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⑫ - 번지는 것들, 환유

은빛강 2012. 3. 11. 15:30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⑫ - 번지는 것들, 환유

“날 좀 어떻게 해 봐요. 그러면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
무슨 말인가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불쑥 그녀가 나타났다. 초임지였던 시골에서 올라온 그녀는 조금 겉늙어있었다. 그녀가 농반 진반, 혹은 언중유골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저 황망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을까, 대책 없이 그저 안절부절이었다. 1년차 초임 교사였던 그녀는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하루라도 빨리 도회로 나오고 싶다고 했다. 처음 겪는 노역(勞役)에 그녀는 아주 지쳐 있었다. 궁벽한 시골에서 겪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다 끔찍하다고 했다. 우리가 자란 도회의 사립학교에 자리를 하나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년들 내가 무슨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원을 다니며 기간제 교사로(그때는 준교사 대우라는 말을 썼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나에게 무슨 여력이 있었겠는가.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냥 그말밖에 할 말이 없었던 거였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도 나올 것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시간들이 쌓이게 될 일이었다. 그때는 서로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도회로 날 데리고 나오지 못하면 너와는 끝이다라는 말로 듣고 있었다.
사람이 말을 할 때, 꼭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현과는 별개로 말 그 자체로 위안이고 사랑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신께 드리는 기도처럼, 우리 인간끼리도 그런 식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화법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때까지 그런 화법을 나에게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나는 일찍부터 그런 ‘사랑의 언어’와는 떨어져 살아왔었다.
“그래요. 힘닿는 데까지 알아볼 게.”
그렇게 한 마디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려워도 좀 참고 견뎌 보라는 말까지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쓴 커피만 한 잔 더 시켜 마셨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녀를 더 볼 수 없었다.

수묵(水墨)정원 9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살아 있는 나뭇가지는 잘 휘어지고, 살아 있는 영혼은 잘 번진다.

‘영혼이 번진다’니, 참 모호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번짐’이라는 말이 너무 ‘번져서’ 모호하게 이런저런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지만 아무도 그런 ‘모호한’ 행위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찬하고 부추긴다. 그런 ‘시(詩)’ 언어 말고도 세상에는 모호한 것들이 많다. 좀 자세히 알고 싶어서 가까이 가면, 무지개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여자의 마음도 모호하고, ‘있는 것을 없다하는 불교의 가르침이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호하다. 살다보면 행복도 모호하고 불행도 모호하다(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무지(無知)가 모호함을 낳는 수도 있겠지만, 모호함을 그냥 두지 못하는 만용도 무지(無知)다. 삶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들을 ‘말을 위한 말’로만 설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즘처럼 국어교육 분야에서 맥락(脈絡, context)이라는 말을 아무데서나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언어적 맥락이 있고, 상황적 맥락이 있고,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고, 화자 맥락, 청자 맥락이 있다는 둥, 조자룡 헌 칼 쓰듯, 맥락이라는 말을 아무데서나 마구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지식과 나란히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 아래 둘 것인가를 두고도 설왕설래가 있었단다. 언어교육에서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지식이다. 어쩌다 모국어 교육에 ‘말하기, 듣기’ 기능이라는 것이 들어와서 혼선을 빚었던 모양이다. 미국 같은 나라야 워낙 초창기부터 다문화 사회였으니까 학교에서 공용어 발화 및 청취 교육을 당연히 수행해야 한다. 쓰지는 못해도 말하고 듣는 일은 반드시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나라 국어교육, 모국어교육에 접목을 했다(최근에 와서야 수능에서 듣기평가가 없어졌다). 서당에서 화법 교육했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고, 우리 세대가 말하기, 듣기 교육 안 받아서 경제가 망하고 학문이 망하고 나라 망하게 했다는 소리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쑈를 벌이고 있다. 그 화법 교육, 사족의 영역에서 지금 또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모호한 것으로 명백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다. 고작해야 말장난이다. 본디, 작은 범주의 명백한 것들로 큰 범주의 모호한 것을 설명해야 학문이 되는데, 그 반대로 나가고 있으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맥락’이라는 말은 아주 모호한 용어다. 문맥, 상황, 환경, 조건, 스키마 등등을 다 포괄하는 단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 어떤 제한적인 수식어가 붙어도 구문론적으로는 다 그럴듯하다. 안 되는 말이 없다. 신축성이 그만큼 크다는 거다. 그러나 의미론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베르니케 실어증이나 한 가지다. 겉은 멀쩡한데 안은 텅 비어있는 구문이다. 화자 맥락이니 청자 맥락이니 하는 말까지 가면 이미 ‘맥락’이라는 용어의 전제 자체가 무너지는 형국이다. ‘맥락’은 화자와 청자가 함께 들어가 있는 ‘의사소통의 환경 전체’를 지칭하는 말인데 그걸 화자와 청자로 나누어버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화자의 발화 조건이나 청자의 청취 조건은 일괄적으로 의사소통의 맥락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인데(그래서 그 조건을 감안해서 화자는 말을 하고 청자는 듣는다. 화자는 곧이곧대로, 아니면 적응, 순화시켜 말하고, 청자는 새겨듣거나 흘려듣는다), 그 전제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쓰려면 의사소통의 여섯 가지 변인, 이를테면, 화자와 청자, 메시지와 채널, 코드와 맥락 같은 것들을 다시 새롭게, 자기 입맛에 맞도록, 정리해야만 한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인정하고) 맥락을 세분하는 것은 간장에 된장 푸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의사소통의 도식이 어떻게 그려지는 것인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야콥슨은 의미의 소통이 어떤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지 간명하게 설명한다. 주고받는 의미의 전부를 메시지가 공급하는 것도 아니고, 공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의미가 전달행위 전체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제시한 도식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의사소통이 맥락으로 편향되어 있다면, 지시적(referential) 기능이 우세해진다는 것을 뜻한다.(테렌스․호욱스 / 오원교, 『구조주의와 기호학』, 신아사, 참조)

맥락(context, 지시적)
메시지(message, 시적)
발신자(speaker, 정감적)---------------------------수신자(hearer, 사동적)
접촉(contact, 교화적)
코드(code, 메타언어적)

맥락을 구성하는 것에는 역사적 사실, 문화적 전통, 시대적 상황(정치, 경제), 개인적 스키마 등이 있다. 앞에서처럼, 언어적, 상황적, 사회문화적, 화자적, 청자적 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일종의 ‘맥락의 종류’를 나누려고 한다면 그건 오류다. 우리집은 보통 부모방 거실 아들방 딸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만, 집은 아들집, 딸집, 사글세집, 전셋집, 단독주택, 아파트주택으로 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다.
한때, 코드(code, 기호운용체계)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참여정부 때다. 사회 전반의 의사소통 맥락이 크게 한 번 요동쳤다. 어제의 코드와 맥락이 오늘의 오해와 편견으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항상 그렇다). 서로 코드가 안 맞아서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 대신,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논다느니, 코드 인사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다. ‘코드’를 ‘성향’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코드가 문법(패턴)이라면 맥락(콘텍스트)은 상황이다. 문법은 항상 상황과 충돌한다. 정해진 법칙을 지키려는 코드와 항상 변화하려는 맥락 사이의 긴장이 곧 언어다. 그것이 우리의 ‘살아 있는’ 언어 생활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은 있어도 ‘코드 맞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굳이 그 당시 회자된 ‘코드’란 말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동일한 ‘사회적 코드’를 공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퀴로드는 코드를 논리적 코드, 사회적 코드, 심미적 코드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예절 코드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적 코드 안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코드 맞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