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① -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소단적치인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① -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소단적치인
글쓰기는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상처도 숱하고 영광도 가끔 있었다. 그래도, 요즘처럼 내 글쓰기가 신나던(脚光?) 적은 내 생애에 다시없었다. 페이스북에서의 일이다. ‘당신은 천생 글쟁이다’, ‘매일 당신 글이 기다려진다’, ‘당신 글 읽는 재미로 산다’, ‘당신 글에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는 댓글이 난무(?)한다. 그야말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찬사다. 부담스러워서 자판 앞에 앉기가 두려울 때도 있다. 그래도 꾸역꾸역 앉는다. 그래야 프로니까. 그런 찬사는 나를 글쓰기의 프로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오랜만에 프로 독자를 만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프로만이 프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ㅋㅋ). 물론 과장도 아부도 아니다. 어쨌든 페이스북에 글 올리는 재미로 요즘은 산다. 그 재미가 ‘아주 그냥 죽여줘요’ 수준이다.
글쓰기가 숙명으로 찾아온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교내 백일장에 아무 생각없이 써낸 이란 글이 가작으로 뽑혔다. 필통 안에서 일어나는, 연필과 지우개와 칼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동화다. 그 덕에 『수정(水晶)』이라는 이름의 전통 있는 교지(100년)에 작품이 실렸다. 글쓰기로 맛본 최초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시, 호사다마(好事多魔), 평생 잊지 못할 가시밭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가 내게 안긴 최초의 상처다. 글짓기 대표선수로 뽑혀 매일같이 황금 같은 방과후를 호랑이 선생님 앞에서 글짓기 연습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그냥 죽여줘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매일 다른 이야기를 써내야 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프로가 된 지금도 힘든 일인데,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어린아이가 어떻게 매일같이 다른 이야기를 써낸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어쨌든 피 말리는 고역을 몇 달 무사히 치러내고 드디어 출전 길에 나섰다. 시내의 대학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였다. 한 학년에서 한 명씩 뽑혀나갔는데 형도 함께 출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원래 산문부였는데 출전 당일날 운문부로 전격적으로 이적(移籍)되고 만 것이다. 선생님 말씀인즉슨 날이 갈수록 내 글이 짧아지는 게 필시 운문 적성인 것 같다는 거였다. 아마 운문 산문 짝을 맞추다 보니 최저학년이었던 내가 그렇게 밀린 것 같았다. 어머니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선생님이 칠판에다 시제를 게시했다. 고구마, 달밤, 전봇대... 그런 거였지 싶다. 어느 것 하나를 골라 시를 쓰라는 거였다. 갑자기 막막했다. 늘 자유과제로 쓰고 싶은 글만 쓰다가 갑자기 지정과제로, 그것도 운문으로 쓰려니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제로 나온 단어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얼른 한 편 써내곤 교실을 나와버렸다. 교실 밖 모과나무 옆에서 서성이던 어머니가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
결과는 당연히 참담했다. 형은 그나마 3등을 해서 대학 마크가 새겨진 동뺏지와 함께 듬뿍 부상(副賞)까지 받았다. 나는 그냥 영광에 들뜬 형의 그림자만 밟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그냥 내 머리만 한 번 쓰다듬고 말았다. 그때 받은 상처도 컸지 싶다. 얼마 전, 어머니가 의지삼고 서성이던 그 모과나무에서 잘 익은 모과 열매 두 개를 따왔다. 거실 장식장 위에 올려놓고 오며가며 냄새도 맡고 한 번씩 쓰다듬기도 한다. 크기도 크고 잘 생기기도 했다. 생기기도 잘 했지만, 고는 속도도 아주 더디다(방안 공기가 너무 차가운가?). 나는 매년 그 모과를 탐낸다. 누구도 그걸 막거나 흠잡지 않는다. 지금 내 연구실이 바로 그때 그 교실 자리기 때문이다. 층수만 4층으로 올라왔을 뿐이다. 이번에도 관리인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큰놈으로 두 개 골랐다. 모과나무는 여전히 그 모과나무다. 그 앞을 지나, 나는 매일같이 그때 그 교실 문앞을 들락거린다. 그래서 가끔씩 어머니 목소리도 거기서 듣는다.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
프로는 프로가 알아본다(?). 연암(燕巖)의 글쓰기론을 읽다보면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 안에서 절정 고수의 면면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그저 그랬다. 그때는 내 목소리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 크게 달라졌다. 그의 말이 ‘최종 병기 활’마냥 그냥 날아와서 나를 관통(貫通)한다. 연암의 문체는 특별하고 중독성이 있다. 그의 글쓰기론에서도 여지없이 그런 개성이 드러난다. 무작정 고문(古文)을 따르지 않고 때를 알아 자유분방을 취한다. 한문에는 까막눈인 주제에 그 실상을 자세히 파헤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대표적인 몇 문장만 봐도 그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아마 자기만의 신의(新意)를 중히 여겨 용사(用事)의 편의를 가급적 사양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지 싶다. 그의 글쓰기론인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의 일부를 살펴보자.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제승지권(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재인용])
글쓰기를 전투에 비유하는 이 글이야말로 글쓰기의 금과옥조(金科玉條), 동방불패의 규화보전(葵花寶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연 독보, 독창적인 문장론이다. 「소단적치인」이란 제목도 흥미롭다. ‘소단’은 문단이란 의미고, ‘적치’는 붉은 깃발이란 뜻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문단의 붉은 깃발을 논함’ 정도가 된다. 글쓰기 전문가들에게 고하는 말이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고미숙, 위의 책 참조)
‘글쓰기 병법’이라고 할 만한 연암의 문장론에는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차례로 위의 글을 시쳇말로 한 번 옮겨보자.
* 글자는 병사, 뜻은 장수 : 뜻을 살릴 수 있는 단어와 구절. 그것의 운용. 장수는 병사를 잘 알아야 하고 병사는 장수를 잘 따라야 한다.
* 제목은 적국, 전장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 : 제목은 주제이니 그것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글쓰기의 최종 목표다. 전장 고사가 진지라는 것은 제목(주제)에 눌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진지 안에 들어가(확실한 논거를 찾아) 그것에 대적해야 한다.
* 운과 사(詞)의 유격병 역할 : 정규군(主旨)을 돕는 유격병(韻律)을 잘 활용해야 한다. 모든 글은 소리내어 읽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묵독도 예외는 아니다. 두운, 압운, 음보, 속도감 있는 문장 연결 같은 것에 유념해야 한다.
* 억양 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 : 프로는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적군을 죽이듯이 표현의 최대치를 찾는다. 과장도 필요할 때가 있고 반복도 중요할 때가 있다. 마지막 한 줄로 전체 문장을 뒤집는 일도 허다하다.
*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 :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는 편견과 고정관념, 불신의 장벽을 넘어 독자의 승복을 받아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 과정이 독자가 모르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는 형편을 설명.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 : 함축은 ‘의미가 노는 곳’이기에, 함축을 활용하는 것은 전쟁을 치를 때 늙은 병사를 놓아주는 이치와 같다. 독자의 능동적인 의미 구성을 독려한다. 사족(蛇足)인 듯하지만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글의 품격을 높인다.
*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 : 코드와 맥락의 운용에 시의(時宜)를 따르고 적절(適切)을 기하는, 이른바 ‘통째로 눈치껏’ 익힌 문식력이 요구된다.
*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 맥락이 우선이다. 코드는 맥락에 종속된다. 오늘의 법과 때가 내일의 오해와 편견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물론 일천한 견문 탓이겠지만, 연암의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을 이만큼이라도 자세하게 부연(敷衍)한 글을 여태 잘 보지 못했다. 본인의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과 같은 글쓰기론은, 특히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다. 글이란 것은 간혹, 그 비슷한 경우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한 입장이나 환경에 따라 전달되는 메시지의 맥락적 이해가 서로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의 경우도 글쓰기가 어느 정도 숙련 상태에 들어야 그 속의 가르침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는 젊어서 언젠가 연암의 문학활동을 다루고 있는 한 논문에서 얼핏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하고 그냥 넘어갔다. 새 시대에는 새 글쓰기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을 살아도 그런 건 없었다. 우왕좌왕, 되는 대로 글을 써왔다. 세월이 가고, 머리가 온통 백발이 되어 다시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을 보았다. 앞에서 인용한 고미숙 박사의 책에서다. 다시 보니 내가 금과옥조로 삼는 것들이 그 안에 다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 그 안에서 나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것도 아마, “조근놈, 아직 교실 못찾았니?”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을 맴도는 탓이지 싶다.
*조근놈 : 제주도 방언. 작은 놈. 흔히 막내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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