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⑪ - 희미해지는 것들, 옛 사랑

은빛강 2012. 3. 11. 15:24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⑪ - 희미해지는 것들, 옛 사랑

작성: 양선규 2012년 3월 11일 일요일 오전 5:16 ·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⑪ - 희미해지는 것들, 옛 사랑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다시 읽었다. 처음 그 시를 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감흥(感興)은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가히 ‘김빠진 맥주’였다. 마치 허름한 산문 한 편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오래된 일기장의 한 귀퉁이에 적힌. 그 시가 그렇게 읽힌 것은 당연히 내 인생 역시 ‘김빠진 신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에서 김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처럼, 마흔 살의 고비를 넘기면서부터다. 한 고비를 넘긴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장자(莊子)』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장자(莊子)』가 비로소 전신적 반응(全身的 反應)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 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장자(莊子)』를 읽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책 광고에 혹해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주섬주섬 사 모으기도 했었다. 그때는 주로 그 우의(寓意)의 신선함에 매료되었었다. 허를 찔리는 쾌라고나 할까? 산목(山木, 산에 있는 나무 중 못생긴 것이 오래 살아남음), 목계(木鷄, 나무로 만든 닭처럼 싸움닭이 허장성세를 아주 버리는 경지에 도달), 포정(庖丁), 설검(說劍) 같은 것들이 좋았다. 그러나, 그 맥락(context)이 주는 큰 울림을 온몸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일기일경(一機一境), 온몸으로 경험하는 읽기의 목록에 아직 『장자(莊子)』는 없었다.

세상의 의미 있는 ‘만남’들이 다 그러하듯이, 『장자(莊子)』와 내가 만나는 데에도 동시다발적인 인연의 공세(攻勢)가 함께 했다. 그럴 때는 인연이 계시(啓示)가 된다. 계시 하나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가, 『장자(莊子)』가 진면목(眞面目)으로 내게 왔을 때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는 나의 화두가 허무였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했다. 그 방도를 찾는 한 방편으로 『장자(莊子)』도 읽었고, 그 문의(文意)에 기대어 『나비꿈』이라는 소설집도 펴냈다. 또 그 와중에서 검도(劍道)와도 새로이 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실존을 재구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몸바꾸기’에 나섰다. ‘몸바꾸기’가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단단히 쐐기를 박아놓을 필요가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칼과 그림자』라는 검도일기를 펴냈다. 그 글쓰기는 ‘이 길에서 벗어나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는 ‘자기 규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결과적으로(성공적으로?) 그 책에서 미리 써놓은 대로 내 인생은 진행되었다. 어쨌든, 그때까지는 『장자(莊子)』가 ‘몸’이 아닌 ‘머리’로 읽혔다. 그래서 「설검(說劍)」 같은 검도소설도 ‘머리’로 썼다.

…후지이발(後之以發)에 선지이지(先之以至)라! 대저 칼싸움의 요체는 상대보다 늦게 칼을 뽑으면서 먼저 칼을 닿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후발선지(後發先至)! 상대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의 칼의 궤적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내 칼이 날아가 그를 벤다….(「說劍」)

호구를 입고 대련을 하다보면, 검도의 묘미는 그 후발선지의 경지를 체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를 안다는 것, 그것이 내가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인 것이다. 적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다. 허심(虛心)! 내 마음을 비워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상태로 두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을 비추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음을 비울 수 있는가? 집착을 끊는다면,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집착도 끊어야 할 것 아닌가? 그도 저도 아닌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부동심(不動心)이란 무엇인가? 이미 그것은 몸이 되어(肉化) 말의 경지를 벗어난 의미인가? 설혹 그런 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들이 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가치란 말인가? 그래서 재즈도 나오고 피카소도 나오고, 하여튼 당시에 내가 쓴 검도소설에서는 그런 졸렬한(?) 화제가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그런 차일피일 속에서 읽던 『장자(莊子)』가 ‘몸으로 읽기’의 대상이 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우연의 소치였다. 오다가다, 어느 한 독회(讀會)에 가입하게 되었다. 가서 보니 주로 중국의 고전을 읽는 모임이었다. 마침 그 때가 그 모임에서 『장자(莊子)』를 읽고 있을 때였다. 그 독회에는 그 방면의 전공자급 인사가 있어서 다른 고전과의 비교를 포함한 상당히 깊은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게 계시였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나 할까.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이 위나라의 영공(靈公)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영공은 그의 말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 뒤로는 영공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而視全人 其脰肩肩)….(「덕충부(德充符)」)

병신(病身)의 육체가 오히려 온전한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눈이라는 것. 사람의 진가(眞價, 眞假)는 외형에 있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말을, 짧지만 매우 효과적인 표현으로 잘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좀 달랐다. 마치 무슨 에피퍼니(epiphany)나 되는 듯 굴었다. 메시지 하나만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저 자신을 척도로 삼을 뿐이라는 것과 그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불가피성을 그다지도 잘 요약한 글이 없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해 온, 이제는 하릴없이 돌아와 금가고 얼룩진 거울 앞에나 서 볼까 하는, 한 중늙은이의 심사(그때는 그렇게 여겼다)를 그렇게 잘 대변(代辯)하고 있는 글이 세상 또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그 부분의 독회가 있던 날 하마터면 좌중 앞에서 눈물까지 쏟을 뻔하였다. 아마 그 즈음에 새로 겪던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단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그야말로 ‘인기지리무신’인 주제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해 보니 좋더라며, 검도를 전파한답시고 좌충우돌할 때였다. 사람들은 으레 자신이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할 지경에 도달하면 그것에 침을 뱉고 돌아선다.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그건 나도 해 봐서 아는 일이다. 사람들은, 하나를 비우지 못하면 다른 하나를 새로이 채워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버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으로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외면한다. 그리고 그 ‘외면’의 책임을 꼭 타인에게 돌린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실망과 배신감뿐이었다. 그런 심적 배경에 그 대목이 크게 와 닿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크게 와 닿은’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와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모든 게 결국 내 욕심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창건한 유가 학파가 맹자에 이르러 크게 빛을 발하였다면, 노담이 시작한 도가 학파는 장자에 이르러 큰 발전을 이루었다. 장자가 없었다면 도가가 유가와 버금가는 사상 유파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자의 후학들은 장자의 근본론, 우주론, 본체론, 회의론, 제물론을 분명하게 밝히고 본성은 선악을 벗어난다(性超善惡)는 도가의 인성론을 만들었다. 또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핵심으로 삼는 가치관과 도덕관을 제출하였으며, 군주는 무위하고 신하는 유위한다는 치세술(治世術)을 발전시켰다. 장자는 같은 시대의 혜시(惠施)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듯하다. 혜시는 “만물을 쫓아다니다 돌아오지 못한다(逐萬物而不反)”라고 말했지만 장자는 사물과 나를 함께 잊어라(物我俱忘)고 주장했다. 사실은 장자도 자연, 사회, 인생에 대해 상당히 깊게 사고하고 있었다. 장자는 구체적인 사물을 탐구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고 더욱 높은 단계에서 세계에 대하여 더욱 일관된 철학적 개괄을 해낸 것으로 봐야 한다. 혜시는 “만물은 다 같고 다 다르니 이것을 일러 대동이(大同異)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장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런데 혜시는 만물이 다 같다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자는 그저 만물이 다 같다는 각도에서 논증을 하여 “그 같다는 것으로부터 보면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고 강조를 하였다. 혜시는 또 “만물을 널리 사랑하면 천지는 일체이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만물 일체의 이론은 실제로 장자가 추구한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가 되었다. 왕부지는 장자를 두고 “혜시 때문에 내7편의 작품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비록 확증은 없더라도, 장자와 혜시가 사상적으로 상호 분발시키고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우샤오간(최진석옮김), 『莊子哲學』, 소나무, 1998, 참조.]

『장자(莊子)』가 전신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독서물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중․장년 이후의 독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싶다. ‘빼기 인생’이 시작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더하고 붙이는’ 자에게는 아직 『장자(莊子)』가 없다. 지금 보면 유치한, 마흔의 시,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부록으로 첨가한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