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⑧

은빛강 2012. 3. 10. 16:38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⑧ -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해피엔딩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10일 토요일 오후 4:06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⑧ -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해피엔딩

 

며칠째 신문에서 계속 우울증 이야기를 한다. 내년부터는 모든 국민에게 우울증 정기검진을 실시한단다. ‘현재 가장 유력하게 검토하는 방안은 특정 연령을 선정해 해당 가정에 정신건강 검진표를 우편으로 보내 검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검사 연령 3, 7, 18, 30, 45, 60세 국민이 살고 있는 모든 집에 검진표를 보내고, 회수한 검진표를 분석해 정신질환 가능성과 정신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검진표는 영유아의 경우 부모가, 청소년은 본인이 직접 응답하는 방식으로 하고, 청장노년층은 우편 검사와 함께 건강보험 정기건강검진 때 관련 항목을 넣어 검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영유아는 발달, 지적, 언어장애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초중고생은 인터넷 중독, 불안장애, 우울증, 정신질환이 처음으로 발병하는 시기로 알려진 18세~20대 초반은 우울증,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을 중점 검사할 계획이다. 직장인에 대해서는 스트레스와 우울증, 불안장애 진단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고, 최근 자살이 늘고 있는 노년층은 우울증과 자살 징후 등을 주로 검사할 방침이다.’(조선일보, 2012.2.20.)

 

기사를 읽다 보니 만시지탄(晩時之歎), 더 이상 정신질환을 방치해서는 안 될 상황에서 나온, 늦은 감이 있지만 시의적절한 조치인 것도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가 나서서 일괄적으로 개개인의 정신 건강을 체크한다는 것이 좀 께름칙하기도 했다. 아마, ‘빅 브라더’에 대한 의구심 때문일 것이다. 조사 방법이 우편 검사라 하니, 조작이나 자의적인 왜곡의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도, 본인의 정신 상태가 누군가에 의해 체크되고 있다는 것을 환기(喚起)하는 것만 해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 낫지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직접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아본 사람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정이나 직장에서 주위의 정신질환자 때문에 견디기 힘든 심적, 물적인 고통을 받아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딱히 정신질환자라고 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갈등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세칭, ‘경계성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숫자도 꽤 많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충동을 자기 스스로 전혀 콘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태로 가정이나 직장 조직에 미치는 폐해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런 인사들에게는 공동체 차원의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집단이나 그 문제적 개인을 위해서나 유용하다. 파국이 올 때가지 기다리는 것은 미개(未開)에 다름 아니다. 무언가 사회 전체의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오늘 기사를 보고 처음 안 사실이 있다. 정신질환이 18세에서 20대 초반에 발병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문뜩 엉뚱한 생각이 든다. 그 시기에 비로소 ‘현실’에 직면(直面)하기 때문은 아닐까? 현실 원칙의 엄정함을 몸소 느끼는 때가 바로 그 때다. 언젠가 그 나이 또래의 가수가 그 나이 또래 직전의 아이들에게, 격정적으로 춤을 추며,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를 외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가? 그 멤버였던 양현석이 선생(멘토)이 되어 심사석에 앉아있는 것을 어제 TV에서 봤다. 여전히 순기능의 환상을 제조하는 일에, 초지일관, 종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 생각에, 정신병원 100개 보다 그 한 사람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지나친 억설인가? 어쨌든 그는 우리 양가(梁哥) 중에서는 가장 현달한 사람이다. 내 조카뻘이다.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환상을 찾는 것은 현실 때문이다. 현실은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 ‘위안’은 현실원리에는 없는 단어다. 현실은 자신 안에서 꿈을 꾸고 위안을 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신성모독(神聖冒瀆)이라고 여긴다.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린다. 처벌은 가혹하다. 매질을 해서 내치거나, 정신병원에 가두거나, 금치산자로 몰아 자신이 부여한, 현실원칙 안에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자신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생에 대한 애착을 끊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잠들 때를 기다리거나(그가 잠든 틈을 타 꿈을 꾸거나) 아니면 그를 속일 궁리를 한다(문화적인 장치를 이용한다). 현실의 눈은 수천 마리의 번견(番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잠들지 않는다. 몇 마리는 항상 지킨다. 좀처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부득불 속임수를 쓴다. 현실도 인간의 것인 한 속는다. 전능한 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속는다. 종교나 예술이나 계급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나 교양주의 같은 것들한테 잘 속는다. 그것들은 본디 인간이 자신 안에 내장된 불멸의 사악한 정신과 대적할 때 쓰려고 만든 자기 수련용 무기다. 인마 살상용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에게 현실이 잘 속는다. 그것들은 환상이면서 환상이 아니라고 우겨서 현실을 우격다짐으로 압도하기도 한다. 거의 도착 수준에서 현실을 어거지로 속인다. 그래서 광기로 치닫는다.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때론 현실이 우정 ‘눈가리고 아옹’ 식의 속임수를 용인하는 수도 있다. 그게 피를 덜 흘리는 방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문화고 예술이다.

 

예술의 한 갈래로서 이야기(문학)는 현실이 허용한 ‘공인된 속임수’다. 그것 안에서는 마음껏 환상을 누려보라는 것이 현실의 권고다. 현실에는 마법의 지팡이가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것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이야기는 허황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 측면에서 판타지야말로 이야기의 본향이다. 그게 어쩌다 잘못되었다. 샛길로 빠졌다. 마치 사실과 방불해야만(혹은 방불하기만 하면) 이야기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호도되었다. 한 동안 그런 풍조가 기승을 부리니 엇나가는 경우도 있다. 순도 높은 판타지로만 간다. 어떤 이야기든 재미있게만 늘어놓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 둘이 지금 평행선을 달린다. 물론,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이야기만 되면 이야기다. 그것 이상도 그것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서로 나누는 근본 취지가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마법의 지팡이’ 말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출신성분을 잊고 지나치게 현실을 추구하거나 밑도 끝도 없는 신기성에만 집착할 때는 이야기가 자신의 본향에서, 현실에 의해 주어진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다. 그러면 독자도 같이 떨어져 나간다. 우리가 슬픈 이야기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이 더 슬퍼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슬프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찾는 것이다. 환상도 마찬가지다. 환상에서 시작해 환상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현실을 위안하지 못한다. 이야기, 문학의 언어는 어쨌거나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그게 현실과 문학을 온전히 다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해피 엔드 혹은 이야기의 비현실성 : 자신의 소원의 실행을 위탁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경이의 장치를 배제한다면, 동화, 판타지 소설, 옛날이야기들은 판에 박힌 하나의 도식으로 축소될 수 있다. 그 도식 속에서 모든 이야기 요소들은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행복한 결말이라는 목적을 향해 결합된다. ‘좋은 결말’은 이런 이야기의 주된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수 천 가지 뜻밖의 사고, 그 이상의 예기치 않았던 장애물들은 오로지 그 성공을 지연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많은 이야기들의 결말(좋은 결말)은 문자 그대로 그것의 ‘종국 목적’이다. 그것은 결국 이야기의 기원에 내포된 중핵적 요소이다. 제멋대로 연기된 그 대성공 이외에는 다른 어떤 할 말도 없는 것, 이 대성공은 그것이 실연되는 목적이고 의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해피 엔드’인가?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기분 전환을 시키기 위해서, 또한 가장 친근한 사물들 속에 있는 불가해한 것과 금지된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는 행위(낯설게 하는 작업), 즉 옛날이야기의 모든 비법은 바로 그 자리 옮기기 속에, 반드시 진실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거짓을 과시하는 이 환상으로의 자리 옮기기 속에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현실의 그럴듯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꾸며진 것(허구)’을 부합시키려고 애쓰는 ‘사실적인’ 소설과 반대로, 그것의 비현실성을 과시하고, 그것의 사실 같지 않은 일들을 자랑삼아 펼쳐 보이고, 믿어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독단이라는 상상력의 절대 왕국의 법으로 자신의 요소들을 과장하고, 축소하고, 변형시키고 왜곡한다. 요컨대 전해 오는 이야기들에 내포된 익명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에는 이런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으며, 당신들도 믿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심심풀이로 말한다. 왜 그런 심심풀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만 하는가? 삶은 너무 슬픈데, 삶을 치유하기 위한 마술 지팡이는 없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적인 것의 무책임으로 떠나는 이 여행에의 초대는 보다 심오한 사실주의의 알리바이가 될 뿐이다. 그것은, 그 끝에서 진실이 육체적인 시초를 되찾고, 정신이 그 호기심의 처음을 되찾는 지름길이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야말로 가장 깨어 있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마르트 로베르(김치수,이윤옥),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 참조)

 

인간은 본디 불량품이고, 불량품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은 어차피 우울하다. 그게 인생의 진면목이다. 인생은 늘 활기차고, 밝고,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신병이다. 문학이 다루는 것은 정신병이 아니라 인생의 진면목이다. 진면목을 거부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마법의 지팡이’ 한 자루일 뿐이다. 해피엔딩이다. 그 외의 결말은 없다. 그게 다다.

 

 

-나의 생각-

필자[양선규]님은 이렇게 귀결지었다.
[문학이 다루는 것은 정신병이 아니라 인생의 진면목이다. 진면목을 거부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마법의 지팡이’ 한 자루일 뿐이다. 해피엔딩이다. 그 외의 결말은 없다. 그게 다다.]

판타지 소설이 보여주는 진면목은 잠시 쾌락을 즐기무로써, 현재 일어난 자신의 깊은 우울을 망각하게 한다는 의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적인 중독성이 강하다고 본...다.

본인도 한때는 무협영화 [동방불패-규화보전]으로 연마된 그 신기한 무술에 흡입이 되어 있었던 시간이 있었기는 했다.
피로한 한주를 마감하며 그러한 종류의 영화로 모든 것을 망각 하려 들었다.
몸의 근육의 이완이 축소 되면서 결려 오는 육신의 고통들, 신경을 과부화해서 생겨 난 편두통, 등등...
그러나 생활 속에서 작게나마 깨달은 것은, 다양한 물감들을 풀어서 맨발로 질퍽이며 온몸으로 물감과 동화되는 행위에서 커다란 위안을 얻어 내었고,
좋아하는 음악을 볼륨높게 켜놓고, 그 음악을 따라 즉흥적인 다수의 색상을 붓으로 뒹굴리고 뿌리고 그저 감각 하나만으로 한 음악이 끝날 때 까지 그리는 작업을 비디오에 남겼다.
그후, 영화 보다는 그 행위적인 작업을 브라운관을 통해서 음악과 그림의 움직임을 감상을 한다.
그때의 그 즉흥적인 감성, 기쁨, 환희, 슬픔, 괴로움, 절망, 그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로 부터 받은 책에 [도올이 백남줌을 만난 이야기-石壽畵論]에서 야기 하는 것 가운데 [백남준님과 한국무용가와의 즉흥적 춤이있는 이야기]인지를 보았는데, 서로 다른 엇놀림을 한 무대에서 주제를 보여주는데, 도무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고 [도올 선생님]은 말슴하셨다.
그에 [백남준님은- 별것 없어 나는 나를 표현하고 그는 그저 춤을 출 뿐이고] 소수의 이들이 이해라기 보다 그것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던 같다. 이 대목에서 [뭐냐!!] 할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이대목에서 영화 [샤인]의 음악가가 바바리만 걸치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향해 무수한 점핑을 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억눌린 자아를 그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그는 그러한 형식으로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것에서 일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소설도 알고 보면 세상 구석 구석 그야말로 소설보다 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
소설이 허구라고는 하되, 세상에 널린 아픔, 구속, 절망, 슬픔, 그리고 육신안에 갖힌 편협 된 그 가엾은 영혼들을 향한 집필인 것이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나의 확실한 답을 찾아서 간다.

양선규 선생님!! 늘 감사하고 이 인연의고리에 배를 삼가올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