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을 창가에두고/문학과철학개론서

우청우탁(寓淸于濁)⑨ - 거부하는 것들, 풀의 미학

은빛강 2012. 3. 11. 15:16

인문학 스프-문식
우청우탁(寓淸于濁)⑨ - 거부하는 것들, 풀의 미학

김수영의 시 「풀」에 보면, 시도때도 없이 ‘눕는 것들’이 나온다. ‘풀’이다. 「풀」이라는 시가 서경(敍景)에 머무는 시가 아니라면, 그것은 서민(민중)을, 서민의 어떤 속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풀이 서민(민중)의 한 속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그 역사가 깊다. 김수영의 시 「풀」에서와 비슷한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사용된 것이 『논어』에서도 보인다. 안연(顔淵)편에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군자의 덕(통치 행위)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삶)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바람의 방향을 따라) 눕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사(政)에 대해 물으면서, “만일 무도(無道)한 ...사람을 죽여 (나머지 다른 백성을) 도(道) 있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형(死刑)의 방법으로 정사를 도모하는가? 그대가 선하게 행하면 백성도 선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뒤에다 부연한 말이 그 ‘초상지풍(草上之風)’ 대목이다.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풀」은 그의 문학을 애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다양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독자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대표작이기도 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김수영의 최고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해석도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작품 자체가 단선적인 ‘선형적 서사구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줄거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시와 함께, 몇 가지 해석의 예를 소개한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뿌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 ‘죽음’과 ‘그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랑’이 <풀>에 드러난 김수영 시 정신의 기본구조다. 김수영에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남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 있는 존재를 더욱 참되고 살찌게 하는 어떤 것이다.
* 풀의 생리와 운명이 일체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거의 완벽한 언어경제에 의하여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풀이 상징하는 것은 「거대한 뿌리」에 등장하는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등의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풀을 반드시 버림받은 존재로 번역하여 읽을 필요는 없다.
* 풀은 식물군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비천한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또한 모든 삶을 누리는 존재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의존하는 기초이다.
* ‘더 빨리’나 ‘먼저’라는 표현은 행위하는 주체자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풀이 상징하는 존재의 자유를 노래한 시이다.
* 이 모든 것은 하찮은 목숨 하나라도 결코 무시되지 않고 소홀히 되지 않게 지키고 돌보려는 시인의 깊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 김수영이 「풀」과 같은 극히 상징적인 수준에서 표현한 작품에서는 거의 유감없이 시적 성취에 이르고 있는 반면, 역사적인 현실에의 관심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에서 부분적인 모호함이나 추상적인 진술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에, 그가 처했던 어떤 상황이 그의 詩作에 대하여 일정하게 제한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책임은 자신의 책임인지, 다른 어떤 책임인지 엄밀히 따져 볼 일인지 모른다. (김종철 「시적 진리와 시적 성취」 참조)

「풀」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모든 카오스를, 뜨기 바로 전에 발표했던 시다.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시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수작(秀作)이다. 나약한 민중을 풀로, 거센 세파(世波)를 바람으로 묘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눕는 것들’의 생생력(生生力)을 잘 드러내고 있다. 미물(微物)로서의 풀과 미력(微力)으로서의 삶을, 서로 마주 세워진 상태에서, 공감각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시다. 음악성도 상당하다.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시 해석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기만 해도 상세하게 접할 수 있으니 여기서는 간단하게, 오늘 우리의 주제인 ‘눕는 것들’과 관련해서만 언급한다.

김수영의 시 「풀」은 논어의 ‘초상지풍(草上之風)’의 패러디다. 김수영은 공자의, ‘눕는 것들’은 항상 위에서 ‘누르는 것들’에게 복속(服屬)한다라는 말에 배알이 꼴렸다. 자신의 신세도 결국 그 ‘눕는 것들’의 처량, 비참함에 여지없이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비굴에 대해 성찰한다. 그때는 자기가 풀이다. 풀의 시선에서 세상을 본다. 그 차원에서 ‘빨리’나 ‘먼저’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지니는 말이다. 이중성이다. 그것 이상의 뜻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게 자신이고 민초들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선적인 서사구조를 가지지 않는 것은 시인이 본디 거짓을 고(告)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東風)’은 오직 ‘눕는 것들’을 눕게 하는 힘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양풍(洋風)이 동쪽에서 왔다는 설명도 구차하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도 그저 이중성일 뿐, ‘눕는 것들’로 산다는 것일 뿐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시인은 ‘초상지풍(草上之風)’의 실상(實狀)에서 자기 자신과 민초들의 실상(實像)을 연상했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김수영은 역사도 실존도 모두 그렇게, 오직 적나라한 삶의 구체(具體)로, 살다 갔다.

김수영의 시 「풀」은 풀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시다. 그러면 시도때도 없이 ‘눕는 것들’의 기분이 이해된다. 그 기분을 제대로 느끼는 자만이 민주시민이다. 한갓 풀인 주제에, 못된 바람이 들어, 시도때도 없이 ‘초상지풍(草上之風)’의 풍(風)인 것처럼 노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아주 못된 허위의식이다. 풀은 지역이나 세대를 초월한다. 그 모든 구분 위에 존재하는 것이 ‘풀’이다. ‘눕는 것들’이다. 그걸 모르면 잡초다. 아니, 독초다.