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마당/예향 산책

햇빛/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은빛강 2010. 8. 13. 06:03

한옥의 햇빛

의외로 따뜻한 한옥

한옥은 햇빛이 잘 드는 집이다. 한옥의 불편함을 얘기할 때 1순위가 겨울에 춥다는 것인데, 맞는 얘기이기는 하지만 오해도 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제일 많이 얘기되는 사항이 외풍과 창호지의 낮은 단열효과이다. 잘 지은 전통한옥은 의외로 외풍이 없다. 문이 두 겹인 경우가 보통인데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을 섞기 때문에 둘을 꽁꽁 닫으면 창틀 사이에 꺾임과 막힘이 일어나서 외풍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

 

심한 경우 문이 세 겹인 집도 있다. 천장 높이도 중요하다. 전통한옥은 천장이 낮아 외풍막이에 도움을 준다. 한옥의 외풍이 세다는 인식은 20세기 도시형 한옥으로 오면서 천장이 높아진 데에도 원인이 있다. 혹은 도시형 한옥 다음 단계인 그냥 개인주택의 기억을 한옥에 오버랩 시킨 측면도 많다.


창호지의 단열성도 생각보다는 좋다. 물론 콘크리트나 돌보다는 못하지만 요즘 쓰는 복사지나 노트 같은 일반종이보다는 훨씬 뛰어나다. 이것을 겹창이나 세 겹창으로 하면 그 효과는 더 올라간다. 문과 문 사이에 공기층이 만들어져서 단열효과를 돕는다. 요즘 아파트에서 베란다가 단열작용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을 약하게 적용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방 천장은 낮은데 그 위로 지붕과의 사이에 역시 큰 공기층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붕 쪽에서의 단열효과는 오히려 현대주택보다 더 뛰어나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복사열을 이용하는 난방을 더하면 한옥의 겨울나기는 걱정하는 것보다는 견딜만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현대인이 한옥의 겨울나기를 비판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를 하나 빠뜨리고 있다. 인내심이다. 물론 인내심이라 하면 일차적으로는 추위를 견디는 적응력이나 독한 마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전부가 아니다. 우리 조상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무식하지만은 않았다. 한옥의 겨울나기에서 인내심을 얘기할 때에는 반드시 햇빛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한옥의 인내심은 단순히 이 악물고 정신력 하나로 삭풍을 견뎌내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소모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햇빛을 이용하고 즐기는 적극적인 대처능력을 의미한다.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에 의탁해서 인간을 둘러싼 불리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인간살이를 이롭게 하려는 공격적 생존행위이다. 한옥이 친환경적이라거나 자연적이라고 얘기할 때 핵심을 차지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한규설 대감댁 대청 가득 몰려와 오후 내내 머물던 해가 물러가기 시작했다. 3월에 대청 볕이 이 정도로 짧아지면 저녁밥을 준비할 때다.

 

  

여름 햇빛은 막고 겨울 햇빛은 들이고

이것 역시 단순히 해님만 바라보는 일광욕 의미의 해바라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옥은 초보적인 과학지식을 활용해서 햇빛을 집안 깊숙이 끌어들여 즐기고 그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졌다. 그 비밀은 처마 길이에 있다.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북반구에서 해는 여름에 높이 뜨고 겨울에 낮게 뜬다.

  

 

용흥궁 사랑채 한겨울 한낮의 햇빛 각도이다. 처마 그림자는 상인방을 겨우 붙들지만 해는 방 안 깊숙이 든다.

 

 

이를 땅 위에 서 있는 집을 기준으로 바꿔 얘기하면, 여름에는 햇빛이 수직에 가깝게 내려 꽂히고 겨울에는 낮은 각도로 완만하게 비춘다. 이 두 각도 사이에 창을 내면 여름에 귀찮은 햇빛을 물리칠 수 있고 겨울에 고마운 햇빛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렇게 창을 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붕 처마를 두 각도 사이에 위치하게 돌출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여름 햇빛을 막아 튕겨내고 겨울 햇빛은 통과시켜 들어오게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창 자체의 위치와 방의 깊이이다. 겨울 햇빛이 처마를 통과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방 안에 들어오는 햇빛의 정도를 조절해야 되는데 이것을 해주는 것이 창의 위치와 방의 깊이다.

 

한옥의 방들은 대부분 깊이가 깊지 않아서 햇빛이 방 끝까지 기분 좋게 들어온다. 이는 온도와 소독 모두에서 유리하다. 대청도 마찬가지이다. 겨울, 햇빛은 아침 10시쯤 대청의 마당 쪽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기어들어오기 시작해서 오후 4시쯤이면 대청 안쪽 끝에 정확히 닿는다. 햇빛이 귀한 한 겨울에 햇빛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대청 속을 골고루 비추며 가득 머물다 돌아간다. 햇빛이라는 덧없는 자연요소를 오래 머물도록 붙잡아두는 지혜이다.

 

한옥에서 햇빛은 단순히 겨울에 추위를 덜 느끼게 해주는 물리적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감성과 감각, 마음과 심리, 경험과 정성(定性)으로 느껴야 하는 체험적 요소이다. 피부와 신경, 핏줄과 세포조직 깊숙이 받아들여 그 온기와 명암의 조형효과를 낱낱이 즐길 수 있을 때 한옥이 햇빛에 대해서 갖는 기본 태도와 한옥에서 햇빛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햇빛은 바람과 함께 한옥의 존재의미와 구성 원리를 결정짓는 첫 번째 자연 조건이다. 채 배치와 지붕의 형상, 향과 창의 위치, 누마루와 기단 등 한옥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유교왕조 시대 가부장적 문화를 구현하는 사회적 형식미를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햇빛과 바람을 집의 구성요소로 끌어들이기 위한 치밀한 디자인 전략이기도 하다.


 

용흥궁 사랑채 위의 사진에서 문을 열면 이렇게 된다. 볕이 절실한 한겨울에 해는 방 안 깊숙이 차고 넘친다.

 

 

방의 농담(濃淡)을 조절하는 햇빛

한옥에서 햇빛은 따뜻한 온기를 선사하는 것 이외에 방 안의 명암 농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한옥 공간은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도 매우 다양한 명암의 켜를 만들어낸다. 미술책에 보면 명암 10단계라는 것이 나오는데 한옥의 방은 이 10단계가 골고루 퍼져 살아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비밀은 세 가지이다. 첫째, 개구부의 크기, 형상, 위치 등이 자유로워서 이것을 이용해서 직접적으로 햇빛을 조절하는 기능이 뛰어나다. 창과 문을 구별하지 않아서 서양에는 없는 ‘창문’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무 곳에 필요한 만큼 뚫으면 창이 되고 문이 되며 창문이 된다.

 

둘째, 간접 반사광의 종류가 많다는 점이다. 한옥은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꺾임과 변화가 많은데 이런 구조는 여러 곳에서 햇빛을 간접 반사시켜 방 안으로 넣어준다. 수평적으로는 채 꺾임이 많고 수직적으로는 ‘기단-댓돌-마루-문지방’ 등의 변화가 심하다. 재료와 색깔도 다양한데. 이것은 반사율을 다양하게 만들어준다. 퇴나 대청은 짙은 색 나무이기 때문에 반사율이 낮은 반면 밝은 색 돌 재료인 기단과 댓돌은 반사율이 높다. 나무 문 하나가 칸 전체를 차지하면 벽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약해지는 반면 흰 회벽 옆에 있는 방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간접 반사광을 받는다.

 

 

운강 고택 안채 창호지에 해가 들면 방 안의 농담은 명암 10단계를 차고 넘쳐 먹물을 덧칠한 것 같다.

 

 

셋째, 창호지의 조절기능이다. 유리에는 없는 반투명이라는 중간 톤을 가지며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의 두 가지 형식을 겹치기 때문에 명암의 농도조절에 매우 유리하다. 이상이 합해지면서 한옥 공간은 활짝 밝게 만들 수도 있고 은근하고 포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겹창을 이루는 네 짝의 문을 열고 닫는 다양한 경우의 수에 따라 방 안의 명암 농도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명암 단계가 그만큼 촘촘해서 선택권의 폭이 넓다. 서양이 유화와 대별되는 수묵화의 농담이라는 기법이 공간에 적용된 것이다. 한옥 공간은 마치 먹물을 여러 겹 덧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유화나 서양의 공간에는 없는 참으로 절묘한 특징이다.

 

물론 한옥에서 햇빛 즐기기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시사철 구별 없이, 밤낮없이 살벌한 긴장감 속에서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지구의 운명을 지키기라도 하듯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앞에서 한 얘기는 너무 비현실적일 것이다. 기계를 최대한 돌려서 한겨울에도 오로지 일에만 열중할 수 있게 만들어줘도 부족할 판에 웬 햇빛타령이냐고 할 것이다. 한옥에서 햇빛 즐기기는 극한에 몰려 느림의 미학 같은 극단적 역설에 마지막 의탁을 하는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비현실적이고 후퇴적인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이나 직종에 상관없이, 오히려 큰일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느림의 미학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빡빡하고 빈틈없는 도시생활 속에서 짬짬이 겨울 햇빛을 즐길 수 있게 된 사람은 슬그머니 그 다음 단계의 햇빛 즐기기를 모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옥으로 가라. 한옥은 햇빛과 친해지는 법을 가르쳐주는 집이며 햇빛과 친하게 놀 수 있어야 잘 살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jyimi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