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⑩ - 울 만한 것들, 역사와 인간

은빛강 2012. 3. 11. 15:21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⑩ - 울 만한 것들, 역사와 인간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만나는 ‘낯선 것’들은 대체로 세 가지의 감정을 유발한다. 즐거움, 슬픔, 두려움이다. 물론 내 경우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다. 오늘은 ‘낯선 것’ 대신에 ‘장엄한 것’을 넣어서 그 말투를 그대로 한 번 더 써먹으려 한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장엄(莊嚴)한 것’들은 늘 놀라움과 즐거움과 슬픔과 두려움을 선사한다. 그건 설명이 필요 없는 현상이다. 세상의 모든 진정한 ‘장엄(莊嚴)’들은 항시 사람을 압도한다. 압도된 정신이 겪어야 하는 감각(感覺)의 카오스는 흔히 의지(意志)에 없는 목 메임이나 눈물 등을 동반한다. 그것으로 경탄을 대신한다. 그게 정상이다. 압도적인 ‘장엄(...莊嚴)’ 앞에서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언필칭 무감각한 사람이거나, 미숙한 인격이거나, 싸이코패스다. 바보거나 세상모르는 어린아이거나 그도 아니면 냉혈한이라는 거다. 제대로 배운 정상적인 어른이면 그럴 수 없다. 놀랄 때 놀라고 감탄할 때 감탄하고 슬플 때 울먹여야 어른이다. 우리가 아는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육사 이원록은 반듯한 어른들이셨다. 우리가 본받기를 많이 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생애에 처음 만난 ‘장엄(莊嚴)’ 앞에서 목이 멘 경험을 각각 자신의 글쓰기로 토로했다. 같은 장소에서 느낀 같은 느낌이다. 연암(燕巖)과 추사(秋史)의 ‘장엄 앞에서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이라는 책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육사의 소회는 「광야(曠野)」라는 절창으로 표출된다. 난데없는 ‘장엄’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눈물로 남아된 자로서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의식있는 젊은이들의 소감이다.

강을 건너고 처음 마주친, 요동벌판, 그것은 정녕 놀라운 경험이었다. 정사(正使)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을 먹고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 하나를 접어드는 순간, 정진사의 마두 태복이가 갑자기 말 앞으로 달려 나와 엎드려 큰소리로 말한다.
“백탑(白塔)이 현신(現身)함을 아뢰옵니다.”(「도강록(渡江錄)」)
연극적인 제스처로 장차 펼쳐질 장관을 예고한 것이다.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연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삶의 통찰이 담긴 멋진 멘트다. 하지만 뒷통수를 내려치는 건 그 다음 대목이다.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1천 2백 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보고 처음 터뜨린 그의 탄성이다.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어리둥절한 동행자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의 장광설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이름 하여 「호곡장론(好哭場論)」 혹은 통곡의 패러독스! 천고의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렸을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석(金石)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울지 못했다. 그런 울음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요컨대 기쁨이나 분노, 사랑, 미워함, 욕심 등 어떤 감정이든 그 극한에 다하면 울 수가 있으니, 그 때 웃음과 울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극치를 겪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을 당했을 때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억지로 부르짖을 따름이다. 궤변 혹은 예측 불가능한 생성. 이에 다시 정진사가 묻는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七情)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 될까요.”
대답 대신 또 다른 궤변이 이어진다. 갓난아기는 왜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가? 미리 죽을 것을 근심해서? 혹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그렇게 보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이때의 울음은 우리가 아는 그런 울음이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의 환희이자 생에 대한 ‘무한긍정(無限肯定)’으로서의 울음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의당히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저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 만하고,”“이제 산해관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요동벌판에 왔으니 이 역시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호곡장론’의 대단원이다.
참고로 이 ‘호곡장론’ 부분은 독자적으로 인구에 회자되어 일종의 고사성어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다음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시 「요동벌판(遼野)」이다.
천추의 일대 통곡장이란(千秋大哭場)/익살스런 그 비유가 신묘한 법문일세(戱喩仍妙詮)/비유를 하자면 갓난아기가(譬之初生兒)/세상에 태어나며 울음 먼저 우는 셈(出世而啼先).
요동벌판을 보고 연암이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라고 외친 것과 갓난아이의 울음에 대한 궤변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다. 이렇게 비약과 생략을 통해서도 충분히 소통이 될 정도로 그의 ‘패러독스’는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것인가?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즈런한 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曠野」]

앞의 인용문에서는, “요동벌판을 보고 연암이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라고 외친 것과 갓난아이의 울음에 대한 궤변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다. 이렇게 비약과 생략을 통해서도 충분히 소통이 될 정도로 그의 ‘패러독스’는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것인가?”라고 연암의 ‘호곡장론(好哭場論)’이 그 ‘패러독스’로 후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렸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후대의 공감을 얻은 것은 당연히,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였다. 기교는 정신을 앞설 수 없다. 그 호연지기가 표현의 묘(妙)를 얻어 호곡장론(好哭場論)이 탄생하였다는 걸 후대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연암의 호연지기는 추사를 징검다리 삼아 육사에게 이어진다. 이육사의 「광야(曠野)」는 연암의 호곡장론의 근대시적 구현이다. 육사는 연암이 섰던 그 자리, ‘광야(曠野)’에서, 그 ‘울음터’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이 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목놓아 자신의 호연지기를 토로(吐露)한다. 그러니, 그 문화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열하일기』의 ‘호곡장론’ 없이는 이육사의 「광야」도 없다. 시작(詩作)의 동기(動機)로, ‘조국의 독립’ 이전에 연암의 ‘호곡장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저항시의 위상을 훼손하는 불손(불순)한 언설이라고 책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런 해석이야말로 이육사의 「광야」가 제대로 자신의 위상을 되찾는 첩경인지도 모른다. 그 길 외에는 우리가 연암이라는 걸출한 한 문화적 선대가 물린, 조선 남아의 호연지기가 어린, 진정한 ‘광야(曠野)’, 그 역사적 현장을 가질 방법이 도무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 보는 요동 벌판, 그 막막한 광야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호연(浩然)을 울음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던 조선 남아(男兒)들의 심정이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으려면 그 길밖에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그 안에 ‘고구려’인들 없겠는가).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소론(所論)을 조금 인용해 보자. 출전은 [김윤식, ‘육사의 「광야」와 연암의 「호곡장」’, 문학동네, 38호]이다.

“천고 이전에 노래 부른 ‘나’와 천고 이후에 이를 복창해야 할 ‘초인’은 무엇인가. 역사 이전의 첫 번째 존재가 ‘나’라면 후자는 역사 이후의 첫 번째 존재라 할 수 없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나’와 ‘초인’의 만남을 가능케 한 계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래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계기, 또 그 노래를 목놓아 부를 수 있는 계기를 문제 삼을진댄 그것은 ‘광야’가 아닐 수 없다. ‘광야’를 매개로 해서만, 그리고 ‘광야’에서만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 있고, 또 이런 사색, 이런 상상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중략]
열하일기』 중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호곡장론」을 정밀히 분석해 보인 김명호씨의 논문에 따르면 추사의 「천추대곡장」의 근거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요동 벌판을 마주한 연암이 저도 모르게 ‘통곡하기 좋은 장소로고! 울어볼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고 한 곡절을 밝힘에 있어 김씨의 시선은 연암이 사용한 문체의 특이성, 가령 ‘소리없는 눈물’을 무성안수(無聲眼水)라 한 조선식 한자에 집중되어 있다. [중략] 문체의 변혁이 요망될 만큼 그 현장감이 깊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통곡하기 좋은 장소를 설명하기 전에 연암은 당연히도 통곡의 의미부터 캐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七情) 가운데 슬픔만이 통곡을 유발하는 줄 알고 칠정 모두가 통곡으로 될 수 있음을 모르고 있다’고 전제하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통곡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어찌 그뿐이랴. 분노, 즐거움, 사랑, 미움 등도 극에 달하면 통곡으로 될 수 있음을 설명함에 연암이 든 사례는 다름 아닌 갓난아기(赤子)였다.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우는 울음이야말로 거짓 없는 행위라는 것, 이를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장소가 요동벌판이라는 것.…” (김윤식, ‘육사의 「광야」와 연암의 「호곡장」’, 중에서)

육사의 「광야」가 연암의 「호곡장론」의 영향 아래서 씌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광야’를 목전에 두고 ‘소망했던 세계’도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양자 공히 마음껏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펼칠 수 있는 세계(강한 조국?)의 도래를 꿈꾸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1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격하면서도 두 사람에게 공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했던 그 어떤 ‘공감’의 내포가 무엇이었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소박한 응답이기도 하다. 후일 북학파의 거두가 되는 연암이 광야 앞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었다면, 후일 이국땅에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는 육사는 그 앞에서 물론 ‘조국의 독립’을 소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암도 그랬지만, 육사는 조선도 조국도 그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부르지 않은 채 오직 ‘가난한 노래의 씨’와 ‘천고의 뒤’에 올 ‘초인’을 노래한다. 그게 시인의 호연지기, 구국의 노래였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 ‘광야’ 앞에 서 있기 때문인데, 그 앞에서 그가 부른 ‘광야의 노래’ 안에서 ‘강철 같던’ 일제 강점의 현실은 종잇장처럼 그 무게를 잃고, 세상에는 다만 시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만이 ‘매화향기’처럼 홀로 오롯할 뿐이다. 몇 걸음 물러나서 이 시를 역사적 문맥으로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결론은 한 가지이다. 그래서, 연암이 살던 시대는 이른바 청의 속국이긴 했으나 진정한 ‘식민지’가 아니었고, 육사가 살던 시절은 명실공히 ‘식민지’ 시절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소망했던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속단이 될 공산이 크다. 1780년 부마로서 연행사(燕行使)였던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비공식적으로, 중국 여행을 다녀온 연암이 쓴 『열하일기』가 그 문체로 인해 왜 문제작인지를 아는 것(문체반정을 유발한 그의 조선식 어법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한다), 그리고 ‘독립문’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상징물임을 아는 것이 그런 ‘속단’의 조급성을 입증하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지 싶다.

식민지 시대의 절창으로 알려진, 육사의 「광야」와 윤동주의 「십자가」는 역사적 고통을 실존적 성찰을 통해 초극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두 작품이 더욱 감동적인 것은 역사가 주는 ‘고통’을 그 ‘고통’의 차원에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경지로의 도약을 통해, 멀찌감치, 어른스럽게, 초극하려는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길이 시인이 나아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고, 초인을 부를 ‘노래의 씨’인지도 모르겠다. 육사의 ‘호연지기’와 윤동주의 ‘참회’,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볼 때 그것이 사실이지 싶다. 우리도 그런 어른스런 선대의 뜻을 이어, 남을 원망하고 탓하기 전에, ‘울만한 것들’은 없는지, 참회할 것은 없는지 찬찬히 한 번 살펴볼 일이다. 비록 그들처럼의 광야나 십자가는 아닐지라도, 분명히 우리에게도 그런 울음터들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