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⑤

은빛강 2012. 3. 10. 15:32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⑤ - 욕망의 허구성, 삼각형의 욕망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9일 금요일 오후 10:32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⑤ - 욕망의 허구성, 삼각형의 욕망

대학 초년생 때 일이다. 한 여학생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것도 인연인가 싶었다(지금 생각하니 그 여학생 쪽으로 내가 자주, 모종의 연심(戀心)을 품고, 발걸음을 옮겼던 것 같다). 긴급조치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게 떨어져서 학생회가 해산되고 학도호국단이란 게 생겼다. 학생회장 하는 재미로 학교를 다니던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날마다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실에서 친구들과 마이티나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공부는 해서 뭐하나,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노릇이지만 그때는 아주 당연하게, 어떤 백수 의식 같은 것이 우리를 감싸고 돌았던 것 같다. 아마 그 여학생에게 더 관심이 갔던 것도 그런 환경 탓이었지 싶다. 그 여학생도 동병상련이었던지, 이심전심, 몇 번 만나서, 같이 걷기도 하고, 차도 같이 마시고 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워낙 책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다 재미있었다. 조근조근 나르시서스 이야기를 할 때는 그녀가 마치 한 떨기 수선화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 중에 한 명이 또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 그래서 삼각관계가 되고 말았다(인정하기 싫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침 공부도 좀 해야 될 것 같기도 했고, 형편도 여의치 않아서 자의반 타의반 순순히 물러났다. 나보다는 그 친구가 훨씬 인물도 좋고 집안 형편도 나았다. 친구 간에 싸워봐야 좋을 것도 없었지만, 성질을 뻗쳐봤자 승부가 뻔했다. 자진해서 입산(入山)했다. 그런데, 두어 달만에 하산(下山), 학교를 나갔더니 그 둘은 이미 깨어진 뒤였다. 왜 헤어졌느냐고 물었다. 멋쩍은 표정의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니가 사라지고 나니까 급격히 그 여학생에 대한 애착(집착?)이 떨어지더라’는 거였다. 심지어는, 그 여학생의 이목구비 중 어느 특정 부분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이 영 참기가 힘들어지더라는 말까지 했다(감히?). 이 빌어먹을 놈이! 주먹으로 한 대 갈겨주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았다. 참 싸가지 없는 친구다. 그 친구에게서 얼마 전 장로 임직식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교회 안에서는 그 옛날처럼 남의 밥그릇에 재뿌리는 일은 하지 않기를 빈다. 이 글을 읽으면 속으로 좀 뜨끔할 거다. 그러라고 쓰는 거다. 그렇게 저지레를 해 놓고 여태 묵은 빚 갚을 생각 같은 건 도대체 안 한다. 밥 한 번 그럴듯하게 사는 법이 없다. 그래가지고야 장로까지 된들 무슨 효험이 있겠나 싶다. 얼마 전에 천당과 지옥 간에 큰 송사가 한 번 있었다. 아마 땅 문제였던 것 같다. 카톨릭에 있는 연옥을 개신교에서 없애면서 그 땅의 소유권을 두고 천당과 지옥이 건곤일척(乾坤一擲), 크게 한 판 붙었다. 모두 그 귀추를 주목했는데, 예상과 달리 결과가 너무 싱겁게 나고 말았다. 깨끗하게 지옥이 이겼다. 그쪽에 유능한 변호사들이, 전관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란다. 아쉽게도 그들 변호사들의 장로 임직 비율은 아직 통계로 잡히지 않고 있다. 물론 이건 그 친구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다른 장로님들과는 일절 관계가 없는 농담이다. 양해 바란다.

박사 과정을 다니며 입시 학원 강사를 할 때다. 나는 주요 과목 강사라 명색이 ‘전임강사’였지만(‘전임’은 교육청에 채용보고를 하게 되어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변두리 과목 강사들은 그냥 ‘강사’였다. 그 강사들 중에 대학 동기생이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도 역시 박사 과정생이었다. 하루는 마침 같이 시간이 비어서 휴게실에서 담배도 한 대 피우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친구가 대학 초년생 때의 그 여학생과 같은 과라는 것이 생각났다. 왜 그때 그 여학생 생각이 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차였다. 갑자기 그 여학생의 후일담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시집은 갔는지, 직장 생활은 어디서 하는지, 그 후의 연애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과 학생들이 여남은 명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자기들끼리는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가만히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그 친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잖아.”

그러면서, 아이가 어려서 지금은 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이만 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양형 소설평이 신문에 났다고 좋아하던데?”

그렇게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진작 말하지 않고, 그렇게 타이밍을 맞춰서 한 방 먹였다. 아연실색(啞然失色),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 소설평 좀 오려서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날 그 친구가 그걸 가져왔다. 이선영 선생이 동아일보에 졸작 평을 한 내용이었다. 지금도 그 쪽지(?)는 일급 서류함에 보존하고 있다. 고맙다(그립다?) 친구야, 아마 그런 심사도 함께 보관되어 있지 싶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한 편 선물했으니(나만 재미있나?), 공부도 좀 해야 할 시간이다. 역시, 권택영 교수의 저서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소개된 내용을 참조해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자(좋은 차나 좋은 책은 두어 번 우려내야 한다). 우리들 모두는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시선’ 없는 삶은 그저 여백의 삶이다. 중심에는 항상 ‘시선’이 존재한다. 이념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대중의 시선을 필요로 하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은 친근한 이웃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피할 수 없는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킨 남자는 오직 한 여자의 시선을 필요로 하며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스스로를 던진 남자는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그녀의 시선을 지고 다닌다. 종교에 몸을 바친 사람은 신의 시선을, 위대한 기법의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은 카프카를, 조이스를 지고 다닌다.

이처럼 우리의 의식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침투되고 얼룩이 져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고유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늘 아마디스의 시선을 느낀다. 그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기사의 용기와 사랑은 모두 아마디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가 하는 행동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아마디스가 골라준 것이다. 그가 욕망하는 어떤 대상은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아마디스가 욕망한 것이다. 겉보기엔 대상을 향한 스스로의 욕망인 듯싶지만 욕망의 겉자락을 들추고 보니 아마디스라는 매개자가 있다. 대상(혹은 삶의 목표)은 모험이 벌어질 때마다 바뀌지만 매개자, 아마디스의 시선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모험은 계속되고 욕망은 늘 그대로 남아있다.

주체는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사이에 매개자가 있다.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이 매개자의 욕망이다. 그는 매개자의 욕망을 모방한다. 그러기에 대상은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는 충족되는 순간 저만큼 물러나고 저만큼 물러나기에 우리는 가고 또 간다. 이것이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구조, 모방적 욕망, 대상의 허구성, 욕망의 허구성 metaphysical desire이다.

플로베르의 ‘보봐리즘’은 스탕달에게 ‘허영’이고 프루스트에게는 ‘속물주의’이다. 그들 소설의 주인공들이 욕망한 실체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들은 그것을 매개하고 있는 자들의 욕망을 모방한다.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의 소설에서는 욕망의 삼각구조가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신을 믿는 종교인이 스스로의 목표를 드러내듯 돈키호테는 이상적인 기사의 욕망을 모방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 그 점은 엠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체와 매개자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적과 흑』에서는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감추려든다. 매개자의 위치는 자기와 비슷하여 흠모와 동시에 증오를 유발한다. 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놓고 경쟁을 한다는 뜻이므로, 결국 욕망을 감추는 자가 승리하게 된다. 욕망을 선언하는 경우를 외적매개 external mediation라 하고 욕망을 감추는 경우를 내적매개 internal mediation라 한다.

플로베르의 보봐리즘, 스탕달의 허영, 프루스트의 속물주의는 모두 매개된 욕망 즉 모방욕망이다. 이 모방적인 욕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한층 더 내적이 되어 라이벌의 관계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이 된다. 주체는 그 고통 속에서 살인이나 자살의 충동에 이른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한 여자를 놓고 라이벌이 된다. 전형적인 외디푸스적 구도다. 이런 나이브한 욕망의 대결장에서는 아예 대상의 의미가 없어진다.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는 그토록 가까워져 거의 닮은꼴에 이르므로 흠모와 질투, 사랑과 증오, 선망과 질시가 동시에 일어난다. 고통은 심해져서 폭력으로 분출되고 살인과 자살의 충동이 날뛰게 된다. 대상의 존재가 이미 사라지고 매개자와 주체간의 갈등만 부각된다. 삼각구조는 하나의 점 같이 되어버린다.

르네 지라르는 신비평이 다루지 못했던 긴 소설들을 위에서 본 ‘모방욕망이론’으로 설명했다. 그의 분석은 설명적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해결’보다는 ‘설명’에 치중했다. 그러나 음모론의 함정은 용케 피했다. 윤리와 역사를 도외시 하지 않았다. 그는 구조에 역사와 상황을 끌어들여 욕망과 이념의 허구성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이해로 직진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로부터 후기구조주의시대의 소설이론이 싹을 틔운다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지라르의 소설이론은 상기 다섯 작가의 작품들을 욕망의 삼각구조로 분석한 것이지만 소설 분석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소설이 인간 정신의 보고, 정신분석의 무의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는 보여준다. 인간에게는 ‘심리’와 ‘사회’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설명해 주었다. 어쨌든, 남의 욕망만 모방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의 욕망을 하나쯤은 꼭 가져야 할 것 같다. 특히 사랑과 관련해서는. 그래야 좀 덜 허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