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유식 평론가님 방

젊은 날 부러웠던 이유식 평론가

은빛강 2010. 2. 10. 12:01

'문학의 길잡이 > 이유식 평론가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날 부러웠던 이유식 평론가

[김용태]

먼저 청다靑多 이유식 선생의 기념 문집 간행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면서 이에 나도 함께 기뻐합니다. 

▲ 김용태 평론가
지금 청다 선생은 서울에서 대학교수로 문학 강의를 하시면서 정년을 맞이하고 계시고, 나는 부산에서 역시 대학 교수로 문학과 더불어 살아온 삼십 년 교수생활을 마감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니 지나간 청춘이 어제인 듯 참으로 감회가 깊고 세월의 무상함에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청다 이유식 형 !
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산 좋고 물 맑은 경남 산청, 산골에시 태어나서 그 산 정기 물 기운으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존경받는 이나라 훌륭하신 문학 평론가로 대성하셨습니다. 

강직하시면서도 정이 깊고 또한 여유 있으신 그 유연한 성품은, 소년시절 늘 바라보시던 하동의 섬진강을 닮은 듯도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부산에서, 형은 부산대학교를 졸업하시고 항도고교(현 가야고)에서, 나는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동아고등학교에서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1961년 8월, 형은 이 나라의 최장수 최권위 문예지《현대문학》에 '현대적 시인형' 으로 조연현 선생으로부터 평론 초회 추천을 받으셨고, 동년 11월에 동지에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 으로 추천을 완료하시고 이 나라 문단에 혜성과 같은 평론가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때 형의 이름을 처음 알았고, 또 글도 처음 읽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처음으로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그때 나는 감성 많은 젊은 문학도로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나도 《현대문학》지에 추천을 받아서 당당한 평론가로 등단을 해아겠다는 굳은 의지와 욕망을 갖고 열심히 무장(?)을 하고 있는 중인데, 형의 추천 평론들을 읽어보니 나의 무장은 개구리 웅덩이 속의 재주인 듯 무색해졌기 때문에, 평론가를 지망하던 꿈이 좌절되는 듯 허허롭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형의 글은 참으로 논리가 정연하고 날카롭기도 하고 참신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방황하다가 새로운 결심을 하였습니다. 당시 내가 남들 앞에서 조금은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이 불교에 관한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불교이론의 전문가들은 불교이론을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논의하였고, 또 새로운 이론을 제시해 내지 못하고 늘 진부한 방법을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서 불만도 있었고, 또 불교 이론을 문학 이론으로 이끌어들여 보겠다는 욕망도 강하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문단에 새로운,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자신 있는 일로써 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나는 몇번이고 다짐하였습니다. 

1965년 5월 '반야의 문학적 의미' 로 나는 드디어 《현대문학》지의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보살도의 미학' 으로 《현대문학》의 추천을 완료하였습니다. 앞의 글은 불교이론을 평론이론으로 접목시켜 보고자 한 시도였고, 뒤의 글은 불교이론으로 문학작품을 조명해 본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이 글들이 나의 독창적인 평론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1961년 이유식 형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분발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이유식 형이 추천받은 평론과 대등(?)한 평론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유식 형이 너무나 고맙기도 합니다. 

형은 《현대문학》지의, 그것도 같은 평론의 나의 선배요 문단의 선배이시기도 합니다. 형은 지금까지 서울에서 대학교수로서, 평론가로서 문학의 여러 장르에, 또 문단의 여러 분야에 종횡무진하게 활동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후배,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또 우리 문단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40대 초반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또 서울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습니다만, 그때의 집안 사정들이 부산을 떠날 수가 없어 그만 그때의 꿈을 접고 내가 사랑하는 부산에서 나의 문학을 꽃피우면서 살기로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그때 만약 내가 서울로 옮겼더라면, 오늘날 형의 문단적 위치나 위상은 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는 청다 형과 손을 잡고, 문단의 부조리들을 타파하고 정리하는 일에 앞장섰을 것이고, 청다 형은 예리한 필봉으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후배, 제자들을 양성하였더라면 이 나라 문단에 지금과 같은 불량배들은 발붙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고 한탄도 됩니다만 모두가 다 인연의 소치이니, 이제 우리는 세월의 주름살 속에서 문학의 열매를 더 영글게하면서 저 섬진강의 밝은물 흐르듯이 인생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길이 형이나 나의 복된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경상도 무딘 사투리가 통하는 평론가로서, 권위 있는 《현대문학》의 관문을 통과한 동문으로서, 대학의 강단에서 문학이론을 강의하는 교수로서, 같은 것이 너무 많지만, 형은 서울에 살고, 나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 그 지역공간의 다름 때문에 자주 만나서 애환을 함께하지 못하고 오늘에사 형의 기념문집에 나의 마음을 담은 이 글을 쓰니, 지난날의 정이 새삼스레 눈시울 따뜻하게 젖어듭니다.
청다 이유식 형!

■ 김용태
문학평론가. 전 신라대학교 총장

[山房의 눈빛』(국제신문 刊) 수록]

 
김용태 문학평론가
산방(山房)의 눈빛

이유식의 문단 비화(5)-김수영 편  (0) 2010.04.09
이유식의 문단 비화(4)-천상병 편   (0) 2010.03.04
이유식의 문단 비화(1)-박재삼 편   (0) 2010.01.30
이유식의 문단 비화(2)-황용주 편   (0) 2010.01.30
이유식의 문단 비화(3)-김상옥·조유로 편   (0) 2010.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