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⑥

은빛강 2012. 3. 10. 15:35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⑥ - 보여주는 것들, 이미지의 문명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10일 토요일 오전 7:28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⑥ - 보여주는 것들, 이미지의 문명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보기 좋다. 남녀 불문이다. 가히 신인류다. 우리와는 체형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도대체가 구김살이 없다. 어려워도 표정은 밝다. 듣기에 따라서는 좀 경박스러울 수도 있지만, 식스팩도 좋고 꿀벅지도 좋다. 거침없는 말뽄새나 꾸밈없는 행투가 시원시원해서 오히려 보기가 좋다. 플로베르의 보봐리즘, 스탕달의 허영, 프루스트의 속물주의는 이제 한갓 수사(修辭)거나 과거지사에 불과하다. 매개된 욕망 즉 모방욕망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누가 누구를 모방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거다’ 싶으면 일제히 같아진다. 대학에서도 교복이 성행한다. 스키니 바지에 플랫 슈즈, 헐렁한 야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통일성을 추구한다. 욕망의 매개자고 삼각형의 욕망이고 따질 틈도 없다. 이미 그들의 욕망은 중개인 없이 거래된다.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속세, 욕망의 시장은 이미 에덴동산으로 귀환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정면 승부다. 언젠가, ‘힐링 캠프’라는 TV프로에서 한 정치인 출연자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의 세대 언어 중 ‘베이글녀’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환갑의 연치에 이른 그 출연자가 ‘베이비 + 글래머 + 女’라고 맞추었다. 얼굴은 앳되고 몸은 풍만한 여성이라는 뜻이란다. 그런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게 지금 우리 시대다. 베이글녀, 그 말 안에 에로티즘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조어법이었다. 정치가니까 그런 세간의 풍속에 대해서 늘 관심있게 체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한편으로는 명색이 소설가라면서(전직?) 그런 신종 유행어에 둔감한 내가 좀 한심스럽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쪽은 전통적인(?) 내 관심사가 아니던가? 내 박사 논문의 주제가 에로티즘이었다. 황순원 소설을 소년기 에로티즘, 성년기의 각종 에로티즘(변태, 동성애 포함), 노년기 에로티즘까지 각종의 에로티즘으로 분석한 것이 내 논문이다. 그런 공인된 색광(色狂)이 베이글녀를 모르다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관음증(觀淫症, voyeurism)이 지배한다.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관음증은 에로티즘의 한 필수 요소다. 그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러니까 에로티즘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몰래 엿보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옹호된다.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관철해 낸다. 엿보기 음란증이 문화의 한 코드로 자리잡는 형국이 된다. 심미적 코드에서 사회적 코드로, 다시 논리적 코드로 자신의 숙주 영역을 넓혀 나간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 없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이 글도?). 세칭 ‘하수도 문화’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상수도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여성의 신체 노출이 정치적 목적성을 띠고 도전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보여준, 일견 당황스럽고 서투른, 양가적 반응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혼재했다. 같은 정치적 색채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행위에 대해서 찬반이 갈렸다. 원 의도는, 관음증을 이용해서 그런 관음증 문화를 한 대 때리는 건데, 그래서 당사자로서는 선의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해 내겠다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파장이 다른 쪽으로 흘렀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보면 그만큼 ‘관음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양상이 철저하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종의 ‘관음증 콤플렉스’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난의 물줄기가 ‘여성 비하 발언, 마초 시비’로 급선회하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던 것도 그런 자의식의 결과였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 사회가 관음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한 ‘보기 좋은’ 사례였다는 생각이 든다. 에로티즘에 관한 한, 그것이 우주적 생명의식의 발로든 아니면 의도를 지닌 정치적 공격행위든, 어떤 것이든 현재로는 관음증이나 관음증 콤플렉스를 배제하고는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 같다.

관음 문화는 엿보기를 전제로 한다. 정면보다는 측면, 문을 열고 보는 것이 아니라 틈을 통해 보는 것이 ‘엿보기’다.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은 ‘들추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건 윤리를 비껴간다. 늘 미끄러진다. 그렇게 보면, ‘엿보고, 들추고, 미끄러지는 것’이 관음 문화의 속성이다. 비단 에로티즘에만 그런 ‘엿보고, 들추고, 미끄러지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문화’가 아니다. 당연히 신문의 정치면도 늘 그런 ‘엿보기, 들추기, 미끄러지기’로 가득 차 있다. 사실이나 진실보다는 ‘아니면 말고’식의 쾌를 추구하는 가십거리가 넘친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쾌의 원천을 찾아 헤매는 것이 정치부 기자들의 책무인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을 때가 속출한다. 그러니, 하수도와 가까운 곳들에서,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다루는 곳들에서, 연예나 오락에서, 관음증이 넘쳐흐르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대중들의 관음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내는 사회 현상 중의 하나가 가짜 프라이버시 복제품들의 범람 현상이다. 유명인의 프라이버시를 도용한 합성된 가짜 사진(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돈다. 진짜가 올라와서 ‘폭로’의 문화를 선도하는 것과는 또 다른 현상이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돌려본다. 그런 게 타락한 이미지 문명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역시, 권택영 교수의 저서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소개된 내용을 참조해서 우리 문화를 누비고 다니는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자(좋은 차나 좋은 책은 세 번 정도 우려야 좋은 맛을 볼 수 있다).

이미지의 문명은 세계를 알몸의 육체로 바꾸고 그 육체를 이미지의 형태로 소유한다. 이것이 오늘날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회관계와 소유관계에서 발생한, 역사적으로 보지 못한, 중대한 변화이다. 카메라(텔레비전, 영화, 비디오)는 세계를 이미지, 장면, 장경(場景)으로 바꾸어 분배와 소유의 평등을 실현하고(모든 눈 가진 자는 수 있고 볼 수 있으므로 소유할 수 있다) 사물의 실체성corporeality을 순수한 이미지 또는 영상기호로 변환시켜 모든 눈들에게 제공한다. 이미지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눈이고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시각기능이다. 눈이 원하지 않는 것은 손도 대지 않는다. 손은 더 이상 순수 촉각이 아니라 ‘눈 달린 촉각’이다. 손의 스침으로, 눈 달린 촉각의 부드러움으로, 창을 열게 하는 스마트 폰이 바로 그런 현상의 대표적인 물질적 현현이다. 이 문명의 담론 속에서 플라톤은 바보 멍충이다(?). 그의 철학은 모든 ‘보여주는 것들’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현세 이미지의 가치를, 모질게 부정하는 개똥(?)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시각 쾌락의 원칙은 태초부터 존중받았다. 그것은 본디 하느님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이미지를 따서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 때 그가 거둔 첫 번째 성과는 시각적 즐거움(보시기에 좋았더라)이었다. 알몸의 두 남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눈을 즐겁게 하고, 하느님은 눈으로 그들을 소유한다. 두 남녀가 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그들이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소임을 거부하고 알몸을 가렸을 때 하느님은 진노한다. ‘부끄러움’은 애초에 맺은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의 시뮬라시옹에 발생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각적 즐거움을 앗아간 행위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게 최초의 악이었다. 그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하느님에게 자행한 하나의 ‘박탈’이었다. 이 ‘박탈’은 인간 추방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거기까지는 태초의 신화다. 현대 신화는 문명의 신화다. 현대 문명은 ‘박탈’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자고 유혹한다. ‘보여주는 것들’의 천국, 태초의 낙원을 회복하는 것이, 문명의 소임이라고 주장한다. 이미지의 문명은 세계를 투명한 알몸의 이미지(순수 외설)로 바꿈으로써 최초의 시뮬라시옹을 향해 필름을 거꾸로 돌리고 원초의 낙원을 재생한다. 장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던의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으로 보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재현된 이미지의 낙원에 시비를 걸 것인가? (권택영,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참조)

흔히 루카치를 든다. 루카치가 소설을 가리켜 ‘타락한 세계에 대한 타락한 방식의 서사시’라 말했을 때 그가 제기한 것은 정확히 형식의 문제였다. 그러나, 루카치의 문제 제기는 ‘보여주는 것들’의 범람을 겪고 있는 현대 문명에 대한 시비(지적)로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서사 생산양식으로서의 영화가 겪고 있는 딜레마를 그의 소론이 이미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영화를 닮아갈수록,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에만 집착할수록, 소설도 죽고 영화도 죽는 현상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틈을 타서 이종 격투기 같은 것들이 판을 친다. 이야기의 본령인 정체성 서사가 뒤로 물러나고 주술이나 성전환, 아니면 패러디 같은 부수적인 흥미 요소가 이야기를 선도한다. 대작을 자처한 『마이웨이』(강제규, 2011) 같은 작품이 관중(독자)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성 정체성 문제나 주술적 모티프를 전경화한 『바람의 화원』이나 『해를 품은 달』과 같은 드라마가 압도적으로 시청률을 높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장르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TV드라마가 ‘이야기 요소’를 어떤 식으로든 길게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영화보다는 다소 유리한 입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안에서, 서사의 전체성 안에서, 아쉬운 대로 ‘발견’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드라마)와 소설의 서사/기법 교환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세계의 이미지화와 언어기호의 순수 이미지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공생관계를 강화한다. 이미지의 문명이 특정의 감성구조와 취향과 욕구를 가진 수용주체들을 생산해 놓았고, 따라서 지금의 소설은 과거 문자매체 전성기의 주체들과는 현저히 다른 수용자를 상대하게 되었다. 이 수용자는 한순간 소설의 독자이면서 다음 순간 영화의 관객이다. 그는 읽을 뿐 아니라 그림을 요구한다. 당연히 한 매체에서의 대중적 성공은 다른 매체에서의 성공까지도 보장한다. 소설이 성공하면 영화(드라마)가 성공하고, 그 역도 대체로 보장된다. 이 호환성의 조건은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작가들을 유혹한다. 이제 소설은 자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에 속하거나 아니면, 그것의 대본으로서의 의의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게 된다.

다시 형식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이미지 문명 시대의 좋은 영화는 소설을 닮는다. 좋은 영화의 조건은, 이미지 생산이라는 자신의 방식으로 어떻게 이미지화한 세계의 문제적 현실에 대응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미지화한 세계의 문제적 현실이란 그 세계의 평면화, 표피화, 경박화, 파편화이다. 좋은 영화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서사적으로 조직하며 이 조직의 방법에 따라 이미지는 그것의 평면성, 표피성, 파편성을 극복하는 대항적 성질을 획득한다. 그게 좋은 영화의 속성이다. 소설이 인식해야 하는 것은 영화가 이 서사적 조직법을 소설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그 자체의 서사법을 희생하면서 영화적 영상을 삽입하기 위해 불필요한 확장과 나열, 서사논리로부터의 이탈 등을 수행하고 마치 이것이 새로운 소설쓰기의 방법인 양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방 내주고 화장실로 뛰어드는 일과도 같다. 소설 독자들이 영화로 쉽게 건너가는 책임이 소설가들에게도 있다는 말이다.

소설적 서사형식에서 영화가 배우는 것, 따라서 모든 서사양식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과성과 전체성의 형식이다. 바르트가 통찰한 대로 소설은 인과의 질서에 대한 끝없는 변조와 왜곡이면서 ‘언제나 이미’그 질서 속에 있다. 아니, 소설은 그 질서를 만들어낸다. ‘보여주는 것들’은 항상 그 질서 안에서 나열되어야 한다. 이 질서 만들기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인과성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전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것이 서사의 전체성이다. 이 만들어지는 인과성의 비밀을 우리는 ‘발견’이라고도 하고 ‘인지’라고도 한다. 그것은 정보의 평면적 연기가 아니라 ‘발견되는 진실’이다. 이 인지와 함께 없었던 전체성이 만들어지고 서사는 ‘이야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시각 쾌락의 원칙 이상의 것이며 그 즐거움 때문에 서사는 부단히 만들어지고 향유된다. 그 발견된 진실이 허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그게 허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허구에 도달하는 과정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보여주는 것들’은 오직 그 ‘발견의 과정’에 필요한 요소일 뿐, 그 자체로 ‘발견의 진실’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관음증이야말로 그러한 진정한 ‘발견의 과정’을 도외시하는 이미지 문명의 사이비 질서, 도착적인 ‘발견의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관음증은 몰래 엿보는 것이기 때문에, 들추고 미끄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인된 ‘발견’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발견’은 항상 공증(公證)을 요구한다. 공증된 것들만이 전체의 이익에 기여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남 몰래 보는 자들과 타락한 문화로서의 ‘보여주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저 도착적인, 은밀한 즐거움에 그칠 뿐이다. 그것이 관음증의 태생적 한계다. 문화가 관음으로 흐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할 기회를 부여하는 문화의 힘에 대한 몰각(沒却)이 우리 시대의 한 징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몰각의 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정치문화다. 모든 책임은 정치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정치를 용인하는 우중(愚衆)에게 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정치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다. 다시 문화로 돌아가자. 문화를 담당하는 자들의 소임은 다만, 언제나 문화의 발전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할 뿐이다. 그것만이 문화가 부족한 것을 메꾸는 본연의 소임에서 벗어나 오직 ‘보여주는 것들’로 떨어지는 것을, 비문화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같은 곳을 보는 자들’이 남아 있는 한, 세상은 돌고 또 도는 것이니, 언젠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는, 관음도 없고 정치도 없는, 진정한 낙원이 다시 우리를 찾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도 든다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