주셨던 그곳에서 그분을 찾으려 합니다(6,21-24). 그러나 거기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6,25)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하시며, 그들의 속셈을 들추어내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던 호수 이쪽과 예수님을 찾아낸 호수 건너편은 우리가 찾아가는 '삶의 광야'입니다. 왜 군중들은 호수 이쪽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했을까요? ‘호수 이쪽’은 자신들의 배고품이 충족되었던 과거에 대한 애착이 있는 곳이요, 기대를 충족시켜줄 메시아, 현세적 욕구, 고정관념 등으로 꽉 차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누구든 목마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시선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지 못한 채, 그분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바랐던 것이지요. 신기루와 같은 거짓 희망의 끈을 붙들고 헛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현세적인 욕구를 충족하려는 군중들의 갈망은 끝을 모르고 매우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호수 이쪽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한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ㅇ그들은 작은 배들에 나누어 타고 노를 저어, 그분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6,24). 우리도 많은 순간 내 판단에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몰두하고 땀을 쏟아 붓기도 하지요. 방향착오로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찾아온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은, 인간적 기대와 욕망, 현세 애착과 고정관념 덩어리인 ‘호수 이쪽’과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요, 영원한 생명의 빵이며, 죽음을 이기는 희망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호수 건너편’은,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해 선물로 주시는 ‘길이 남아 있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있는 ‘생명의 땅’, ‘행복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왜 무엇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나와 우리, 이 사회가 찾아가 머물 곳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호수 건너편’입니다. 호수 건너편에서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해야겠습니다(6,29).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믿는 인간의 행위와 태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요청과 부르심에, 사랑과 정의와 선을 실행하는 행동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 나는 하느님과 무관하고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가득 찬 땅, 호수 이편에서 헛되이 땀을 흘리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렇다면 호수를 건너 예수님과 함께 하며, 내 영혼 뿐 아니라 내 가정과 사회, 교회를 되살리는 ‘썩어 없어지지 않을 생명의 빵’을 찾기 위해 투신하고 헌신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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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예수님의 능력을 본 군중은 더욱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이 보여 준 하느님의 표징을 읽지 못하고, 당신 곁에서 빵을 더 배불리 먹을 것만을 기대하는 군중의 현실적 욕망을 향해 일침을 날리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당장 먹을 것이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야속할 정도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강조하십니다.

 

혼란스러운 제자들과 군중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예수님의 표징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을 원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많은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기적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께서 몸소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 때 얻습니다.

 

사람들의 모함에 걸린 스테파노 성인이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는 세상에서도 참된 믿음은, 내가 먼저 상대방을 믿어 줄 때 그가 내게 보여 주는 희망 속에서 자라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그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려고 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성찬의 식탁에 나아갑시다>

 

오늘 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말씀을 바리용 신부님의 묵상 내용이 조금 풀어서 설명해 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이 빵 조각을 어떻게 보실까? 그분은 이것을 조약돌을 보는 것처럼 보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 빵은 하나의 온전한 역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빵을 손에 들기까지는 밭을 간 사람, 씨 뿌린 사람의 노동이 필요했다. 쟁기를 만든 그 모든 사람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다음엔 수확한 사람들과 바인더를 만든 사람들의 일, 제분업자, 제빵업자, 그러니까 당연히 반죽기를 만든 과정에서 일한 사람들 모두의 수고가 필요했다. 이 빵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결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을 인간화하는 것,

인간적인 것이 되도록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여기서 멈춘다면 대화는 끝이다. 인간의 역사는 순전히 인간적인 채로 남아 있게 되고 여기서 닫혀 버리게 된다.

사람은 그 빵을 먹을 것이고, 계속해서 일할 것이고, 자연을 변화시킬 것이고, 또 빵을 만들 것이다. 여기에 역사를 넘어설 출구란 없다.

그런데 내가 이 빵을 제대 위로 가져가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당신 자신의 몸으로 만드시며, 내가 인간화한 그것을 신화 또는 그리스도화 하시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기도는 탁월하다.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자연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온갖 작업을 거치고서야 빵이 존재하게 되고, 그리스도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과업을 수행하면서 이미 변화시킨 그것을 신화하시고 그리스도화 하신다. 성체는 인간적 과업이 완성되었다는 유효한 표징이다.】

묵상의 내용대로 우리 인간은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에너지를 얻어 다시 일하고, 다시 양식을 얻는 일을 반복하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출구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땀으로 일군 양식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곧 생명의 양식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그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죽지 않고 살게 해 주십니다.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성찬의 식탁에 나아가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죠.

어렵고 힘들고 나태한 마음이 들지라도 성찬의 식탁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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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언제가 마주해야 할 중요한 일>

 

요즘 중국어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언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주로 북한에 중고등학생이나 한국 대학생들이 많은데 그보다는 제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그 학생들과 비슷하게 해서는 잘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학생들이 한두 번 보고 외울 수 있다면 저는 그보다 두세 배 해야 외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외웠다고 해도 또 금방 까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도 신자들과 미사를 하고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한 뒤에 집에 와서 한자를 외우는데, 문득 예전에 어머니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예전에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어머니랑 같이 작은 텃밭을 했었는데요. 같이 비닐을 씌우고 조금 힘든 일을 할 때에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밭에 가서 일하자고 하면 일하기 싫다고 도망가곤 하셨는데, 결국엔 아들 때문에 다시 밭을 일구고 가꾸게 되었다면서 예전을 회상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지금 제 모습도 비슷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문이 교과 과정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 없어지는 추세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인가 1년만 배웠던 것 같은데요.

 

그 때 선생님이 조금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다 숙제도 많이 내주셨습니다. 한 글자를 백 번씩 써오라고 하셨는데요. 그때 한자를 쓰기 싫어서 살살 요령을 피웠었는데, 지금 한자를 몇십 번씩 반복해서 쓰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해야 될 일은 언제가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이 살짝 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모습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두려워 그 일을 피하고 도망갔지만, 언제가는 다시 마주하게 될 일인 것 같습니다.

 

피하고 달아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언제가 그들이 그 일의 완성을 마주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반복해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을 떼어 주십니다.

 

반복하지만 알지 못하는 그들이 언제가 번뜩 깨닫고 ‘이 일이 외면하거나 도망친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내가 마주해야 할 중요한 일이구나.. 다른 삶의 지평을 보여주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 너머의 삶을 바라보지 못했다면, 주님은 어김없이 그 중요한 일을 다시 보여주시고 마주하게 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매일 미사가 그렇고, 매일 들려오는 말씀이 그렇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가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피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보여주십니다.

한 번쯤은 진지하게 중요하게 보여주시는 그 일을 마주하여 봅시다. 또 오랜 시간 그 앞에서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제자들과 같은 체험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질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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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빵만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한 6,15)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사람들은 빵만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일 뿐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먹는다면 결국 그 자신도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그 생명을 주는 영원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썩어 없어질 양식만 바란다면 나에게 오지 마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다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아먹어라."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썩어 없어질 양식은 아예 먹지 마라."가 아닙니다. 몸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그런 양식도 먹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날마다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몸의 생명은 몸과 함께 끝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기적을 행하셔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기적의 빵'도 물질적인 면만 본다면 사실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습니다. 그저 한 끼 식사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추구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빵만 보지 말고 그 빵을 준 나를 보아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빵의 기적'은 잠깐 배부르고 끝나버린 일회성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자기들을 날마다 배불리 먹이라고 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누가 임금이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누가 임금이 되든 상관없다."라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독재자라도 상관없고, 사탄이라도 상관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들을 얻으려고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직접 다스릴 때, 먹고사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당시에 매일의 양식 배급을 사도들이 직접 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편애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받는 사람들 쪽에서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무리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도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그래서 일곱 봉사자가(부제들이) 선발되었는데,

사도들이 그 일곱 봉사자들보다 평판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성령과 지혜가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지 못할 정도로 '식탁 봉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입니다. 양식을 배급하는 일만 신경 쓰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있었음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당시의 교회는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무료 급식소'로 전락한 상태였다는 뜻이 됩니다.

반대쪽에서 생각하면, 불평을 터뜨린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은 듣지 않고, 사도들이 나누어 주는 양식만 바라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도 사도들이 '식탁 봉사'를 완전히 중단하지 않은 것은 먹고사는 일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봉사자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했다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말씀'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살 것인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르게 되고, 결국 인생이(현세의 내세의 인생이 전부 다) 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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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하철 충정로 역에서 좋은 시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가고 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예전에 알던 수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십니다. 수녀님과 대화를 하면서 사제들에 대한 말을 함께 하였습니다. 강론을 잘 준비하시는 신부님, 영적으로 충만한 신부님, 건강관리를 잘 하시는 신부님을 보면 기쁘고,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강론 준비를 소홀히 하는 신부님, 외로움을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푸는 신부님, 건강관리를 잘못하셔서 병원을 찾는 신부님을 보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도 술 조금만 마시고, 건강관리를 잘 하시라고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산보를 가면 새롭게 문을 여는 가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가게는 처음에는 가격을 할인하기도 하고, 사은품을 주기도 하고, 도우미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인을 하고, 사은품을 준다고 해도 가게는 물건의 질이 좋아야 합니다. 음식점은 맛이 있어야 합니다. 물건의 질이 나쁘고, 음식의 맛이 없으면 손님이 잘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베어나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면 그것은 이름만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12년 전, 캐나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길도 모르고, 은행 일, 슈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차가 없이는 모든 것이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중에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었지만, 처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을 시작부터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누군가에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곧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시오. 네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모금의 물이 되어 주는 것,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쉼터가 되어 주는 것, 가난 한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박해를 받기도 하고, 그 길은 모욕을 받기도하고, 그 길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성모 성월을 시작하는 5월의 첫날입니다.

곧 없어질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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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믿음을 향하여...>

 

5월1일 오늘은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 복음을 묵상하기 위해서... 저는 오늘 부활 3주간 월요일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러 가고 싶지 않는데 일하라 가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할 때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말하면서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포도청’은 두렵고 무서움 자체였습니다. 포도청에서 오라하면 가고, 가라하면 가야 했습니다. 포도청에서 원하는 것은 싫어도 무엇이든지 해야 합니다. 포도청에서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줘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구멍을 포도청”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무엇이 하느님의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이 믿음이다.”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일)를 보여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저희에게 베풀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좀 더 굳세게 믿어보라고 하십니다.

 

시편 46편 11절에 보면...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나는 민족들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 위에 드높이 있노라!”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정하시고 보내신 당신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부 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을 다 가보기에는 생이 너무 짧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을 향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믿음을 향하여! 이것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흔들리지 말고 예수님을 향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믿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고운님들! 크게 한 번 외쳐 보시지요.

“내 목구멍이 예수님이요, 내 목구멍이 영원한 생명이요, 내 목구멍이 믿음이요.”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하느님이 보내신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음으로 내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어 만사형통하는 축복된 날이 되시기를...아멘.

 

** 조 두레박 피정안내**

2017년 상반기 조두레박 신부와 함께 하는 피정 안내입니다~~

일시 : 6월 2일 금요일~4일 주일 (2박3일)

장소 : 도화성당

피정비 : 13만원

피정신청은 선착순 40명으로 5월 20일까지 봉사자이신 최영희 임마꿀라따 (010-6630-4667)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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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하늘의 양식>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밥을 먹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파집니다. 따라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밥을 먹는 것 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먼저 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양식은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요한6,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6,35).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 곧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 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나 신심서적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은 많으나 기도하는 시간은 적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현실적인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이 풍성하게 주어지면 기도하라 하지 않아도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도 좋지만 천상의 축복이 더 귀합니다. 영광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고난의 특권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일이라도 끝을 맺어 놓아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선한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허나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것인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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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6,27)

 

조금만 배고파도 우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애씁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감각을 통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물질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감각이 가장 먼저 취하는 것이 현실의 양식일지라도 우리의 마음까지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맛을 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속물근성‘에 길들여집니다.

 

’속물근성‘에 빠지면 ’썩어 없어질 양식‘에 자신의 마음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겉으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美)에 마음을 빼앗기면, 아름다움 너머에 존재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선(善)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선(善)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비록 ‘썩어 없어질 양식’이지만 현실적 미(美)의 양식은 선(善)과 진리(眞理)이신 주님을 품고 있는 그릇입니다. 창조된 만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도구입니다. 썩어 없어질 아름다운 양식이 담고 있는 선(善)과 진리(眞理)와 사랑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겉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양식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면 ‘속물’이 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일지라도 현실적 재물과 권력과 명예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에 빠지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을 만들게 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으면 죽음의 문화가 활개를 치지만,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통하여 선(善)과 진리(眞理)와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공동선과 생명의 문화를 퍼뜨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사람들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생명의 문화를 갈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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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우리가 영원히 추구할 바는, 바로 하느님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상의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의 내적 갈망을 충족 시켜줄 수 있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무지의 사람들이요 지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세적인 중요한 것들은 모두 한 글자의 단어입니다.

 

밥, 돈, 집, 일, 모두 삶에 필수적인 것들이요 하나로 연결된 것들입니다. 돈이 있어야 밥도 집도 있고, 돈을 벌어 살기위해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현세적인 것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궁극 목표로 삼지 말고, 그 넘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을, 삶의 의미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영혼의 목마름이나 배고픔은 결코 밥이나 돈으로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주님을 찾은 사람들은 그대로 육적인간을, 아래로 부터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사람들이요 주로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말그대로 ‘격格’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인격人格, 품격品格, 국격國格등 전반적으로 붕괴되어 가는 내적 삶, 영적 삶입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막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생각없이 살다보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데 영원한 생명의 추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말 참사람의 인격자가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안보에는 좌우가 없고 유능과 무능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인격자이면서 유능한 분, 기도하는 분이 대통령으로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다음 복음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을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6,26ㄴ-27).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선물받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아드님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기도, 예물기도, 영성체후 기도, 모두가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영적 삶에 유익한지 깨닫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주님,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요약하면 주님의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맞갖은 삶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화답송 후렴도 같은 맥락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바로 이런 이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이들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을 찾은 사람들과 주님과의 우문현답愚問賢答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허를 찌른,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기에 앞서 진정 주님을 믿을 때, 믿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니 저절로 우리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할 하느님의 일은 아드님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무지한 이들과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증오에는 연민의 사랑으로, 분노에는 평화로 응답합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스테파노가 영원한 생명의 모범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한, 주님과 하나된 삶이었기에 아무도 논쟁에서 그의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갖 거짓 증인들의 공격에도 요지부동 내적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스테파노입니다.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 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합니다.

 

얼굴은 영혼의 표현이자 거울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는 밝고 맑은 스테파노의 얼굴을 통해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희망의 승리, 주님의 승리를 읽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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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만 매달릴 뿐, 표징을 통해 얻은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참된 생명”인 표징자체를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 곧 'OPUS DEI'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음’,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요한 4,34)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믿음으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용서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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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꼼수>

 

그날 갈릴래아 호수주변이 소란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군중들 가운데 집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무리가 있었고 또 티베리아스에서는 배 몇 척이 주님의 기적을 보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왔으니 시끌벅적 요란했겠지요.

 

그들은 모두 주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 애가 탔을 것입니다. 마침내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정말 반가웠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공손하게 여쭙고 있습니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라삐”라는 호칭으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올리는군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지난밤에 왔다.”거나 “사실은 바다 위로 걸어왔다”라고 솔직하게 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콕 찌르며 그들의 감춰진 생각을 들추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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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기적과 표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배부른 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가 돈 잘 벌고 출세하고 폼 나게 살기 위한 것이라면 오산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더 큰집에 살면서 더 큰 명예를 얻어서 으스대기 위함이라면 조잡한 꼼수일 뿐입니다. 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을 놓치고 믿음의 현상에만 머물려는 지극히 초보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날 그들은 표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표징을 일으키는 분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기에 이토록 아둔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배부르게 한 후에 이 땅에서 왕이 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군중이 애써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그토록 애타게 따르고 있는 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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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창한 업적을 이루라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아들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영생의 양식을 먹고 믿음으로 힘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행한 일이 모두, 하느님의 일인 까닭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하는 일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결코 하느님의 일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일 뿐입니다. 믿음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이 가장 귀한 이유라 새깁니다.

 

오늘 주님께 무엇을 기도 드리십니까?

주님께 무엇을 여쭙고 무엇을 청하십니까?

어떤 것을 기대하고 그분을 찾으십니까?

오직 그분을 향한 믿음이라면 그분의 지혜와 성령께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뜻에 의탁하는 믿음이라면 그분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나를 위한 꼼수를 감추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서 꾀를 부리고 궁리하지는 않습니까?

 

이 모두를 밝히 아시는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올리고 청하는 기도 때문에 그분께서 더 많이 외로워지는 일이 없도록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우리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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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 이유>

지난 금요일부터 오는 토요일까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 미사전례복음으로 봉독된다고 하였다.

지난 토요일에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내용

(6,16-21)을 복음으로 들었다.

오늘 복음은 군중들이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서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이동했다(22-24절)는 보도와 여기서 내리시는 빵의 기적에 대한 가르침(25-59절) 중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첫 부분(25-2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지방의 카파르나움은 유다 지방의 예루살렘만큼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다. 여기서 예수님의 놀라운 빵의 기적이 베풀어졌고 그 기적에 대한 진정한 해석과 가르침이 주어지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카파르나움은 예수께서 거주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이곳에서 많은 가르침과 행적(루카 4,23)이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이 카파르나움에서 예수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을까?(24절)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

그들은 분명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 천명을 먹인 '예언자'를 찾고 있으며, 그들을 다시금 배불리 먹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빵의 기적을 행하신 호숫가에서 이곳 카파르나움으로 장소를 옮기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위하여 수고스럽게 장소를 옮기셨다. 그렇다고 카파르나움에까지 와서 예수를 찾아낸 군중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빵의 기적에 대한 감동과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육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군중의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하신 것이다. 한꺼번에 둘 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적인 세계를 갈망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썩지 않는 양식이다. 이 양식을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권능과 함께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신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 첫걸음이자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이 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묻기보다는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업적이나 성덕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신 사람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인간 자체의 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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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경욱 요한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즈음 봄꽃들로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주님 부활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듯합니다.

생명을 주시러 오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생명의 양식과 음료로 주셨습니다. 하늘이 주는 생명의 물과 빛으로 땅에 생명이 넘쳐나듯 우리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면서 억지로라도 왕으로 세우려 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었고 마침내 주님을 찾았습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주님을 찾았던 근본이유에 대해서 복음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음식을 먹어서 에너지를 만들어 몸의 기관에서 사용함으로써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가 고팠을 때에는 먹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배를 채워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배불려주신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끔 우리들도 일을 하면서 이렇게 푸념하곤 합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즉 일하는 목적이 먹는 것인지, 먹는 목적이 일하기 위함인지 잘 분간은 되지 않지만, 먹는 것이 우리 삶의 중심으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는 먹을거리가 참 많습니다. 밥도 있고, 빵도 있고, 푸른 야채와 해초, 그리고 바다속 물고기며 들판의 육고기며 참으로 우리의 배를 불리게 하는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독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기도 합니다. 먹는 행위도 중요하고 먹는 내용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없어지지 않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입 안으로 들어와서 소화되어 에너지로 변화고 소멸하고 마는 육신의 양식이 아닌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먹으라고 주님은 재촉하고 계십니다.

없어지지 않는 영생의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군중들이 “저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첫 단추라는 것입니다.

밥이 육신의 생명을 주는 것처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밥이 되고 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가장 낮추인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체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빵을 배불리 먹고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 즉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발걸음부터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추구합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합니다. 좋은 말을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합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며 실패를 생각지 않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합니다. 또 웃을 수 있는 곳으로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내 이웃을 한번 더 웃게 해서 생명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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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가장 아름다운

계절 오월

성모 성월 첫 날에

우리의 소중한 노동자

성 요셉을

만나게됩니다.

 

노동의 역사 안에

성 요셉이 있습니다.

 

노동이란

가족을 위한

사랑이며

식구들을 위한

헌신입니다.

 

짊어져야 할

소중한 가족이

성 요셉의 노동으로

더욱 소중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소중한 가족을 위한

노동의 눈물겨운

밥상이 차려집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노동의 존귀한

가치입니다.

 

사랑과 노동은

언제나 함께

존재합니다.

 

노동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는 일이

바로 노동입니다.

 

노동이라는

건강한 땀방울이

우리를 정직한 사람으로

바꾸어 줍니다.

 

우리의 노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감사의 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 많은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가 행복해야

우리 사회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 또한

성 요셉의 노동을 통해

마음과 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으셨습니다.

 

노동과 구원의 관계 안에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이 있습니다.

 

오월이 아름답듯

우리의 노동 또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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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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