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잡이/이유식 평론가님 방

이유식의문단비화(6)-조연현 편

은빛강 2010. 5. 15. 12:47

이유식의문단비화(6)-조연현 편

내 문학의 버팀목, 조연현 선생

[이유식의 문단 뒷골목 이야기]

석재(石齋) 조연현 선생은 나를 문단에 내보내 주신 분이다. 요산 김정한 선생으로부터 대학시절 평론가로서 가능성이 있다는 일차 평가를 받았으니 문득 내

▲ 이유식 평론가
자신을 좀 더 넓은 무대에서 평가받고 싶었다. 

1학년 말이었다. 습작 중 내 딴의 우수작을 골라 《현대문학》지에 신인 추천평론으로 투고해 보았다. 투고에 대한 의외의 엽서가 날아왔다. 추천심사위원인 동시에 주간이신 조연현 선생님의 편지였다. 학생 신분의 나에게‘형의 원고…’ 라고 시작된 첫줄의 감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유능한 평론가’ 를 얻겠다는 격려와 더불어 다른 작품을 한편 더 보여달라는 요청이었다.

결국 이때의 충격이 나를 평단으로 이끌었던 계기였다. 그 엽서를 금쪽처럼 늘 가지고 다니면서 급우들이나 대학 내의 문학지망생들에게 그 얼마나 자랑삼아 내보였는지 모서리가 낡아서 다 닳을 정도가 되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좀 지나서 그 엽서를 버리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을 갖게 한 최초의 중요 문서인 만큼 지금은 기념품이 되고, 다음은 유품이 될 법하다 싶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61년도에 평론가로 데뷔하였다. 생면부지로 데뷔했으니 데뷔 1년 후 인사차 겨울방학을 이용해 부산에서 올라와 현대문학사를 찾아갔다. 마침 강연차 지방에 가셨다기에 이튿날 점심시간 가까이에 비로소 뵙고 인사를 드렸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식사대접을 하려고 하자 추우니 중국집에서 배달시켜 먹자는 말씀이었다. 오라, 학생신분인 나의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는 듯도 싶어 약간은 안심은 되었다.

64년도부터 서울생활이 시작되어 비로소 제자로서 때때로 찾아뵐 수 있는기회가 있었다. 설익은 글이긴 하지만 나에게 많은 발표의 기회를 주었는데, 그것이 모두 주간직을 맡고 계셨던 선생님의 배려요 은덕이었다. 뿐만 아니라, 70년도에 동 지면에연재한‘한국소설론’을 보시고 ‘현대문학상’ 까지 안겨 주셨으니 은덕을 입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1981년도 10월 말경에 나는‘문인 해외시찰단’ 의 일원으로 첫 해외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문협 사무실에서 그 여행계획을 말씀드렸더니 여러 가지 정보를 주시면서 쇼핑정보까지 주시는 것이었다. 이태리에 가면 다른 쇼핑은 하지 말고 지중해 산 심해 조개껍질 속살로 조각한 여성용 악세서리의 일종인 ‘까메오’ 란 물건을 사오면 좋다하시며, 필요시는 돈으로서 교환가치도 꽤 있다는 것이었다. 말씀대로 소렌토에서 로마로 되돌아오는 길에 공장에 들려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아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 사모님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나는 두 개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2, 3일간 여독을 풀기 위해 집에서 쉬고 있는데 TV를 켰더니 느닷없이 일본여행 중에 호텔 방에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순간 깜짝 놀랐다.

서부경남 출신인 내가 그 당시로 보아서는 지연이나 학연의 끄나풀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외지나 다름없는 서울생활에서 마음속으로나마 크게 의지하던 분이 떠났다 싶으니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까메오의 분실과 선생님의 작고에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운명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 싶으니 마음이 착잡했던 기억이 새롭다.

석재 선생이 오래 사셨다면 그 분의 나에 대한 배려와 제자사랑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큰 대학 교수로까지 추천해 주었으리라 본다. 그랬다면 더욱 활발한 비평활동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 늘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이유식
문학평론가. 수필가

[미래문화신문 제12호(2009.9.8) 수록]
                                           

            

 
이유식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