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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史 밝히려던 재일교포3세의 복직 투쟁>

은빛강 2011. 11. 12. 01:03

 

<일제강점史 밝히려던 재일교포3세의 복직 투쟁>
연합뉴스|한미희 [입력 2011.11.04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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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 해고 조사관 김무성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하다 해고된 김무성(36)씨는 재일교포 3세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쓰고 자랐지만 스스로 한국인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핏줄'에 관심이 끌려 대학을 마친 200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김씨는 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대학원 공부를 마친 뒤에도 "단순히 사기업에 들어가 월급 받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고민을 하던 중 2005년 진상규명위에 지원해 조사관으로 4년 4개월 동안 일했다.

그는 "일본에 강제 동원됐던 분들을 담당하면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뒷세대에게 우리의 경험을 전해주는 일은 중요하다"고도 했다.

해마다 같은 조건으로 근로 계약을 갱신해 왔는데 2009년 말 갑자기 조사관의 등급을 낮춰 계약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예산이 줄었다는 이유였다. 일부 조사관은 항의의 뜻으로 퇴사했지만 그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계속 일했다.

위원회의 활동 기간은 2010년 3월25일까지였다. 활동 종료 불과 3일 전인 22일 '일제위원회의 조사관은 3월24일까지 근무하라'는 통보를 이메일로 받았다.

이날은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위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태평양위원회)를 통합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위원회)가 발족한 날이다.

태평양위원회의 전문계약직과 조사관 16명은 전원이 대일위원회로 고용 승계가 됐지만 김씨를 포함한 일제위원회의 전문계약직과 조사관 62명은 전원 해고됐다.

김씨는 그날 오후 11시까지 업무를 마무리하고 다른 조사관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는 "당시 접수된 22만 건의 피해 중 절반밖에 처리가 안 됐고 대일위원회는 기존의 두 기관이 통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용 승계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처음 진상규명위에 들어갔을 때 한 공무원이 일본에서 태어나 병역의무가 없는 그에게 "내일 당장 군대에 가든지 관두든지 하라"고 했을 때 그는 '한국에서 살 수 없구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병무청 담당 직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직접 확인해 보시라'고 해서 마무리되긴 했지만 큰 상처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해고로 다시 한번 큰 충격과 실망을 느낀 그는 잠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국가기관에서 일하게 됐다며 좋아하시던 부모님께는 해고당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고 부모님도 돌아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5개월 정도 일본에 머물며 고민한 끝에 '부당함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고 올해 초부터 소송을 준비했다. 다른 조사관 3명을 설득해 지난 4월 함께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결국 승소했다.

그는 "한국에 살면서 내 경험과 능력을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다"며 "일본보다는 한국 사회를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eoyyi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