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마당/예향 산책

휴먼 스케일/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은빛강 2010. 8. 13. 06:00

휴먼 스케일

대청 천장은 높고 방의 천장은 낮다

한옥에서 대청의 천장은 높고 방의 천장은 낮다. 당연하다. 대청은 넓고 방은 좁기 때문이다. 건축에서 얘기하는 스케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척도인데, 단순히 잰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비율’이라는 의미이다. ‘x-y-z'축의 세 방향 크기가 정비례를 기본 법칙으로 상식적 범위 내에서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는 범위, 혹은 그렇게 정해지는 상대적 치수라는 뜻이다. 넓은 광장 앞에 들어서는 건물은 따라서 커야 하며 키 큰 사람이 신발도 큰 걸 신는 것 등이 모두 스케일의 개념이다. 한옥에서는 이를 잘 알고 지킨다. 대청 천장을 굳이 안 막고 구조를 다 드러낸 이유는 여름에 바람을 시원하게 들이려는 환경적 목적이나 구조미학이라는 조형적 목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케일에 맞춰 천장을 높게 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방과 대청 사이의 천장 높이 차이는 기능적인 면도 있다. 좌식생활에 맞게 방의 천장은 낮다.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천장이 높을 필요가 없다. 이놈의 좌식생활 때문에 조선이 호연지기를 잃고 앉은뱅이처럼 찌그러들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낮은 천장이 주는 아늑하고 포근한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창호지 문이라도 닫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으면 어머니 품 안에 안긴 것 같다. 좌식생활이 불편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식생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공간적 특징이다. 한 공간에서 바닥 면적과 천장 높이 사이의 관계가 왜 중요할까. 한마디로 방이 작으면 천장이 낮아야 사람은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대청은 좌식생활과 입식생활이 함께 일어나는 곳이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전이공간이라는 곳인데, 좌식의 실내생활과 입식의 실외생활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장 높이를 입식생활에 맞게 높게 냈다. 대청은 한옥을 완전한 앉은뱅이 공간만으로 놔두지 않는 역할도 한다.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꺾임이 많은 한옥에서 분명히 제일 장쾌한 공간이다. 방과의 스케일 대비가 심하기 때문에 그 효과는 그만큼 커진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주인마님의 체통을 제일 잘 살려서 영을 세워주는 장면은 사모관대를 쓴 양반이 대청에 서서 호령하는 장면일 것이다. 어머니 품 같이 아늑한 방과 양반의 체통을 살려주는 장쾌한 대청은 스케일의 미학을 대표하는 좋은 예이다. 이 둘을 한 채 안에 나란히 둬서 대비의 미학을 살려낸 것은 스케일의 미학을 제대로 구사해서 응용할 줄 아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오르내림과 꺾임이 많은 한옥 구조의 휴먼 스케일

한옥은 오르내림이 많고 꺾임도 많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불편하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인간을 돕는 이로움의 과학이다. 곰곰이 따져보자. 평평하고 밋밋한 집에서 살면 정녕 편리한가. 요즘 유행하는 텔레비전의 건강 프로그램, 심지어 9시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문구 하나, “스트레칭 세 번만 해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이다. 사무직 종사자, 운전자, 가정주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사람 몸은 자주 움직여야 건강이 유지된다는 말이다. 평평하고 밋밋한 집에서 개구리 겨울잠 자듯 살다보니 결국 온몸이 찌뿌드드해지고 헬스클럽과 요가원을 찾게 된다. 오르내림과 꺾임이 많은 집에서 살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 일상생활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많이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신체 이동의 템포를 조금 천천히 잡아야 한다. 급한 마음에 쫓기는 것 같은 템포로 사는 사람에게 오르내림과 꺾임이 많은 구조는 단지 불편할 뿐이다.

 

 

김동수 고택 사랑채 꽤 높은 문지방을 덩그러니 댓돌 하나
로 오른다. 정강이 한 마디의 휴먼 스케일을 두 번 연달아 썼다. 무릎을 많이 구부리는 몸동작이 일어난다.

운현궁 노락당 마당에서 퇴에 오르는 길은 무릎을 크게 두 번
구부린 뒤 한 번 작게 구부렸다 다시 한 번 크게 구부리는 몸동
작으로 이루어진다.

 

 

작은 몸동작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도 따라줘야 된다. 등산을 하자거나 마라톤을 뛰자는 것은 아니다. 사람 몸은 따로 시간 내서 하는 이런 큰 운동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작은 몸동작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부지런하다는 것에는 이런 작은 몸동작을 쉴 새 없이 해대면서 그 작은 효과를 틀림없이 잡아내 몸에 얹어내는 섬세한 반응능력도 포함된다.

 

한옥은 구성 부재 수가 많은 건축물이다. 이런 부재들은 보기 좋으라고 둔 것이 아니다. 분명, 걸려서 넘어지는 일도 잦았을 테고 밥상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하려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불편을 몰랐을까. 아는데도 굳이 집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 몸 관절 마디의 섬세한 치수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한옥에서 오르내림과 꺾임은 관절마디를 많이 쓰게 만든다. 그러나 절대 연골이 닳을 정도로 과하지는 않다. 마당에서 대청에 오르는 수직이동은 대개 다섯 걸음 이내라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이다. 관절마디를 많이 쓰면 뇌에 적절한 자극을 준다. 사람의 뇌는 가끔씩 경험하는 웅변과 카타르시스의 큰 감동도 필요하지만 평생 이어지는 일상에서 느끼는 자잘한 자극도 필수적이다. 이것이 결여될 때 사람들은 다른 데서 그것을 찾게 되고 자칫 알코올, 도박, 담배, 게임, 인터넷, 섹스 같은 각종 중독증에 빠지게 된다.

 

마당에서 기단으로 오르고 다시 댓돌을 밟고 마루로 오른다. 기단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마루를 띄워 깐 것은 집을 지열과 습기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에서지만, 이렇게 하다 보니 사람의 관절마디를 많이 쓰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한옥에서는 이처럼 여러 목적과 기능이 종합적으로 일어난다. 기단과 댓돌의 높이도 다양하다. 어떤 집에서는 무릎을 크게 굽혀 한 걸음에 오르고 또 어떤 집에서는 잔 오름 두 번으로 나눈다. 한 집에서도 사랑채와 안채가 다르다.

 

 

다양한 몸동작을 유발하는 한옥 구조

문 크기도 마찬가지이다. 문 크기를 다양하게 한 것은 기후에 적절히 대응하고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며 풍경작용을 즐기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을 드나들 때마다 몸동작을 다양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다. 휴먼 스케일을 다양하게 구사했다는 뜻이다. 댓돌을 올라 대청으로 옮겨가고, 퇴에 걸터앉았다 문지방을 넘어 방을 드나들고, 몸을 움츠려 작은 문 큰 문을 넘나들다 보면 ’머리-어깨-무릎-팔-다리‘를 적절히 굽혔다 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은 일차적으로 스트레칭 효과와 혈액순환 등 물리적으로 건강을 돕는다. 더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다양한 몸동작에서 찾는 것이다. 낮은 문을 통과하면서 머리를 수그리는 동작 하나가 갖는 겸손의 미학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옥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교장 안채 주옥 퇴 세 장이 30센티미터 안팎의 차이를 가지며 겹쳐 있다. 이런 집에 살면 자신의 몸에 맞춰 공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한개마을 한수헌 누가 퇴보다 정강이 한 마디 정도 더 높다. 누와
퇴 사이의 위계 차이를 휴먼 스케일로 활용했다.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한국사회에도 대형공간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코엑스몰을 필두로 영등포의 타임 스퀘어와 동남권 유통단지의 가든 파이브 등 대형 상업공간이 속속 들어섰다. 구청 정도만 되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짓겠다고 부산하다. 높이 경쟁에 이어 면적 경쟁도 치열하다. 해운대 센텀시티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들어섰고 이 백화점의 광고 문구는 말 그대로 “세계 최대의 백화점”이다. 아파트도 40~50층은 되어야 “집 좀 지었네” 한다. 강남에서 한 블록을 걸어가려면 허허벌판 사막 한 가운데에 내던져진 느낌이다.

 

이런 대형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존재감을 잃고 소외감을 느낀다. 내 몸뚱이는 보잘것없는 미물로 느껴진다. 이런 대형공간 속에서는 대부분 돈을 써야만 사람대접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소비의 노예가 되어간다. 공간을 보면 휴먼 스케일은 사라지고 모두가 대형 구조뿐이다. 내 몸을 견주어 비교할 거리는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꼭지 정도일 뿐, 공간 전체가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세계에 온 것 같다. 나는 난장이일 뿐이다. 사람들은 큰 드럼통 속에 든 개미처럼 되어간다. 이런 대형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슬프게 느껴질 때, 한옥으로 가라. 그곳에는 자잘한 휴먼 스케일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