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유식 평론가님 방

[스크랩] (수필)와이키키 해변의 어느 오후

은빛강 2010. 4. 10. 17:48

 와이키키 해변의 어느 오후

 

 

                                                                                        이 유 식

 


 알로하(Aloha), 야자수, 훌라춤, 상하(常夏)의 나라 하와이를 몇 년 전에 다녀왔다.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학장과 몇몇 교수들이 호놀룰루에 있는 카피올라니대학과 자매결연식을 맺기 위한 출장여행이었다.

 하와이는 평소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50년대 말에 흰색이나 회색계열만 즐겨 입던 우리의 셔츠패션에 처음으로 컬러풀한 색상의 알로하셔츠가 유행해 나도 색다른 멋으로 하나 사 입고 하와이풍을 흉내내 보며 그곳의 풍광을 상상해 보며 동경하는 마음도 가져 보았다. 또 비슷한 시기에「하와이안 훌라 아가씨」란 노래가 유행했는데 이 노래를 부르면서 훌라 아가씨의 멋들어진 엉덩이춤을 그려보기도 했다.

 우리는 KAL기 편으로 떠났다. 기내에서 나는 미리 준비해 간 하와이 안내 책자를 꺼내 좀 봐 두었다.

 하와이제도가 문명국에 알려진 것은 1778년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쿡에 의해서였고, 그 당시 원주민은 약 33만 명이었고 추장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이런 추장사회가 왕국으로 성립된 것은 1795년도였다. 카메하메하 추장이 전 하와이섬을 통일하여 왕국을 수립하고 제1세 대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간 8대에 걸친 하와이왕조가 시작되었다. 왕조의 초기에는 수도가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였으나 카메하메하 3세 때인 1850년에 지금의 호놀룰루로 옮겼다.

 그리고 1893년 혁명에 의해 하와이 왕조는 붕괴되어 공화국으로 되었다가 1897년 미국의회에서 하와이 합병안이 통과되었고 1959년에는 50번째의 주로 승격되었다.

 일반적으로 하와이하면 하와이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와이 제도를 말하는데 전부 24개 섬으로 이루어져있고, 17개 섬은 무인도이고 유인도는 수도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그리고 마우이, 하와이, 카우아이, 니하후, 몰로카이, 라나이 등 7개 섬이다.

 8시간의 비행 끝에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와이키키 해안변에 있는 호텔로 가 여장을 풀었다. 5박 6일 중 자매결연식을 하는 날을 제외하곤 호놀룰루 시내관광과 오아후 섬 일주관광을 즐겼다.

 특히 이 중에서 아직도 감동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은 주청사 안에 세워져 있는 다미엔 신부의 동상을 보며 들었던 이야기다. 몰로카이섬에 수용된 나병환자들과 함께 생애를 보내고 끝내 그도 나병환자가 되었다는 그 이야기는 실로 인류애와 봉사애의 극치로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만 알고 내 가족만 늘 생각하는 나의 이기심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하나우마 만이었다. 해상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데 ‘굽어져 있다’는 뜻으로 절벽 아래 문자 그대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해변은 절경중의 절경이었다. 왕년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한 영화「블루하와이」의 로케장소가 된 이유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산호의 바다에 수영객과 열대어들이 어울려 노는 광경은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원시의 선경이요 낙원 같은 세계였다.

 그리고 이 여행길에서 한 가지 배운 것도 있다. 오아후섬 일주여행길에 둘러본 폴리네시안 문화센터에서 훌라춤의 설명을 듣고 실습도 해봤다. 동작 하나 하나 그리고 손과 팔의 모양에 각각 춤언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기뻤던 일이라면 하와이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의 평론집이 그 곳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기뻤다. 이보다 훨씬 앞서서는 하바드대학에 교환교수로 1년간 머물다 돌아온 평론가 겸 서강대 교수인 이재선 박사로부터 나의 책이 그곳 도서관에 있더라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힘들지만 글을 쓰는 보람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또 하와이대 도서관에도 나의 책이 비치되어 있구나 싶으니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뭐니 해도 가장 생생한 기억은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낸 시간이다. 입국 전날 오후, 다른 일행들은 쇼핑을 떠났지만 나는 같은 과의 젊은 교수(윤광희)와 단 둘이서 오후를 거기서 즐겼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해수욕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태평양의 바닷물에 몸을 한번 맡겨 본다는 것은 짜릿한 흥분과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와이키키 해변이 나를 끌어들인 강렬한 유혹은 현장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풍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60년도를 전후해서 내가 본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받은 어떤 씬의 강렬한 인상도 작용했다.

 이 영화는 제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호놀룰루에 있는 미군 기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부대장의 아내 역으로 나온 데버러 커는 멋대가리가 없고 냉혹하기만 한 남편에게 진저리가 나 결국 이 남자 저 남자 교제를 하던 중 남편 부대의 선임하사 역으로 나온 버트 랭커스터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긴다. 그들이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처음으로 격렬한 포옹과 키스를 나누던 곳이 바로 이 와이키키 해변이다.

 나는 그 날 이 영화 속의 이 장면을 흉내라도 내듯 금발의 미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수영을 즐겼다. 그리고 잠시 야자수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데 우연히 수영을 하려고 나온 하와이 한국인 이민 3세를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하와이 이민사를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1900년대 초에 시작한 하와이 농장이민이 1905년 말까지 이어져 약 7천 3백 명이 왔는데 처음에는 큰돈을 벌어 보겠다는 큰 꿈을 안고 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사탕무와 파인애플 농장에서의 중노동뿐이었다.

 그는 자기 할아버지가 바로 이민 1세대인데 할머니를 이른바 ‘사진결혼’에 의해 맞이했다는 것이다. ‘사진 결혼’은 고된 일을 하는 막일꾼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미국인 농장주들의 아이디어였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 이처럼 사진 신랑을 찾아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는 모두 950여 명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눈에 비치는 화려한 와이키키 해변 풍경과는 달리 마음 한구석이 차츰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불운했던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듣는 기분이었다.

 순간 바람이 차츰 거세어지며 높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인생이란 참으로 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해변의 모래알 같은 것이 인간의 목숨일진대 왜 사람들은 아웅다웅 으르렁거리며 돈을, 권력을, 자리를 탐하는가 도 싶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의 흔적이나 내가 밟았던 모래사장의 발자취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도에 밀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리라 생각하며 나도 언젠가는 그런 길을 밟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 분과 헤어지고 우리는 곧장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어차피 하와이 사람들도 한순간 이 세상을 살다 떠나겠지만 그래도 환경오염에서 자유로와 천혜의 자연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구나 싶으니 한편으로는 부러움도 들었다.


<격월간「동방문학」, 2000년 12월호>

출처 : 청다문학
글쓴이 : 이유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