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방/오늘의 생각

북한은 지금

은빛강 2011. 4. 20. 09:21

 

北 수용소서 28년 김혜숙씨 “마을 전체 전기 철조망…뚫린 곳은 하늘뿐”

서울신문 | 입력 2011.04.20 05:03 |

[서울신문]"'자유'라는 말은 남한에서 처음 들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인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 제18호 관리소에서 28년간 수용생활을 했던 김혜숙(49·가명)씨는 "행동과 생각까지 어느 하나 자유가 없었던 북한의 실상을 토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는 겉보기에 평범한 마을같지만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뚫린 곳이라고는 하늘뿐이었다. 그는 "보위부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배고픔과 주민 간의 불신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인정한 최장기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인 김씨가 1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침해 신고센터를 찾아 북한 당국과 통일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등을 상대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침해 실상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개인 자격으로 신고센터에 진정을 제기한 것은 김씨가 처음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관리소 들어가서 처음 본 게 공개총살

→ 정치범 수용소는 어떤 곳인가.

-내가 있던 곳은 평안남도 북창군에 있는 '봉창리 제18호 관리소'였다. 평양에서 180리쯤 들어간 산골이다. 정치범 수용소라는 이름은 남한에 와서 알았다. 북한에서는 수용소를 14호 관리소, 18호 관리소 이런 식으로 부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주민이라고 한다. 18호 관리소에만 2만명 정도의 주민들이 있었다. 그 중에 보위부 사람, 병사들, 관리원, 당 사람들 빼고 나면 1만 7000여명 정도가 이주민이었다.

→수용소 하면 감옥이 연상되는데 실제로 그런가.

-관리소는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8호 관리소는 끝에서 끝까지 100리 정도 된다. 마을 주변을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서 뚫린 곳은 하늘뿐이다.

→13살 때부터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1975년 우리 5남매와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까지 전부 수용소에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월남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안 돌아오길래 집 나간 줄만 알았지 남조선으로 갔다는 건 알지 못했다.

→28년 만에 수용소를 나오게 된 것은 어떤 계기 때문인가.

-13살 때 관리소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부모님도 다 죽고 없으니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김씨의 아버지는 관리소로 온 직후 보위부에 끌려 갔고, 어머니는 농장일을 하다 1979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0년 넘게 토끼, 닭, 돼지를 길러서 당 일꾼들에게 바치고 '모범일꾼' 평가를 받아 2002년 2월 16일 해제받았다.

→수용소에 처음 가서 받은 인상은.

-거기서 처음 본 게 공개 총살이었다. 사람 매달아 놓고 총으로 쏴 죽인 뒤 시체를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실어 갔다. 개 죽은 걸 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가슴이 계속 할랑대고 공포감에 질려 견디기가 어려웠다.

→수용소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은.

-굶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알았다. 배급이란 게 강냉이만 주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일곱 식구가 한달에 7.5~8㎏을 받았으니…. 강냉이도 다 젖은 걸 줘 놔서 말려놓으면 절반으로 줄곤 했다. 그러니 아이들은 파랗다는 건 모두 뜯어먹고, 한달에 딱 하루 쉬는 날에는 온 가족이 입산증을 받아 산에 가서 도토리나무 잎을 뜯어다 먹곤 했다.

●배고픔보다 무서운 건 주민끼리 감시

→열악한 상황에서 도망칠 생각은 못했는가.

-관리소 주위 철조망에는 전기가 흐르는데 멀리서도 '징~' 하고 전기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전원들이 순회하면서 철조망 주위에서 발자국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바로 색출해서 총살한다. 28년을 살면서 도주하는 사람은 못 봤다.

→배고픔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었나.

-주민들끼리 서로 경계하는 것이다. 3세대를 한 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했는데, 서로 말하는 걸 듣고 쪽지에 적어서 한달에 한번씩 담당 지도원 방에 넣어 줘야 했다. '어떤 동무가 몇날 며칠에 무슨 말을 했다.'고 아주 자세하게 적어야 한다. 그저 입을 꼭 다물고 생활해야 했다.

→노동생활은 어땠는가.

-학교 졸업하면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무조건 탄광일을 해야 했다. 남자들은 돌 깨고, 여자들은 석탄 캐고…, 마흔 살만 넘으면 진폐증으로 쓰러져들 나갔다. 나도 열 일곱살 때부터 탄광에서 일했는데, 얼굴 한번 제대로 씻어본 적이 없었다. 하루 8시간 노동제인데, 말이 8시간이지 막장에서 나와 또 산에 가서 나무 해다가 막장에 들여놓고 하다 보면 16시간이 훌쩍 갔다.

→그래도 수용소 안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뒀는데….

-결혼이라고 자유는 아니다. 남자는 30살, 여자는 28살이 되어야 결혼할 수 있고, 그것도 일을 잘해야지만 승인을 해줬다. 초급당, 보위부, 관리과장, 행정부서장 이렇게 단계를 거쳐서 승인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고, '누구누구는 일 잘했으니 결혼 승인해준다.' 이런 식으로 공표한다(김씨의 남편은 2001년 4월 탄광에서 얼어 죽었고, 2명의 자녀는 수용소를 나온 뒤 2003년 수해 때 사망했다).

→인권과 자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근 30년 동안 '불복종하면 죽인다.'는 말만 듣고 살다가 자유란 말을 남한에 와서 처음 들었다. 자유란 내가 제주도 가고 싶으면 가고, 강릉 가고 싶으면 가는 것 아니겠는가.
글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60년대 북한 떠난 유학생, 아직도 망명 중(시사기획KBS10)

뉴스엔 | 뉴스엔 | 입력 2011.04.19 18:13 | [뉴스엔 박정현 기자]

60년대 북한을 떠나 해외로 망명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4월 19일 오후 10시 방송되는 KBS 1TV '시사기획 KBS10- 평양-소피아-서울, 그들은 아직도 망명 중'에서 60년대 북한을 떠나 해외에 망명했던 당시 유학생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근 국가기록원은 불가리아 국립문서보존소에서 북한과 관련한 기록물을 최초로 수집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는 1960년대 공산권 형제국이었던 북한과 불가리아의 외교관계가 만 6년 동안 단절됐던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북한에서 유학 간 대학생 4명이 벌인 망명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한 이 사건은 불가리아 뿐 아니라 소련이 이들의 망명을 지원할 만큼 공산권에 파장이 컸다.

동서 냉전의 산물인 분단과 공산주의 노선의 변화, 고착화된 북의 1인 독재체제가 유학생들이 망명을 선택하게 된 시대적, 이념적 배경이다.

북한-불가리아-남한. 그 어디에 명확히 속해있지 않은 경계인으로 살아온 이들의 삶은 분단된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자화상이며, 지금도 한반도 안팎과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역사다. 이들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1956년 9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의 소피아대학.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살 이상종, 이장직, 최동준은 조국의 훌륭한 산업 역군이 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불가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 보다 1년 먼저 유학 온 최동성은 완벽해 보였던 스탈린 체제가 무너지고 기존 공산주의 이념에 오류가 있었다는 후르시초프의 선언에 충격을 받고 공산주의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유학생들은 독재로 치닫는 김일성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1962년 동구권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김일성은 유학생들을 북으로 속속 소환했다. 그러나 이들 4명은 북한의 독재체제를 비난하는 내용의 망명선언서를 북한과 공산권 국가들에 돌리고 귀국을 거부했다.

김일성의 생포 명령이 떨어지자 북한 대사관은 시내에서 이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체포하고 한 달 이상 감금했다. 구사일생으로 불가리아와 소련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 일로 북한과 불가리아의 외교관계가 전면 중단됐다. 이후 이들은 끈질긴 북한의 감시를 피해 지방 도시 스타라자고라에서 30년 동안 은둔의 삶을 보냈다.

1989년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불가리아가 한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이들의 인생도 180도 바뀌게 됐다. 한국과 불가리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한국을 오가면서 통일 전도사가 됐다. 백발의 노인이 된 이들의 소원은 이념을 넘어 죽기 전에 통일된 한반도에서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뿐이다. 
박정현 pch46@newsen.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en@newsen.com
 

北의 김만덕으로 불리던 주민의 숨은 영웅 '이종화'…다시는 못본다

중앙일보 | 김진희 | 입력 2011.04.18 11:18 | 수정 2011.04.18 15:29 |

[중앙일보 김진희] 기부는 감동 화두이다. 그러나 북한에선 이 같은 선의를 베풀다간 자칫 '공공의 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공개 총살되는 경우도 있다.

17일 북한전문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북한에선 '자선이 죽음으로 돌아온다'는 희한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북한에서 자선은 식량난으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자취를 감췄다.

공개 처형되는 북한 주민의 모습 [사진=차오시안]

99년 양강도에서 있었던 '이종화 공개처형'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국경 지역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밀수도 성행했다. 이렇게 되자 당국은 양강도 등 국경 지역에 비사회주의 검열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당시 농사를 짓던 이종화씨는 굶주림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꽃제비'로 전전하던 이를 안타

깝게 여기고 집으로 데려와 농사를 함께 지었다. 이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제주의 거상으로 백성을 살리는데 모든 재산을 쓴 김만덕에 비견됐다.

그러나 당국은 이씨에게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현대판 지주'로 집에 머슴을 두었다"는 죄명을 씌워 공개 처형했다. 이씨를 시샘한 한 주민이 고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씨가 데려온 이는 먼 친척이었고 많다는 재산도 사실 그의 부지런함에 따른 대가였다. 남 보다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해 굶주리는 주민들과 수확물을 나눴다. 명절이면 마을사람들에게 과일을 선물하고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당시 이씨의 공개총살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했다. 이 사건 이후 김정일 체제에 대한 공포도 확산됐다. "남에게 베풀고 싶어도 처벌이 두려워 옆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현실"이라는 한탄 도 나오고 있다.   김진희 기자

 ▶김진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winny78/

+그리스도의 심장은 그늘진 북한 동포를 측은히 여기시겠지요.

기막힌 인간의 상실성에 밀떡에서 심장의 살조각으로 현시하신 주님!

그들이 직시하고 있는 공포에서

그들이 잠자리에서도 불안 해 하는

그곳에 당신은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의 희생과 기도를 오직 기다리시면서......,

동구권 공산국이 모두 자유를 찾았으나 아직 자유라는 단어의 모습을 찾지 못한

그들과 함께하시고 윤리와 도덕을 상실한 저들을 가엾이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