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③

은빛강 2012. 3. 10. 15:29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③ - 넘치는 것들, 정신분석과 기호학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9일 금요일 오후 12:20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③ - 넘치는 것들, 정신분석과 기호학

우리는 흔히 어린이, 혹은 동심을 순진무구한 그 어떤 상태로 상정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보는 인간의 서술적 정체성은 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멜라니 클라인은 아동이나 성인을, 모친의 가슴에 매달려 있었을 때의 노여움에 찬 유아적 정신병에서 회복 단계에 접어들어 있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클라인의 이야기는 편집증과 우울증을 오락가락하는 보편적이고도 병리적인 유아적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다. 클라인에게는 인간의 생애가 광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이 광기는 타인의 광기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비록 운 좋은 처지에 놓이거나 정신분석 치료를 받아 도움을 받는 수도 있기는 하나 인간은 그 후로도 다소간 미쳐서 살아간다. 흔히 쓰는 말 속에 나타난 어느 부분들, 예를 들어 마녀, 독살스런 태도, 애타게 하거나 골 빠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은유들, 혹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의 일반적 인정, 이 모두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유아기의 처벌, 강박관념, 유린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강조하는 이론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로이 샤퍼, 「정신분석학적 대화에서의 서술」, (『현대서술이론의 흐름』) 중에서]

우리의 삶이 이미 그 출발선 상에서 ‘미쳐 있다’는 가정은 여러 가지로 유용한 관점을 선사한다. 다른 것보다도, 우리가 ‘책 읽기’를 강조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서서히 치유된다고 강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기에 놓여 있는 어린 주체들에게 ‘자기 이야기의 발굴’을 직접적으로 독려하는 것으로서의 ‘남의 이야기’들은 그 치료 효과 면에서 특별한 효능을 발휘한다고 설득할 수 있다. 그래서 동화도 좋고, 위인전도 좋고, 소설도 좋고, 일기도 좋은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플롯이 나의 플롯 만들기를 도와서 내 플롯을 완성시킨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인츠 코후트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동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자아(cohesive self)를 실현하기 위해 거의 본능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동들이 겪는 ‘분열의 산물’(과대망상적이고 자기위안적인 환상, 방어적인 분열과 억압, 우울증과 같은 병리적 증세)들은 분열된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치유하고 성장을 계속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은 조금 과하다. 이를테면 그의 이론은 ‘넘치는 것들’에 속한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문학이 정신병적 기록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문학이 오히려 정신분석의 무의식이라는 건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무엇이든 한 쪽만을 본다는 것은 병적이다. 인간의 병적인 모습만 보는 것도 병적이다. 정신분석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호학적인 분류 작업도 가끔씩 황당한 결론을 내기도 한다. 학문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 중심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수준 낮은 아동문학이나 대중문학(주변문학)은, 수준 높은 성인문학이나 본격문학과 비교될 것이 아니라, 음악과 한 가지로 (특히 고전음악) 반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규범성을 존중하는, 별개의 ‘독자 예술’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규범적 예술양식, 비규범적 예술양식)도 그렇다. 좀 넘친다는 느낌이다. 아동문학이든 성인문학이든 모두 다 문학의 한 갈래인데 문자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어느 것 하나 같이 취급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무래도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근대 소설을 노벨이라 하고 그 이전 것을 로만스(로망)라고 해서 애초부터 전혀 다른 핏줄로 취급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선사한다. 고전소설이든 근대소설이든 다 같은 소설로 취급하는 우리로서는 그런 주장이 자기네들 역사를 세계사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소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생뚱맞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기호학적 주장을 차용하고 있는, 이른바 ‘동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 사실이 ‘사실’이라면, 어릴 때 동화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큰 결핍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이다. ‘어릴 때’ 아니면 읽기 힘든 책들이라 나이 들어 그것을 보충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동화책을 읽으며 내부적으로 ‘정보가 환기되는’ 경험을 겪어보지 못한 자들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큰 결핍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체 발광’의 창발적 경험을 소지하지 못한, 일종의 불구 상태를 어릴 때 형성한다는 것과 진배없는 주장이다. 백보를 양보해도, 그 부분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아동문학을 별개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매김 하려다 보니 필요 이상의 이론을 갖다 쓴 것 같다. 적지 않게 오버한 느낌이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문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아동문학은, 우리가 대학 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공부를 하듯(인문계 고교는 전적으로 예비학교다), 성인이 되었을 때 보다 더 깊이 있는 문학 체험을 하기 위해서 거치는, 인지 발달 단계에 맞게 조절된, 일종의 예비 코스 과목일 뿐이다. 초기 문식력 배양에 유용한 텍스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삼국지』나 『데미안』에 맛을 들인 아이가 우정, 오직 규범적 텍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전래동화집을 다시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한 가지 유념할 점을 찾는다면, 아동기 서술적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심리학적 효용은 다분히 인정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정의와 배려의 문제, 희생과 헌신의 문제, 금기와 사회화의 문제와 같은 아동기 서술적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들은 전래 동화와 같은 아동문학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정보의 내부 환기’는 지각과 상상, 혹은 코울릿지의 설명 방식대로 1차적 상상력과 2차적 상상력의 작용으로 치환해서 설명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창발적 문식력(emergent literacy)의 차원에서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관습적(제도적) 문식력을 배양하는 학교 교육보다 가정에서 ‘통째로 눈치껏’ 학습해서 얻는 창발적 문식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학계의 관심이 날로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추세다. 창발적 문식력은 태어나서 1년 안팎에서부터 시작해서 6~7세, 그리고 10~12세 무렵에 집중적으로 그 존재가 관찰된다는 보고도 있다. 말을 배울 때, 유치원 다닐 때,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전 후 무렵에(4학년 때 결판난다!) 인간의 문식력이 폭발적으로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식력은 그야말로 ‘글공부’의 소산이므로 나이에 관계없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27세에 비로소 처음 소설을 써서 문단에 첫발을 디딘 나로서는 그때가 바로 ‘폭발’을 경험한 때였다. 그때 나는 ‘안전(眼前)에 신천지가 전개된다’는 말을 전율 속에서 실감했다. 아마 박완서 선생님은 『나목』을 발표하신 사십세 무렵에 그러하셨을 것이다. 그런 경지는 개인마다 다르게 찾아온다. 일기일경(一機一境)일 뿐이다.

‘규범적 텍스트에서 구조는 정보의 본질이다. 구조는 수신자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를 구성하도록 도와준다.’는 말은 결국 그것이, 관습적인 것이든 창발적인 것이든, 주체의 문식력을 강화시키는 어떤 정해진 형식의 역할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장르의 내적 형식이 지닌 힘이든 아니면 칼 융이 말하고 노스럽 프라이가 살을 붙인 과 같은 것이든, ‘구조’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창발적인 어떤 인식틀의 존재를 고려해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 넘치게 갖다 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